십자가의 도 (3) (바울의 사역과 우리의 믿음)
고전 2:1~5
2024.09.01.
오늘 본문은 십자가의 도에 대한 세 번째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사도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무엇인지 말씀했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고 우리의 새로운 기준과 방법입니다.
이제 사도바울은 십자가의 도에 대한 세 번째 말씀을 합니다.
그런데 이 세 번째 말씀은 십자가의 도가 무엇인지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도를 사도바울이 자신에게 적용한 내용입니다.
자신이 십자가의 도를 가지고 고린도교회 사역을 어떻게 시작했는지, 그리고 그 사역을 통해 자신이 무엇을 향해 나아갔는지 말씀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십자가의 도에 기초한 사도바울의 사역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 내용은 비단 사역자들만 알아야 할 내용이 아니라, 모든 신자가 알아야 할 내용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살펴보기 전에, 오늘 본문에 대한 작은 오해를 먼저 해소하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1절에 ‘하나님의 증거를 전한다’는 말씀이 나오고, 또 4절에 ‘전도’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얼핏 오늘 말씀이 전도에 대한 말씀이 아닌가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전도에 대한 말씀으로 오해해서, 특히 2절을 전도 방법으로 생각하시는 분이 간혹 있습니다. ‘전도는 어렵고 복잡할 것 없어,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그것만 전하면 돼... 나머지는 다 성령님께서 알아서 역사하셔... 그런 방법이 미련한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께서는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셔...’
네, 실제로 그런 전도 방법이 있었습니다. 한때 어느 모 전도협회에서 그런 방법으로 길에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쳤습니다. 한 분이 “예수 천당, 불신 지옥” 외치면, 나머지 사람이 똑같이 외쳤습니다.
제가 청년 시절에 담임 목사님이 그 전도협회에 가서 훈련받고 은혜를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돌아와서 그 방법으로 전도팀을 만들어 토요일마다 전도했습니다. 저도 토요일 회사 근무를 마치고 참석했습니다. 육교 저쪽 끝에는 천리교 몇 사람이 나무 막대기를 ‘딱딱’ 치면서 전도하고, 이쪽 끝에서는 우리가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면서 전도했습니다. 지금도 그때 지나가던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네, 우리 교회들이 그렇게 전도를 열심히 하면서,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전도 방법이 거의 사라지고 있습니다.
오래전 100년 전 처음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전해졌을 때에는, 그렇게 “예수 천당, 불신 지옥,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외치며 전도했습니다. 그렇게 전도한 최권능이라는 유명한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져야 하죠.
오늘날에 맞게 전도하는 방법은 우리 교회와 신자들이 좀 급한 마음을 내려놓고... 한 영혼을 향한 사랑과 모범과 기도와 대화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간 우리 교회들은 복음이 성장하는 시기에 급한 마음으로 전도하고 서두른 감이 많았습니다.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곧 내일 주님이 오실 것처럼, 우리 세대 안에 지상명령을 성취해야 할 것처럼 그렇게 급하게 전도했죠.
그러다 보니, 우리 신앙의 균형이 너무 전도와 선교에 치우친 면이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 말씀을 전체적으로 읽어보면, 전도는 우리 신앙의 중요한 한 부분이지만, 전부는 아닙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은 하나님께서 그 시대에 전도의 문을 열어주시고, 한 사람의 마음의 문을 열어주시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 열심과 노력만으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이미 복음의 성숙기에 접어든 우리나라의 상황을 이해하면서 급한 마음이나 어떤 특별한 방법보다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여주면서, 사랑과 모범과 기도와 대화라는 본연의 방법으로 전도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 속에 우리가 그렇게 진실하게 전도하면, 전도의 열매를 거둘 줄 믿습니다.
아무튼 오늘 본문은 전도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사도바울이 처음 고린도에 도착하였을 때 어떤 마음과 어떤 뜻을 가지고 사역을 시작하였는지, 십자가의 도를 자신의 사역에 어떻게 적용하였는지... 그런 내용을 말씀하는 본문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우리는 이 말씀을 당시 시대적인 배경 속에서 보아야 합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그때에는 그리스-로마 주요 도시에서 소피스트 선생들이 많이 활동하였습니다. 특히 고린도는 그 주요 본고장인 아테네에서 아주 가까운 곳이기 때문에, 오고 가는 소피스트 선생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선생들은 새로운 도시에 갈 때, 그냥 가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도시에 혼자 가서 광장에 서서 연설하는 것이 아니라, 유력한 사람과 만나고 사회자의 화려한 소개 속에 대중들의 열렬한 박수갈채를 받고 첫 연설을 시작했습니다. 소피스트 선생들은 그 도시에서 그런 방법으로 자신의 가치를 높이며,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절 말씀에서 사도바울이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라고 말씀하는 것은 이렇게 자신과 소피스트 선생들의 첫 시작을 비교하는 말씀입니다.
사도바울은 순회하는 그런 선생들과 달랐습니다. 그는 고린도 성을 둘러보며, 이곳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기도하며, 그렇게 자신의 사역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렇게 비교하는 내용은 계속 이어집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선포하는 내용도 그들과 달랐다고 말씀합니다.
소피스트 선생들은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을 전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고 듣고 싶어하는 세상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지혜로운 삶, 현명한 삶, 건강하고 부유하게 사는 법,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방법, 대화의 기술... 그런 내용과 주제를 연설하거나 가르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런 내용과 주제는 오늘날 우리도 유튜브에서 자주 접하는 내용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에는 유튜브가 우리의 소피스트 선생이죠.
그러나 사도바울은 그런 선생들과 달리,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 죽으심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말 그대로 앵무새처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만 말하겠다는 뜻이 아니죠.
이 말씀은 내가 이곳 고린도에서의 사역과 가르침과 메시지의 중심에 예수님과 그분의 십자가를 분명히 두겠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사도바울은 고린도에서 세상의 소피스트 선생들과 다르게, 삶의 행복과 부와 물질과 건강과 지혜와 보다 나은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를 선포하는 것으로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은 왜 그것을 그렇게 스스로 결심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는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이 가야 할 새로운 길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세상 선생들의 말을 들으며 행복을 추구하고 부와 물질을 추구하고 건강과 지혜를 추구하는 것이 필요하죠. 그러나 사람들은 무엇보다 죄와 죄된 자기중심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통해 새로운 인류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이른바 예수 혁명이죠.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로 새롭게 바뀌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습니까? 사람이 어찌 자신의 매인 모습을 발견하고, 죄와 죄된 자기중심을 버리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십자가를 통과할 수가 있을까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 막중한 사역을 품고 처음 고린도에 나아갈 때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습니다. 현재 3절 말씀은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라고 되어있지만, 원문과 문맥을 고려하면 “내가 너희 가운데 나아갈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가 더 어울립니다.
왜 그랬을까요?
고린도는 그 어느 도시보다 세상적인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부와 물질과 지식과 지혜와 힘이 가득한 그 어둡고 화려한 도시에,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를 전하는 것은 너무나 불가능한 미션 같았습니다.
그런 사도바울의 심정을 아마도 선교사님이나 개척교회 목사님들은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도 오래전 선교단체 간사로 처음 담당 캠퍼스에 갈 때, 제가 사는 동네에 교회를 개척할 때, 그런 심정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4절 말씀과 같이 자신의 말과 자신의 복음 선포를 사람들이 듣기 좋게 포장하거나 꾸미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복음답게, 합당한 방법으로 선포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4절의 ‘전도’라는 말은 헬라어로 ‘케리그마’인데, 이것은 ‘선포’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4절을 ‘전도’라는 좁은 말 대신에, ‘선포’라고 하는 넓은 말로 읽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4절에 ‘설득력 있는’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페이도스’인데, 이 말은 좋은 의미도 되고, 나쁜 의미도 되고, 중간 의미도 됩니다. 좋은 의미는 ‘설득력 있는’ 이고, 나쁜 의미는 ‘교묘한’이고, 중간 의미는 ‘그럴듯한’입니다. 그래서 이 단어의 뜻은 문맥을 통해 결정되는데, 아마도 사도바울이 말씀한 의미는 결코 좋은 의미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4절 말씀은 “내 말과 내 선포함이 그럴듯하거나 교묘한 사람의 지혜로운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였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은 왜 복음을 세상에 맞추어 세상이 잘 받아들일 수 있게 포장하거나 꾸미지 않았을까요?
그 이유는 그렇게 하면 복음이 변질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예수의 십자가 복음이라도, 그것이 전달될 때 사람의 교묘한 지혜로 변질되고 우리의 만족과 유익과 행복을 위한 복음이 되면, 복음은 변질됩니다.
우리는 그런 복음의 변질을 오늘날에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잘 됩니다. 예수 믿으면 복 받습니다. 예수 믿으면 소원성취하고 성공합니다...” 우리는 이런 생각 속에 예수님을 믿으면 안 됩니다.
물론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죠. 그러나 그런 비슷한 말을 우리는 자주 듣습니다. “세상에서 승리하는 비결, 교회와 성도의 권세, 길이 막힐 때, 걱정과 염려를 떨치는 방법, 넘어진 자리에서 일어나라, 만사형통의 믿음...”
우리는 이런 제목의 설교에 무척 익숙해져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365일 예수님의 십자가 말씀만 묵상하거나 들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게 우리 만족을 위해 꾸며지고 포장된 메시지들이 주일 설교강단에 너무 많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바울의 말씀을 통해, 지금 우리 교회들의 복음 선포가 예수님의 십자가 중심을 잃고, 그때의 고린도와 같이 인간의 지혜의 말로 나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늘 돌아보며 조심해야 합니다.
이렇게 사도바울은 자신의 복음 선포의 내용과 방법이 그럴듯한 사람의 말과 지혜가 아니라, 오직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리하여 사도바울은 최종적으로 5절에서 고린도교회 신자들의 믿음이 사람의 지혜로 세워진 세상적인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세워진 참된 믿음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 하나님의 능력이 과연 어떤 능력인가?’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이 부분입니다.
‘이 하나님의 능력은 어떤 능력인가?’
네, 그것은 바로 사도바울이 지금까지 계속 말씀하고 있는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능력에 대한 우리의 오랜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인간은 본래 능력을 좋아합니다. 큰 능력과 힘을 갖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에도 능력을 좋아합니다.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죽은 자를 살리고, 방언하고, 넘어지고, 쓰러지고... 그런 능력이 나타나면 사람들은 그 앞에 엎드립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시내산 앞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의 임재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님 이후 새로운 하나님의 능력으로 바뀌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친히 사람이 되시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 병을 고치고 귀신을 축출하고 죽은 자를 살리셨지만, 마침내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연약한 모습으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지만, 그 부활하신 능력의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 이후 사도들도 병을 고치고 능력과 기적을 행했지만, 그러나 그런 능력은 사도행전 뒤로 갈수록 사라졌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진정한 능력이란 눈에 보이는 현상과 기적과 파워가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 죄를 용서받고 자기를 부인하고 변화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성령님의 능력과 은사는 그런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우리를 도우시는 능력과 은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사도들처럼 하나님과 하나님의 능력을 새롭게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홍해를 가르시고 여리고성을 무너뜨리시는 것만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십자가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고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진정한 능력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깨닫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 신자들의 믿음이 십자가의 능력 위에 세워지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야 그들의 믿음은 세상적이고 우상적이고 인간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믿음이 아니라, 참된 믿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십자가의 능력 위에 세워지는 참된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과 기독교 신앙이 이렇게 뚜렷하게 십자가 위에 세워졌다면, 이제 우리는 우리 안에 십자가가 있는지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십자가 앞에 우리 죄짐뿐만 아니라 우리의 교만과 자기중심과 물질 중심을 내려놓았는지, 십자가를 통해 사랑과 용서와 인내와 평화와 같은 새로운 삶과 신앙을 배웠는지... 우리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정한 기독교를 추구해야 합니다.
오래전에 한국교회를 잘 아는 어느 외국 목사님이 한국교회를 방문하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한국교회는 3가지를 사랑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한다”
저는 그분의 말에 크게 공감이 갔습니다. 한국교회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열심히 잘 믿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도 사랑하고 돈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오늘 말씀에 비추어 생각하면, 한마디로 한국교회에는 십자가가 없다는 말이 됩니다. 교회마다 눈에 보이는 십자가는 많지만, 진정한 십자가는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있으면, 교회는 화려해지지 않습니다. 부유해지지 않습니다. 이기려고 하지 않습니다. 권력을 지향하지 않습니다. 정치와 손을 잡지 않습니다. 깨끗해집니다. 떠들지 않습니다. 겸손해집니다. 전도도 겸손하게 합니다. 기도도 깊이 하게 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많은 교회와 지도자들의 모습은 어쩐지 그런 모습과 다릅니다.
너무 화려합니다. 너무 크고 강합니다. 대통령도 자주 만나고, 집회와 시위도 하고, 광장에서 외치고 부르짖습니다. 이미 승리한 군대와 같습니다. 주일 설교도 마치 소피스트 선생들처럼 모르는 것이 없고 모든 답을 아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십자가의 도를 가지고 고린도에 나아가는... 연약하고 두려워하고 떠는 사도바울을 봅니다.
한 달 전 지난 7월 21일에 한 분이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의 이름은 김민기입니다. 아침 이슬과 상록수를 작곡하고 극단 학전을 운영하고 많은 제자를 배출한, 우리 시대의 한 인물입니다.
사실 저는 김민기씨를 잘 몰랐습니다. 아침 이슬과 상록수를 작곡하고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에 기여하고 민중 운동을 한 분이 아닌가... 대략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여러모로 크게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지난달 그분이 돌아가셨을 때 그분의 장례식 뉴스 영상을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배우와 가수들이 진심으로 그분의 죽음을 슬퍼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비로소 제가 그분에 대해 이런저런 내용을 찾아보고 그분의 노래도 다시 듣고, 또 그분이 그동안 어떻게 살아오셨는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제 생각과 달리, 그분은 좌와 우라고 하는 정치적인 색깔과 이데올로기의 옷을 입지 않았습니다. 미술을 전공한 그분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노래를 만든 것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다가 노래를 만들고 노래를 만들다가 그림을 그렸을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종교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금관의 예수라는 노래를 만들기도 하고, 본 회퍼와 자신을 비교하며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본 회퍼는 히틀러를 제거해야 한다고 믿었지만 그것은 아닌 것 같고, 자신은 자신을 고문하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을 보면... 하나님을 모르는 분은 아닌 것 같습니다.
수수한 옷을 입고,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시대의 아픔과 늘 함께하고, 정부나 기업의 돈을 받지 않고, 어렵게 극단을 꾸리고, 많은 제자를 낳고, 많은 사람에게 귀한 것을 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영상을 보니까, 그분이 극단 배우들을 모아놓고 한 달 동안의 극단 재정을 결산하고 월급봉투를 돌리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월급을 나눠줄 때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자기보다 더 많은 월급을 준 직원이나 배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가만히 보니까, 그 모여있는 모습이 어쩐지 사랑의 공동체처럼 보이고 교회처럼 보였습니다. 그분이 거기 서서 예수님 말씀만 전하면 교회가 될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삶에 십자가가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그분을 어떻게 보시는지 잘 모릅니다. 다만 제가 김민기 씨를 통해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십자가의 능력은 그런 모습이라는 사실입니다.
자기를 드러내고 사람들 위에 올라서고 큰일을 하고 돈과 명예를 쫓고 똑똑해지고 강해지고 복수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고 자기를 내려놓고 자랑하지 않고 돈과 명예와 정치에 오염되지 않고 사람들을 사랑하고 시대의 아픔과 사람들의 어려움과 함께하며 아름다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큰 울림과 감동을 주는 진정한 능력이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와 믿는 분들 속에서도 그런 진실한 십자가의 능력으로 살아가시는 분들이 많을 줄 믿습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사도바울은 십자가의 도를 가지고 고린도로 나아갔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 신자들의 믿음이 십자가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진정한 능력 위에 세워지기를 소망했습니다.
아무쪼록 우리 성도님들도 십자가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신앙의 기초로 삼으시고, 세상과 다른 믿음이 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