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예수 중심과 십자가 중심

믿음찬교회 0 64 08.05 12:59
예수 중심과 십자가 중심
고전 1:10~17
2024.08.04.

오늘 말씀부터 고린도전서 본론이 시작됩니다. 고린도전서 본론은 크게 5가지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5가지 내용은 첫째 분쟁과 분파, 둘째 음행과 송사, 셋째 결혼과 우상 제물, 넷째 성령의 은사, 다섯째 몸의 부활입니다. 이 5가지가 고린도교회 안에 있던 큰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들은 고린도교회 안에 각각 개별적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 되는 보다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근본적인 큰 문제는 성령의 은사를 통한 완성된 종말론 사상입니다. 이것은 ‘우리는 방언으로 대표되는 신비적 은사를 받았기 때문에, 이미 구원을 받은 것이다’라는 사상입니다.
이런 잘못된 신앙 사상이 근본 원인이 되어서... 분쟁과 분파가 생기고, 음행이 나오고, 우상 제물을 함부로 먹고, 은사에 혼란이 오고, 우리의 몸의 부활도 부인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 안에 있는 이와 같은 큰 근본 문제를 인식하면서 이 다섯 가지 문제에 대해 하나씩 말씀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그 첫 번째 문제인 분쟁과 분파에 대한 말씀입니다.
분쟁과 분파에 대한 말씀은 오늘 본문부터 시작해서 4장까지 길게 진행됩니다. 여기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신령한 사람과 육에 속한 사람, 사역자들의 역할, 하나님의 성전, 사도바울 자신의 간증 등 여러 말씀이 담겨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본문은 이렇게 분쟁과 분파에 대한 첫 번째 말씀 안에 있는 첫 번째 작은 말씀입니다.

지난 주일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사도바울은 9절에서 코이노니아를 말씀했습니다. 그 말씀은 분쟁과 분파에 대해 이제 말하겠다고 운을 띄우는 말씀이었습니다. 코이노니아를 말씀한 후에 사도바울은 단도직입적으로 10절을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이 10절 말씀은 우리 생각과 달리, 사도바울이 신앙적인 의미에서 하는 말이 아니라, 당시에 있던 정치 사회 슬로건을 빌려서 하는 말입니다.
토 아우토 레게테(같은 말을 합시다), 메 에 스키스마타(분쟁이 없도록 합시다), 엔 토 아우토 노이(같은 마음으로), 엔 테 아우테 그노메(같은 뜻으로) 이와 같은 말들이 당시 정치 사회 질서와 평화를 언급하는 고대 문헌에 종종 등장합니다.
지금으로 치면, “공중 질서를 지킵시다, 양보 운전을 합시다...” 이런 말들이죠.
그래서 지금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 신자들이 사회적으로 익히 알고 있던 그 말들을 사용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사실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네, 우리는 여기서 고린도교회의 분쟁과 분파 문제가 어떤 성격의 문제였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교회 분쟁과 분파 문제는 신앙적이고 교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라는 사실입니다. 즉 신앙이 다르고 교리가 달라서 애초에 분쟁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평소에 그들이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인물을 따르고 추종하던 세상적인 삶의 방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물론 신앙과 교리 면에서의 문제점이나 차이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분파 문제는 근본적으로는 그들의 삶의 방식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영향력 있는 큰 인물을 따라야 출세하고 잘 살 수 있었습니다. 고위 관리나 부유한 상인이나 조합장이나... 이런 사람들을 많이 알고 교제하고 사귈수록 그들은 돈을 벌고 잘 살고 신분 상승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사도바울은 각 분파의 잘못된 교리나 신앙적 특징에 대해서 따로 지적하거나 말씀하지 않습니다. 바울파는 이렇고, 아볼로파는 이렇고, 게바파는 이렇고... 그런 말씀이 없습니다.
다만 한 분파에 대해선 그들의 잘못된 점을 자세히 말씀하는 것 같습니다. 그 분파는 신앙과 교리 면에서 분명히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분파는 바로 그리스도파로 여겨집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직접적으로 그리스도에게 속했다고 주장하며, 그리스도와의 직통 계시를 주장하며, 성령의 각종 은사를 체험하고 받았다고 주장하는... 이른 바 영성파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분파는 다른 분파들과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그들의 잘못된 신앙을 나중에 성령의 은사에 대해 말씀할 때 자세히 다루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영성파 즉 그리스도파 사람들을 제외하고 나머지 바울파나 아볼로파나 게바파는 신앙적이거나 교리적인 차이 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분들이 교회 안의 유명한 지도자들이기 때문에 따랐고... 그래서 분파가 생겼습니다.
바울파는 아마도 사도바울을 잘 아는 초창기 고린도교회 신자들인 것 같습니다. 아볼로파는 아마도 사도바울 이후 고린도교회를 방문한 아볼로의 탁월한 말씀과 지식과 세련된 수사학에 매료된 신자들인 것 같습니다. 또 게바파는 아마도 고린도교회를 자신의 아내와 함께 방문한 것으로 여겨지는 베드로를 따르는 신자들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대략 이런 내용을 정리해 보면...
바울파는 고린도교회 초기 신자들, 아볼로파는 지적이고 엘리트적인 신자들, 게바파는 정통 유대적 신자들, 그리스도파는 성령의 은사와 체험과 직통 계시와 구원의 완성을 주장하는 위험한 신자들... 이렇게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도바울은 12절에서 고린도교회 안에 있는 4개의 분파를 말씀합니다.

이어서 사도바울은 이와 같은 분파가 교회 안에서 결코 생겨선 안 되는 이유를 2가지로 말씀합니다.
첫 번째 말씀은 13절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이 어떻게 그렇게 조각조각 찢어질 수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그건 온전한 몸이 아니죠. 그러므로 찢어진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사도바울은 또 말씀합니다.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바울이든 아볼로든 베드로든... 누구도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이름으로 세례를 줄 수 없습니다. 세례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만 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12절 말씀의 의미는, 우리 신앙이란 예수님 한 분을 중심으로 하는 유일한 중심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분쟁과 분파가 있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과 같이, 우리 교회도 오직 예수님만이 유일한 중심이 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분쟁이나 갈등은 없습니다.
대개 교회 안에서 다툼이나 갈등이나 분란이 일어나는 이유는 목사님이나 장로님이나 아니면 사회적으로 신분이 높거나 부자이거나 ... 그런 교회의 중요한 분들이 예수님으로 충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사람이 모인 곳이므로 한 사람이든 두 사람이든 당회이든 위원회이든... 표면적으로는 결국 사람이 일하게 되고 사람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예수님으로 충만하면 문제가 없습니다. 목사님이 일을 많이 하고 중심이 되어도, 목사님이 예수님으로 충만하면 괜찮습니다. 장로님이 일을 많이 하고 재정을 많이 담당하시고 중심이 되셔도, 장로님이 예수님으로 충만하면 아무 문제 없습니다. 혹 기도 많이 하시고 예언의 은사를 가지신 어떤 집사님이 계셔도, 그분이 예수님으로 충만하고 그 은사를 잘 사용하시면 아무 문제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들 안에 예수님이 충만하지 않으면, 교회는 예수님 중심이 되지 못하고 사람 중심이 되고 분쟁과 갈등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 예수님으로 충만하고, 예수님의 뜻 안에서 함께 나아가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때로는 교회 안에 돈이 중심이 되기도 합니다. 건축을 할 때, 돈이 많이 드는 사업을 할 때, 교회 안에 돈이 많을 때, 목사님이든 장로님이든 누가 욕심을 가질 때... 교회는 돈이 중심이 됩니다. 그렇게 교회 안에 돈이 중심이 되면, 시험과 분쟁과 갈등이 많이 생깁니다.
때로는 교회 안에 사역이나 일이 중심이 되기도 합니다. 물론 다 예수님 일이고 예수님 사역이죠. 그러나 실제로는 교회가 자기 사역을 하고 사역자가 자기 사역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역시 시험과 분쟁과 갈등이 많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우리 교회는, 예수님을 유일한 중심으로 삼아서, 분쟁과 갈등이 없이, 하나님께 쓰임 받는 귀한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분쟁과 분파에 대한 사도바울의 두 번째 말씀은 17절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이 17절 말씀은 우리 신앙의 중심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기 때문에, 분쟁과 분파가 있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대개 우리는 이 말씀을 이와 같은 문맥에서 따로 떼어서 이 17절 말씀 자체만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지...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해... 그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그리고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 말의 지혜로 하면 안 돼...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순수하고 바르게 전해야 해...’
대체로 이렇게 이해합니다. 예, 17절 말씀만 생각하면 이런 이해가 맞습니다.
그러나 지금 사도바울은 어디까지나 분쟁과 분파 문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분쟁과 분파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하면서 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의미는 2가지입니다.
17절 안에서의 의미가 있고, 오늘 본문 전체 안에서의 의미가 있습니다. 17절 안에서의 의미는 말의 지혜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전체 안에서의 의미는 분쟁과 분파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첫째, 말의 지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합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그때에는 수사학이 큰 영향력을 끼치던 시대였습니다. 그때에는 소피스트라고 불리우는 선생들이 수사학을 가지고 도시들을 순회하면서, 다양한 주제로 대중들에게 연설하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수사학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듣는 사람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그 효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수사학의 목적은 듣는 사람이 그 이야기에 감동 받고 만족하고 마음이 움직이는... 그런 효과를 일으키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래서 수사학과 말의 지혜는 그 내용이 얼마나 사실이냐 얼마나 진실이냐 얼마나 진리이냐에 중점을 두지 않고, 어떻게 설득하고 어떻게 효과를 내고 어떻게 결과를 만들어 내느냐에 중점을 둡니다. 그래서 아시는 바와 같이, 시간이 흐를수록 소피스트 선생들은 궤변론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수사학과 말의 지혜는 복음과 근본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우선 수사학과 말의 지혜는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수사학과 말의 지혜는 어떤 사람을 설득하여 일시적으로 달콤한 솜사탕을 사게 할 수는 있지만, 솜사탕을 근본적으로 좋아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목적입니다.
복음은 믿는 사람이 위로 받고 사랑 받고 평안을 얻는 어떤 믿는 효과를 주려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핵심인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말함으로 한 사람을 전체적으로 완전히 변화시키기를 원합니다.
또 수사학과 말의 지혜는 내용에 중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설득에 중점을 둡니다.
그러나 복음은 내용에 중점이 있습니다. 복음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이고, 그 안에는 그 역사적 사실과 예수님의 피와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이 담겨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수사학과 말의 지혜는 복음과 근본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근본적으로 복음과 맞지 않는 수사학과 말의 지혜로, 만약 복음을 전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복음의 본질이 훼손됩니다. 복음의 본질이 훼손되면 진정한 회심이 일어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의 지혜로 복음을 전해선 안 됩니다.
물론 복음을 전할 때 말의 지혜로 해서는 안 된다고 해서, 그저 십자가와 예수님의 죽으심만 무조건 말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가급적 좋은 방법을 사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전도의 미련한 것이란 말씀은 방법이 미련해도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전하는 전도의 그 내용 자체가 세상 사람이 보기에 미련해보인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수사학과 말의 지혜와 같이 복음의 본질을 가리거나 훼손하는 방법이 아니라, 복음의 본질에 맞는 좋은 방법으로 전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믿으면 잘 된다, 성공한다” 이런 달콤한 설득이 아니라, 또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간다, 가계에 저주가 흐른다” 이런 두려움을 주는 설득이 아니라, “예수 천당, 불신 지옥”같이 공공장소에서 불쾌감을 주는 설득이 아니라, 한 사람의 상황과 열린 마음에 알맞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잘 전해야 합니다.

한편, 목사님들이 복음을 설교할 때에도 말의 지혜로 하면 안 됩니다.
만약 설교가 말의 지혜로 말솜씨가 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약해지는 일이 발생합니다. 당장은 감동이 되고 은혜가 되지만, 오래가지 못합니다. 감동도 사라지고 은혜도 사라집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의 뼈대와 골격은 복음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우리 신앙의 진리와 하나님의 말씀에 근본적으로 능력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님들은 보셔야 합니다. 지금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자의 말솜씨와 능력으로 전달되고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 말씀이 본연의 능력 속에 설교자를 통해 전달되고 있는지...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혹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신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아무쪼록 본연의 능력 속에 부족한 저를 통해 잘 전달되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도든 설교든 회심이든 회심 후 신앙생활이든... 말의 지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오는 근본적인 회심과 은혜와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이유 때문에 예수를 믿어선 안 됩니다.
예수 믿으니까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좋고, 설교 들으니까 위로가 되어서 좋고, 교회 다니니까 아는 사람 많아서 좋고, 기도하니까 응답 받아서 좋고, 우리 교회는 시설이 좋아서 좋고, 목사님이 부담을 안 줘서 좋고... 그런 이유로 교회를 다니고 신앙생활을 하시면 안 됩니다. 그러면 우리 신앙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이 하고, 말의 지혜를 쫓는 신앙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서는 근본적인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를 근본적으로 예수님 앞에 서게 하고, 주님으로 온전히 믿게 합니다.
아무쪼록 우리 성도님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고백하고 눈물 흘리고 결단하는 온전한 신앙이 되시길 바랍니다.

둘째, 분쟁과 분파 문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합니다.
분쟁과 분파 문제는 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할까요?
앞서 우리는 고린도교회의 분쟁과 분파 문제가 신앙적이고 교리적인 이유도 있지만, 그 주된 이유는 그들의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옛 삶의 방식 때문에 일어났다고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이 세상 속에서 큰 인물을 쫓음으로 사회생활에 성공하고 돈을 벌고 신분 상승을 하는 것처럼, 교회 안에서도 큰 인물을 쫓음으로 교회 생활에 성공하고 영적인 지위와 신분을 상승하고 구원을 받으려는 것입니다.
이런 고린도교회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한때 한국교회 안에 부흥회와 부흥사 목사님들이 유명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그런 집회에 가면, 그 부흥사 목사님의 안수기도를 받으려고 너도나도 앞으로 나아가곤 했습니다. 그런 큰 목사님을 집회마다 따라다니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지금도 유명한 큰 목사님이 계시면, 그 목사님과 한번 악수도 하고 사진도 찍고 개인적인 관계를 가지려는 작은 교회 목사님이나 신자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이런 모습을 세상 속에서 익히 보고 있습니다. 유명한 정치인이나 국회의원이나 시장이나 그런 분들과 만나고 밥 한번 먹으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만약 교회가 그렇게 사람을 쫓는 곳이 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헛된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님들은 훌륭한 목사님들의 설교를 듣거나 책을 읽거나 존경할 수는 있어도, 그분들을 추종하지는 마시길 바랍니다.
저도 지금까지 이런저런 유명한 분들을 가까이에서 본 적이... 많지는 않지만 조금 있습니다. 가까이 가보면, 다 똑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님만을 따르시고, 어떤 사람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한편, 분쟁이 일어나고 분파가 생기는 것은 그 결과로 사람을 쫓고 사람을 추종하기 이전에, 그 자체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 위험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분쟁과 분파는 그 자체로 거기에 시기와 다툼이 있고 욕심이 있고 나아가 교회과 신앙을 자기 수단과 도구로 삼으려는 악한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육에 속한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3장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찍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 
이 말씀은 너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아직 온전히 거듭나지 못하여, 여전히 옛 자아와 하나님 앞에서 교만한 자기중심이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런 옛 자아인 육의 사람의 모습으로 지금 교회 안에서 일어난 분쟁과 분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그 문제를 교회를 무너뜨리는 문제로 계속 확대하고 있고, 사도바울의 권면과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계속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모습은 그들을 구원하시고 거듭나게 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자체를 헛되게 하는 위험한 일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 영적인 위험성을 심각하게 생각하면서, 17절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한다”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같은 말씀을 통해 영적인 교훈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사도바울의 오늘 말씀을 통해, 분쟁과 분파 문제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지 그 영적인 원리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영적인 원리를 통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 많은 일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분쟁과 분파만이 아닙니다. 많은 일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할 수 있습니다. 전인격적으로 회심하지 않은 문제, 교만한 자기중심과 옛 자아를 여전히 가지고 있는 문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가라지로 자라는 문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성전을 멸하는 문제... 이런 모든 일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합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헛되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구원의 은총을 무로 돌리고 옛날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 불행한 영적인 역사는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사도바울은 오늘 말씀에서 우리 신앙의 2개의 뚜렷한 중심성을 말씀합니다. 우리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고, 또 그분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합니다.
교회는 그 2개의 뚜렷한 중심성 때문에, 분파와 분쟁이 있을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반대로 생각하면 두려운 말씀이 됩니다.
우리 신앙 중심에서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그분의 십자가를 잃어버리면... 우리의 교회도 우리의 구원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아무쪼록 여러분과 저와 우리 교회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삼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이 하지 않는... 깨어있는 신앙이 늘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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