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시온산과 하늘의 예루살렘

믿음찬교회 0 95 05.29 14:58
시온산과 하늘의 예루살렘
히 12:18~24
2024.05.26.

오늘 말씀은 히브리서의 절정입니다.
오늘 말씀은 시내산과 시온산을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너희가 지금 믿음을 통해 최종적으로 도달한 곳은 시내산이 아니라 시온산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지금 너희가 믿음을 통해 영적으로 도착한 곳이 시온산인 줄 확신하고 믿음과 소망에서 흔들리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오늘은 우리가 이와 같은 오늘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히브리서는 로마교회의 유대인 신자들에게 보낸 서신입니다.
그들은 지금 다가오는 박해의 위기 앞에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들 중 상당수는 이 위기 앞에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마음을 먹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교로 돌아가는 것은 잠시 신앙의 옷을 갈아입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배교이고 구원의 상실입니다. 그것은 생명을 잃는 일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그들을 향해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이 편지엔 어떤 내용이 담겨야 할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유대교로 돌아가지 말라는 말씀을 해야 하겠죠. 지금 너희 믿음을 굳게 잡아야 한다는 말씀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단지 그 말만 할 수는 없습니다.
무엇보다 설득이 필요합니다. 왜 돌아가서는 안 되는지... 돌아가면 어떻게 되는지... 이 위기 앞에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지... 성경적인 충분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그것도 구약적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을 말씀합니다. 천사와 모세와 안식과 대제사장과 멜기세덱과 율법과 성소와 제사... 그러면서 그 구약의 말씀들이 모두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임을 해석하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은 구약의 율법과 제사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되었음을 말씀합니다.
그러나 설명과 설득으로는 부족하죠.
‘이것은 이런 거야’라고 말하는 정도론 안 됩니다. 구체적인 책망도 필요하고 경고도 필요하고 권면도 필요하고 위로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해석의 말씀들 사이 사이에 그런 책망과 경고와 권면과 위로의 말씀들을 반복적으로 합니다.
그렇게 해서 구약에 대한 해석과 설명이 10장 중반까지 마무리됩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히브리서 기자는 본격적인 권면의 말씀을 합니다.
그 권면의 말씀 중 가장 큰 내용은 믿음에 대한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 처음부터 한 사람 한 사람 믿음의 인물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믿음의 주님이신 예수님과 그분의 십자가로 마무리합니다.
그리고 잠시 숨을 고르며... 하나님의 징계와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 말씀합니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마지막 최종적인 말씀을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마지막으로 말하는 것은 시온산과 하늘의 예루살렘입니다.

그런데 시온산을 말하기 전에, 먼저 시내산을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시내산을 모두 7가지의 내용으로 말씀합니다.
만질 수 있고, 불이 타오르고, 캄캄하고, 어둡고, 폭풍이 치고, 나팔 소리가 나고, 말하는 소리가 나는 곳... 그곳이 시내산입니다.
이 7가지로 묘사된 시내산은 두렵고 무섭고 거룩한 곳입니다. 캄캄한 시내산에서 불과 흑암과 폭풍 속에 울려 퍼진 그 소리는 사람의 심장과 존재를 압도하는 소리입니다. 모세마저 두려워하였습니다. 아무도 가까이 갈 수 없고 짐승조차 가까이 갈 수 없는 거룩한 곳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은 만질 수 있는 장소입니다. 또한 그곳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본 곳이고,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리만 들은 곳입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오직 하나님의 임재만 보고 하나님의 소리만 들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이와 같은 말씀은 옛 언약의 한계를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22절부터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과 우리의 새로운 관계와 새로운 구원에 대해 말씀합니다. 우리는 옛 시내산이 아니라 장차 올 시온산에 이르렀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히브리서 기자가 묘사하는 시온산도 모두 7가지 내용입니다.
첫째는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입니다.
실제 시온산은 예루살렘 남쪽에 있는 작은 산에 불과합니다. 예루살렘에는 3개의 산이 있습니다. 성전이 있는 성전산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감람산이 있고 아래쪽에 시온산이 있습니다. 실제로 거기 가보면 건물들이 있고 별다른 특징이 없어서 조금 실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영적으로 또 미래적으로 말씀하는 시온산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이 만나는 미래의 최종적인 장소입니다.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계14:1)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시온에 돌아와 예루살렘 가운데에 거하리니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슥8:3)
이 스가랴서 말씀에서 시온산과 예루살렘과 성은 하나의 의미로 나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와 같은 스가랴서 말씀을 따라, 시온산과 예루살렘과 하나님의 도성을 하나로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우리가 지금 그와 같은 우리 여정의 최종적인 장소에 도착하였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둘째는 천만 천사의 즐거운 모임입니다.
여기서 우리말 번역에는 원문에 있는 한 단어를 빠뜨리고 있습니다. ‘파네기레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기와 명절을 지켰던 축제와 같은 즐거운 모임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도착한 곳은 옛날 시내산과 다릅니다. 그곳은 거룩한 곳이었지만 동시에 어둡고 두려운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도착한 곳은 하나님을 찬송하고 예배하는 즐거운 축제와 같은 모임입니다. 수많은 천사들이 우리의 도착을 환영하며 즐거운 축제를 열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침내 그런 기쁘고 즐거운 곳에 도착한 것입니다.

셋째는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입니다.
장자라는 말은 사랑받는 자녀와 상속자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만유의 상속자이시고 그래서 우리도 상속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와 같은 장자라는 사실은 하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늘에 기록된 장자로서 그런 장자들의 모임에 마침내 영광스럽게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이단은 자신들이 14만 4천 명단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거기 있는 사람들은 그 명단에 들어가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들어가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합니다. 그러나 그곳은 그 명단을 공개하지 않습니다. 아마 계속 공개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이단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사람들을 지배하며 이익을 취하며 더럽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이 말씀하는 그 명단은 하늘에 영적으로 기록된 명단입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여러분과 저의 이름이 거기 기록되어 있는 줄 믿습니다.
한편 여기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라고 번역한 부분은 조금 설명이 필요합니다. 원문으로 이것은 ‘에클레시아 프로토토콘’입니다.
‘프로토토콘’이란 말은 ‘장자들의’ 라는 말이고 ‘에클레시아’는 ‘교회’ 혹은 ‘모임’이라는 말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본래 ‘교회’라는 말은 ‘모임’이라는 일반 말에서 왔습니다.
그래서 ‘에클레시아 프로토토콘’은 ‘장자들의 모임’ 혹은 ‘장자들의 교회’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즉 이것은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가 따로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래서 이 부분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이라고 간단히 번역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혹은 ‘교회’라는 말을 꼭 넣는다면, 조금 어색하지만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교회”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이 말씀은 우리가 그런 영광스러운 모임과 총회에 마침내 참석하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넷째는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입니다.
심판자이신 하나님은 두려우신 하나님이시죠. 옛 시내산에서의 하나님과 같이 두렵고 떨리는 하나님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시기보다는, 세상과 세상 만민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이 말씀은 오히려 기쁘고 감사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고난받은 우리를 위해 그들을 심판하시고 우리를 신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침내 도착한 그곳은 그동안 어렵고 힘들고 눈물 흘렸던 우리의 모든 시간이 온전히 위로받고 보상받는 하나님의 보좌 앞입니다.

다섯째는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입니다.
이 말씀은 시온산에 도착한 우리 믿는 자들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이 되었습니다.
‘영들’이라는 말은 우리가 더 이상 육신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또 우리가 영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시온산에 도착하면서, 온전하게 된 의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면서 많은 흠과 점들이 있었습니다. 비록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지만, 육신을 가진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죄된 생활을 많이 했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죄인으로서 때로는 후회하고 자책하며 때로는 실패하고 넘어지며... 분투하는 영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가 시온산과 하나님의 도성과 하늘의 예루살렘에 도착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온전케 되었습니다. 더 이상 죄가 없고 죄책감도 없고 후회도 없습니다. 우리는 온전하게 된 의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우리가 죄에서 해방된 자유의 땅에 마침내 도착했다는 의미입니다.

여섯 번째는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님입니다.
어떤 분들은 그날에 시온산과 하나님의 도성과 하늘의 예루살렘에 어깨를 펴고 활짝 웃으며 당당히 들어갈지 모르지만, 저라면 그렇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저는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에도 잘 참여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자격도 없고 부끄럽고... 저는 기쁘기도 하겠지만 낯선 땅에 온 이방인처럼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거기 예수님이 계십니다. 천국에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지만, 내가 예수님만은 잘 압니다. 예수님은 내가 늘 기도하고 만나고 마음에 모셨던 주님이십니다. 그런 예수님이 나에게 안으로 들어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저는 비로소 낯선 곳 낯선 땅에서 아는 사람을 만난 사람처럼 안심할 것 같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하나님의 도성과 우리를 이어주시는 중재자이십니다. 우리 모든 믿는 사람은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주님과 친구로 삼아 그 나라에 기쁘게 들어갈 수 있습니다. 낯을 가릴 필요가 없고 어색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마침내 그 나라에 도착하고 기쁘게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일곱 번째는 예수님의 뿌린 피입니다.
이것은 히브리서 기자가 마지막으로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절정 중의 절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도착한 그곳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피를 뿌리신 곳입니다. 누구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주단을 깔고 꽃길을 만듭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도성으로 초청하시면서 그 길을 자신의 뿌린 피로 만들어놓으셨습니다.
본래 뿌린 피라는 것은 희생 제사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제사장들은 짐승을 잡아 그 피를 제단에 뿌립니다. 1년에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갈 때도 그 피를 뿌립니다. 뿌린 피는 우리의 죄를 속하고 거룩하게 하는 피입니다.
우리가 무슨 자격이 있을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도성에 어떻게 들어갈 수 있을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피로 우리에게 자격을 부여하십니다.
예수님의 피는 역사 속에 실제로 뿌려진 피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실체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변할 수 없는 우리 구원의 실체가 됩니다.
누구나 죄인 됨을 고백하고 그 피를 힘입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흔들리는 유대인 신자들을 향해 히브리서 기자가 제시하는 최종적인 확신의 말씀이 됩니다.

이렇게 히브리서 기자는 7가지의 내용으로 시온산을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마침내 그런 곳에 영적으로 도착했다고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이와 같은 말씀은 마치 시각적인 환상과 같습니다. 예언자들과 선지자들이 보았던 그 환상을 우리가 말씀으로 보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 환상을 보시길 원하십니까? 그러면 이 말씀을 보시면 됩니다. 이것은 더 확실한 환상이자 예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이 환상 같은 귀한 말씀을 당시 로마교회 유대인 신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궁금합니다.
그들은 차가운 현실에서 이 말씀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차디찬 감옥에서 하나님을 찬송한 바울과 실라처럼, 차디찬 감옥에서 믿음의 시를 쓴 본회퍼처럼, 그들은 이 말씀을 잘 받아들였을까요? 그것은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2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10번의 대박해를 견디며 그 생명을 이어갔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말씀을 믿음으로 받은 것입니다. 그들은 이 말씀을 환상으로 본 것입니다.

이 말씀을 믿음으로 받고 믿음으로 보는 사람은 시온산과 하늘의 예루살렘에 이미 도착한 사람입니다.
차가운 현실과 박해의 위기 앞에서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 사람들입니다.

저는 얼마 전 엔도 슈사쿠의 ‘침묵’이라는 소설을 영화화한 ‘사일런스’라는 영화를 다시 한번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일본에서 있었던 기독교 박해를 소재로, 침묵하시는 하나님과 고통받는 신자들을 그린 작품입니다.
일본의 막부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기독교를 박해해야 했습니다. 세상의 악한 정치와 국가는 언제나 박해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혹한 박해를 했습니다. 가장 가혹한 방법은 바닷가 파도치는 바위 앞에 십자가를 세워 거기에 신자들을 매달아 놓는 방법이었습니다. 신자들은 오랜 시간 파도에 시달리다 숨을 거두었습니다.
저는 학생들과 예전 일본 단기선교를 갔을 때, 그런 장소 중 한 곳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흐린 날씨의 한적한 그곳에서 저는 ‘내가 주님을 위해 그들처럼 죽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소설과 그 영화는 인간의 눈으로 현실을 바라본 작품입니다. 거기서 고뇌하는 로드리고 신부는 신자들을 살리기 위해 예수님의 성화를 밟고 거기에 침을 뱉습니다. 거기서 신부는 이와 같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것으로 나옵니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
네, 이와 같은 작가의 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고뇌이고 우리의 이해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믿음을 말씀하고 환상을 말씀합니다.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의 즐거운 축제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님과 그분의 뿌린 영원한 피”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고, 이와 같은 믿음과 환상 속에 차가운 현실과 박해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우리는 엔도 슈사쿠의 침묵이 아니라 본 회퍼의 선한 능력으로라는 고백의 글을 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더 성경적인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그 선한 힘에 고요히 감싸여 놀라운 평화를 누립니다. 어둠의 날들은 무겁게 내 영혼을 짓누르지만 주께서 밝히신 작은 촛불이 타오르고 있습니다. 선한 힘이 우리를 감싸시고 그 고요함이 깊이 번져갈 때, 우리는 저 가슴 벅찬 노래를 듣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의 구원을 이루시고, 우리는 믿음으로 일어날 일을 기대합니다.”
그러므로 본 회퍼가 하나님의 선하신 능력을 느끼고 가슴 벅찬 노래를 들었던 것처럼,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이 환상을 믿음의 눈으로 보아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는 신앙의 박해가 없는 시대에 이 히브리서 말씀을 읽습니다.
그분들은 그분들의 어려운 시대에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에 비해 우리는 얼마나 믿음의 짐이 가벼운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사하며 우리 시대에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비록 어려워도 예수 믿는 것... 힘들다 생각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이런 시대 속에서도 믿음으로 살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능한 사람들입니다.

아무쪼록 차가운 바닥에서 환상을 보고 찬송을 하고 하늘의 노래를 듣고 하나님을 믿었던 믿음의 사람들을 생각하시고,
오늘의 시간 속에 묵묵히 믿음의 길을 걸어가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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