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에서와 같은 자가 없도록

믿음찬교회 0 52 05.21 15:17
에서와 같은 자가 없도록
히 12:14~17
2024.05.19.

지난 주일 말씀은 징계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시고 훈련하신다고 말씀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 안에는 거룩과 의와 평강의 열매가 만들어진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첫 말씀인 14절은 그 열매를 다시 한번 말씀합니다.
여기서 모든 사람이란 일반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의미도 되겠지만, 오늘 말씀의 전체 문맥으로 볼 때 교회 공동체 믿는 형제자매를 가리키는 의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피로 세우신 새로운 사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는 형제자매들과 화평한 공동체를 만들고, 또한 함께 거룩함을 추구하는 성화의 공동체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교회는 밖으로 복음의 공동체가 되고, 안으로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안으로 사랑과 화평과 성화의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사명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화평하지 않고 거룩하지 않으면 큰 문제입니다.
그것을 잃어버리면, 그런 공동체와 신자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합니다. 여기서 주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마지막 그날에 우리가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는 두려운 의미가 됩니다.

그러므로 이 14절 말씀은 우리의 구원과 관련하여,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말씀합니다. 어떤 중요한 사실일까요?
네, 구원은 2개의 차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가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고 믿음의 삶을 사는 것이지만, 또한 우리가 공동체적으로 교회 속에서 예수님을 믿고 자라고 함께 거룩하게 되는 것이란 사실입니다.
아무도 혼자 예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특수한 상황에서는 혼자 예배를 드리고 혼자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겠지만, 예수님은 교회를 세우시고 우리가 교회 안에서 함께 구원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의 길을 잘 가기 위해선, 우리 개인도 예수님을 잘 믿어야 하지만, 교회 공동체도 예수님을 잘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좋은 교회를 다녀야 하고 좋은 교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어떤 교회가 좋은 교회일까요? 네, 서로 사랑하고 화평하고 거룩한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들에핀믿음찬교회를 하나님의 은혜 속에 그런 공동체로 함께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그렇게 인도해 주실 줄 믿습니다.

이제 15절 말씀으로 넘어가고자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5절부터 교회 안에 있는 3종류의 사람을 말씀합니다.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훈련을 통해 자라고 영적인 열매를 맺어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믿음과 소망을 굳게 붙잡고 하나님의 도성에 최종적으로 이르러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실패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도성에 최종적으로 이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실패하는 3종류의 사람에 대해 말씀합니다. 여기서 히브리서 기자는 헬라어로 ‘메 티스’ 즉 ‘아무도 ~하지 않도록 하라’라는 3개의 문장을 말씀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둘째는 쓴 뿌리와 같은 사람입니다.
셋째는 에서와 같이 음행하는 망령된 사람입니다.
이 3종류의 사람들은 각각 다르지만, 그러나 하나의 의미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은 쓴 뿌리가 되고 그런 쓴 뿌리의 대표적인 사람이 에서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네, 우리는 우리 중에 이런 사람이 없도록, 늘 서로 돌아보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네, 헬라어로 이 말씀은 ‘휘스테레인 아포 카리스’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스스로 제한하고 차단한다는 의미입니다. 즉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계속 거부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주십니다. 하나님은 믿는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풍성한 은혜를 공급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항상 문제가 일어나는 곳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은혜가 부족하고 은혜를 받지 못하고 은혜가 상실되는 것은, 나 자신이 그것을 받지 않거나 무관심하거나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가 지금 말씀하는 것은 공동체 가운데 그런 사람이 없도록 늘 함께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함께 그 일을 해야 하겠지만, 먼저 무엇보다 우리 스스로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나는 지금 하나님의 은혜를 잘 받고 있는가? ... 문제가 없는가?...’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 은혜는 밥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에너지입니다. 은혜가 없으면, 우리가 영적으로 얼마나 약해지는지 모릅니다. 때로 우리가 바쁘고 정신이 없고 그럴 사정이 있어서 잠시 은혜에 소홀할 수는 있습니다.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닙니다. 곧 회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완악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점점 거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역사를 불신하고, 성령님을 거부하고... 예수 믿어봐야 무슨 소용이 있나 그런 불신앙적인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스스로 자꾸 거부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되고 맙니다.

그런 불행한 길을 걸었던 대표적인 사람으로 가룟 유다를 들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똑똑하고 신실했기에 제자 중 재정도 맡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공생애 3년 동안 예수님과 동행하며 수많은 일을 보고 수많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안타깝게도 마지막에 예수님을 배반하고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가룟 유다는 왜 그런 사람이 되었을까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이 생각한 메시야가 아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제 곧 잡히시고 죽고 실패하실 것 같았기 때문에, 돈에 대한 계속된 욕심 때문에, 마귀가 그의 마음에 들어갔기 때문에... 여러 이유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예수님의 말씀을 많이 듣고 보고도...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그의 심령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말씀이 들어가야, 은혜를 받고 자라고 열매를 맺을 수 있는데, 말씀의 은혜의 역사가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사도바울과 같이 사역한 데마도 그런 사람입니다. 바울은 디모데후서를 쓰면서 얼마 남지 않은 마지막 시간에 쓸쓸히 이렇게 말했습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일이 우리 안에 일어나지 않도록, 은혜받는 일을 소중히 여겨야 하겠습니다. 말씀에 은혜를 받고, 예배에 은혜를 받고, 기도로 은혜를 받고, 개인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은혜를 받고... 언제나 은혜가 떨어지지 않게 해야 하겠습니다. 

둘째는 쓴 뿌리와 같은 사람입니다.
쓴 뿌리는 신명기 29:18 말씀에 처음 나옵니다. “너희 중에 남자나 여자나 가족이나 지파나 오늘 그 마음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서 그 모든 민족의 신들에게 가서 섬길까 염려하며 독초와 쑥의 뿌리가 너희 중에 생겨서...”
신명기서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하나님의 복의 말씀도 듣지 않고 저주의 말씀도 듣지 않고, 스스로 자신의 복을 빌고 평안을 말하는 이런 쓴 뿌리와 같은 사람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거기서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왜곡하고 공동체를 어지럽히고 무너뜨리는 악한 자입니다. 그래서 쓴 뿌리는 이단자와 배도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당시 로마교회의 상황으로 말하자면, 이런 말로 신자들을 속이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비록 유대교로 돌아가도 우리의 구원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여러분, 복음의 역사에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왜곡하는 쓴 뿌리가 많이 일어납니다. 한국기독교의 역사도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초창기인 1920년대 평양에서 이미 사이비 이단 사상을 가진 사람이 나왔습니다. 김성도라는 권사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자생적 토착 이단인 이 사람은 예수의 직통 계시를 말하고, 음란이 모든 죄의 뿌리라고 말하고, 그러면서도 피갈음이라는 부도덕한 교리를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배워야 하는데, 이 사람은 미신과 샤머니즘과 사이비 사상을 자기 생각 속에 그대로 가지고 들어와 하나님의 말씀과 혼합시켰습니다. 그래서 이단의 대모 격인 이 사람을 통해 김백문, 박태선, 문선명으로 이어지는 이단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런 계보와 함께 수입된 이단까지 합하여, 지금 우리나라에 수많은 이단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만약 여러분들이 진리를 아는 일에 성실하지 않고 치우쳐 올바르지 못한 말씀이나 가르침에 끌리게 되면, 이와 같은 쓴 뿌리의 유혹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이와 같은 교회 밖 이단이야 말할 것이 없지만, 우리가 동일하게 주의할 것은 교회 안의 많은 균형을 잃은 말씀들입니다.
우리나라의 상당수 교회는 보수 기독교입니다. 아마 60~70%가 그럴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보수 기독교는 근본주의적 성향과 선민주의적 성향과 가벼운 복음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을 주로 문자적으로 읽고, 동성애와 낙태는 반대하지만 전쟁은 지지하고, 자본주의와 자유경제와 반공은 중요시하지만 가난한 사람과 약자들은 생각하지 않고, 정치적 영향력에는 큰 관심이 있지만 자연과 환경 보호에는 무관심하고, 전도와 선교에는 열심이지만 사회적 정의와 그리스도인의 삶과 실천에는 약하고, 구원에 대해서는 쉽게 생각하고 이미 구원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한국의 많은 교회들이 이와 같은 색깔과 성향을 가지고 있음을 비판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이런 가운데 최근 일부 보수 기독교 가운데 극단적인 교회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저는 그런 한 교회의 설교를 듣게 되었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자신들의 말씀과 다른 말씀을 전하는 거짓 선지자는 죽여야 한다는 말을 주일 예배에서 버젓이 설교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말이 절대적으로 옳고, 자신들의 말과 다른 자들은 다 거짓 선지자이고, 그들은 다 죽여야 한다...’ 어떻게 그런 설교가 예수님의 교회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지 저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당연한 말씀이지만, 이렇게 쓴 뿌리가 되거나 균형을 잃은 말씀이 되면 구원은 실패하거나 자라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날 많은 교회 밖 이단과 교회 안 균형을 잃은 말씀에 현혹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깨끗한 마음으로 받고, 올바른 의미를 알아가고, 올바른 말씀을 사랑하는 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세 번째는 에서와 같이 음행하는 망령된 사람입니다.
16절 말씀은 음행하는 자와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 이렇게 각각 말씀하는 것 같지만, 원문을 보면 에서와 같이 음행하는 망령된 사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영어 성경도 이렇게 하나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에서의 음행은 우리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창세기 26장 마지막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가 헷 족속의 두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였고, 그래서 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내 리브가를 구하기 위해 어떻게 애를 썼는지 잘 압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과 약속을 생각하여 자기 종을 멀리 보내어, 가나안 땅의 이방인이 아닌, 같은 족속의 사람을 이삭의 아내로 구했습니다. 그래서 이삭은 평소 에서와 야곱에게 하나님의 언약이 무엇인지 그래서 장차 어떻게 아내를 구해야 하는지 늘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에서는 그런 하나님의 약속과 뜻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 이방 여인들을 아내로 맞이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언약을 무시하는 이와 같은 에서의 세속적인 모습을 음행으로 말씀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음행은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따르는 영적인 의미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중요시하고 세상의 기준을 따라가면, 음행하는 사람이 됩니다. 영적으로도 그렇게 되고, 실제적으로도 그렇게 됩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성적인 면에서 세상의 기준은 매우 자유롭습니다. 사랑 없이 사람을 만나고 자유롭게 육체에 이끌리고... 세상은 그것을 인간의 자유와 권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기준을 따라 살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결혼과 가정을 모르는 삶이 됩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지금 많은 성적 부도덕과 불륜이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떠나 세상을 따라 에서와 같이 자유로운 사람이 되면, 우리는 영적 실제적 음행하는 자가 됩니다.

한편, 에서의 망령된 행실은 우리가 잘 아는 내용입니다. 그것은 그 유명한 팥죽 사건입니다. 에서는 하루의 배고픔과 장자의 명분을 바꾸었습니다.
장자의 명분, 즉 장자권은 당시 가장의 권위를 계승하고, 두 배의 상속을 받고, 무엇보다 가족을 대표하여 하나님의 언약의 계승자가 되는 영적인 권리였습니다.
그런데 에서는 그것을 하찮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에서는 망령된 사람입니다.
망령이라는 말은 한자의 의미로 영이 어그러졌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망령되다는 말은 그 사람의 영이 어그러져서, 하나님과 하나님에게 속한 귀하고 거룩한 것을 모독하는 불경건한 모습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에서와 같은 망령된 자가 교회 안에 나타날 수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약 로마교회 유대인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로 값주고 사신 고귀한 구원을 저버리고 일신의 안전을 위해 유대교로 돌아간다면, 그들도 에서와 같이 영적인 생명을 육체의 생명과 바꾸는 망령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같은 히브리서 기자의 말씀을 주의해서 들어야 하겠습니다.
그때와 같이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 망령된 사람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님을 인간 예수로 말하고, 성령님을 모독하고, 교회를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가볍게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망령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구원이 완성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한편, 여기서 에서가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는 말씀은 히브리서 기자가 창세기 말씀을 조금 넘어서서 하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에서의 개인 구원 문제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에서는 팥죽을 먹은 그날 단 한 번의 실수로 영원히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용서받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에서는 나중에 야곱을 만나 화해를 했습니다. 야곱에게 사랑의 손길을 내밀었습니다. 그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공정히 결정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에서가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고 말씀하는 것은 히브리서 기자가 지금 이 편지를 받는 로마교회 유대인 신자들을 향해 하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에서와 같이 망령된 사람이 되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스스로 거부하고 잃어버리면, 그 사람의 심령에는 잘못된 쓴 뿌리가 나와 쓴 뿌리가 되고, 그러면 그 사람은 하나님보다 세상을 따르고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중요시하는 음행의 망령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히브리서만의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이와 같은 동일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무엇일까요?
네, 가라지 비유입니다.
밭의 주인은 좋은 곡식을 뿌렸지만, 어느 날 밤 원수가 와서 몰래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습니다. 그 결과 추수 때에 가라지가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원수가 뿌린 것은 가라지가 아니라, 깜뿌기 혹은 독보리입니다. 깜뿌기는 곡식에 붙어, 그 곡식을 까맣게 변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가라지 비유를 통해서 또 오늘 말씀들을 통해서... 우리 믿음과 구원의 삶에 올바른 경각심을 가지고 깨어있어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돌아가신 고 한경직 목사님의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그분이 영락교회를 은퇴하시고 남한산성 근처 작은 집에 기거하고 계셨습니다. 아프시다는 이야기를 듣고 하루는 교계의 여러 목사님들이 한경직 목사님을 방문했습니다. 목사님 중 한 분이 한경직 목사님께 모처럼 후배 목사들이 찾아왔으니 한 말씀 해주시라고 부탁을 드렸더니 이렇게 말씀했다고 합니다.
“목사님들, 예수 잘 믿으세요”
네, 그렇죠. 다 교계의 중진 목사님들이신데, 다른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새삼 성경을 말하거나 목회를 말하거나 신학을 말할 필요가 없죠. 그래서 그렇게 간단하게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 한경직 목사님의 그 말에 중요한 포인트는 ‘잘 믿는다’는 말인 것 같습니다. ‘그냥 믿는 것’이 아니라, ‘잘 믿어야 한다’는 뜻이죠.
목사나 일반 신자나 예수님을 잘 믿어야 합니다. 잘 믿어야 우리는 에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 넉넉히 하나님의 도성에 이르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우리 성도님들은 믿음과 영적인 것을 소중히 여기시고, 언제나 거룩하시고 신실한 분들이 다 되시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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