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세례요한의 죽음

믿음찬교회 0 10 05.07 12:36
세례요한의 죽음
막 6:14~29
2024.05.03.

마가복음은 세례요한의 죽음을 복음서 중에서 가장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최초의 복음서이기 때문에, 뒤에 나온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보다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세례요한의 죽음이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 세례요한은 이미 죽었습니다. 다만 마가는 어떤 목적을 위해 세례요한의 죽음을 여기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마가가 여기서 세례요한의 죽음을 말씀하는 목적과 이유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앞에는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말씀과 사역이 있고 나사렛 사람들의 거부가 있고 제자 파송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뒤에는 제자 귀환이 있고 오병이어 사건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가복음의 이와 같은 흐름 속에서, 마가가 세례요한의 죽음을 왜 여기서 말씀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가는 하나님 나라의 순조로운 진행과 확산 속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거부와 배척 그리고 시련과 죽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자라고 확산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세상의 거부와 배척도 있고, 시련과 죽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가장 먼저 생각할 교훈은 하나님의 나라에는 시련과 죽음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례요한의 죽음은 세례요한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의 개혁 운동을 잇는 분이시기 때문에, 세례요한의 죽음은 필연적으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예고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그 나라의 삶을 따라 정직하고 개혁적으로 살아갈 때에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몇 년 전 우리나라의 대표 교회 중 하나인 명성교회가 세습을 했습니다. 본래 그 교단엔 이미 세습금지법이 있었지만, 명성교회는 결국 세습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 세습을 반대한 목회자들이 있었는데, 그분들이 그때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분들 중 한 분이 명성교회가 속한 서울동남노회 노회장인 김수원 목사라는 분입니다. 명성교회는 세습을 이미 했지만, 이 노회장과 이분을 지지하는 목회자들 때문에 세습에 대해 노회 인정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러자 명성교회는 노회를 움직여 다른 노회장을 세우고 이분을 노회장에서 내려오게 할 뿐만 아니라, 노회에서조차 면직과 출교를 당하게 하였습니다. 그래도 이분이 노력하고 싸워서 여러 재판 끝에 면직과 출교 조치를 다 취소하고 다시 노회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결국 노회장직을 잃고 말았습니다.
총회 임원회가 그 노회를 사고 노회로 지정하고 직권으로 노회장을 새로 세웠기 때문입니다. 사고 노회라는 것은 그 노회에 문제가 생겨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할 때, 총회가 외부 인사를 파견하여 노회장직을 수행하게 하는 절차입니다. 명성교회는 총회 임원회를 움직여 그렇게 했습니다. 새로 파송된 그 노회장 대행은 당연히 명성교회를 지지하는 목회자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명성교회는 모든 반대를 물리치고 세습을 완성했습니다. 교단의 인정도 다 받고 다 끝났습니다.
결국 이 일에 맞서서 싸운 그 목사님만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리 크지 않은 교회의 담임 목회자인데, 이렇게 우리는 현실 속에서 하나님 나라가 많은 시련과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살고자 하는 우리 개인이나 교회는 이와 같은 어려움을 잘 알고 대처해야 합니다.
우리가 바른말을 하고 정의롭게 행동하고 잘못된 일에 동조하지 않으면 어려움들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비난도 받고 모함도 받고 불이익을 받고 앞길이 막힙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은 정상적인 상황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좁은 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어려움 속에서도 그런 좁은 길을 걸어가는 교회와 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두 번째로 생각할 내용은 세례 요한의 초라한 죽음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광야에서 외치고 우리 주님의 길을 예비한 그 참된 선지자가 얼마나 쓸쓸하고 갑작스런 죽음을 맞았는지... 가슴이 아픕니다.
세례 요한은 당시 유대인의 대중적 지지를 받던 영향력 있는 선지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헤롯 안디바의 개인적인 잘못을 지적한 것은 헤롯과 헤로디아에게 정치적으로 큰 문제였습니다. 특히 헤롯보다 더 정치적인 인물인 헤로디아가 그 문제를 크게 인식했습니다.
그런 위험성을 세례 요한이 전혀 몰랐을 리는 없습니다. 우리는 잘 알 수 없지만, 세례 요한이 헤롯을 향해 그 위험한 말을 했어야 했던 어떤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세례 요한은 죽었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출생에 천사를 보내어 예언하시고, 우리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특별한 사명을 맡기시고, 광야에서 외치며 평생 의로운 삶을 산 세례 요한은 한낱 정치적 농간으로 한낱 독재자의 여흥 거리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가혹한 죽음과 역사 앞에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나라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란 말인가...’
그러나 우리는 이 초라한 세례 요한의 죽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도 그러셨습니다. 예수님도 세례 요한의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죽은 후, 그가 바로 오기로 한 엘리야였다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례 요한의 죽음을 비록 다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하나님의 크신 뜻 안에서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선지자와 의인은 이 세상에서 언제든지 죽을 수 있고 희생당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어쩌면 선지자와 의인의 운명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뜻을 이루어가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례 요한의 죽음을 많이 슬퍼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슬퍼하지 말고, 그 대신에 우리 믿음의 한 부분에 그의 죽음을 간직하는 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날에 주님의 품에 안겨, 우리의 모든 슬픔과 괴로움과 어려움을 말하는 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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