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십자가와 같은 믿음

믿음찬교회 0 9 05.07 12:34
십자가와 같은 믿음
히 11:23~38
2024.04.28.

히브리서 말씀을 예전부터 보면서, 개인적으로 궁금했던 부분이 세 군데 정도 있었습니다. 첫째는 멜기세덱에 대한 말씀이 궁금했고, 둘째는 구약 성막과 언약과 피에 대한 말씀이 궁금했습니다.
대략적인 의미는 알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다른 신약성경 저자들이 말하지 않는 구약 말씀을 가지고 어떻게 그렇게 가장 신약적인 메시지를 하는지... 그 말씀의 진행과 과정이 참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비록 부족하지만, 그 내용들을 살펴본 바 있습니다.

제가 히브리서에서 세 번째로 궁금했던 부분은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믿는 사람 모두를 향한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말씀인지, 아니면 어떤 특정한 믿는 사람을 향한 특별한 말씀인지...
또 이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믿음에 대한 말씀인지, 아니면 우리가 잘 모르는 믿음에 대한 말씀인지...
또 이 말씀은 우리가 기뻐하고 좋아해도 되는 말씀인지, 아니면 우리가 마냥 기뻐하고 좋아할 수 없는 말씀인지...
또 이 말씀은 위대하고 승리하는 믿음에 대한 말씀인지, 아니면 초라하고 눈물 나는 믿음에 대한 말씀인지...
이렇게 히브리서 11장 믿음의 정체가 무엇인지... 개인적으로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11장 말씀을 여러 번 읽어봐도 그것을 잘 알거나 느낄 수 없었습니다. 주석을 읽어도 잘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11장 말씀을 읽을 때마다 마치 어두운 동굴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분명 이 안에 무언가 있는 것 같은데, 잘 안 보이는 것입니다.
저는 가끔씩 유튜브에 올라온 목사님들의 설교를 보는데, 볼 때마다 신기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목사님들마다 어떻게 그렇게 유능하게 설교를 잘하시는지... 성경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역사, 세계 정세, 종말, 기도, 은사, 영적 세계 등 모르는 내용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 분들을 보다가 저를 보면, 참 초라해질 때가 많습니다. 성경조차도 모르는 부분이 항상 많아서, 성경을 읽으면 자꾸 걸리거나 막히곤 합니다.
아무튼 그래서 제가 항상 이 히브리서 11장이 도대체 어떤 믿음을 말씀하는 것인지 늘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여러분들과 함께 매주 이 말씀을 보면서, 특히 최근 몇 주 동안 이 믿음이 어떤 믿음인지 조금 느껴지는 바가 있었습니다.

제 생각에, 이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은 우리가 잘 아는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와 신자들이 기도하고 추구하고 열렬히 소유하기를 바라는 믿음이 아닌 것 같습니다.
대개 우리의 믿음은 승리하는 위대한 믿음입니다.
29절과 30절 말씀과 같이 홍해를 가르고,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는 믿음이죠.
또 예수님께서 귀신을 축출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실 때 보여주신 믿음입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또 예수님께서 겨자씨와 산을 이야기하실 때 말씀하신 믿음입니다.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일이 없으리라”
그래서 우리는 대개 믿음이라고 하면 그렇게 강하고 담대하고 능력 있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만히 29절 말씀을 생각해 보면, 그때 홍해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사실 믿음이 없었습니다. 앞에는 홍해 바다가 있고, 뒤에는 바로의 병거가 닥쳐오고 있고 그들은 갇혔습니다. 그들은 바로의 군사를 보고 ‘이제는 우리가 여기서 다 죽게 되었다’라고 소리 지르며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믿음이 있어야 믿음으로 홍해를 가르지 않겠습니까? 믿음이 없는데 어떻게 믿음으로 홍해를 가르겠습니까? 그래서 출애굽기를 보면, 그때 홍해는 이스라엘이 믿음으로 가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갈라주셨습니다.
그러므로 29절의 믿음은 홍해를 가른 믿음이 아니라, 홍해를 건너간 믿음입니다.
즉 이제 우리는 죄악된 애굽 땅을 버리고, 영적 세례를 받고, 새로운 하나님의 땅으로 건너가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그런 믿음입니다.
30절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수아서 말씀을 읽어보면,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 성이 무너질 것을 모르고 성을 돌았습니다. 여리고 성이 무너진다는 사실은 여호수아만 알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저 하나님의 말씀과 여호수아의 명령에 순종하여 그 성을 돌았습니다. 여호수아는 일곱째 날 일곱째 바퀴를 돈 후에 비로소 백성들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 성을 너희에게 주셨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렇다면 이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네, 이 믿음은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믿음이 아니라, 여리고 성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믿음입니다.
그렇게 보면, 34절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불의 세력을 멸한 믿음... 너무나 강력한 믿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네, 이 사람들은 다니엘서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입니다. 그들은 바벨론 느부갓네살왕의 신상에 절하지 않고 풀무 불에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불의 세력을 멸하고 머리카락 하나 그을린 것 없이 풀무 불에서 나왔습니다. 과연 불의 세력을 멸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은 그 놀라운 믿음 이전에, 먼저 그곳으로 들어간 믿음입니다. 느부갓네살왕은 신상에 절하지 않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있겠느냐”
그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 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러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그래서 이 믿음은 ‘불의 세력을 멸한 믿음’이라고 하기 이전에, ‘불로 들어간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로 들어간 믿음은 죽음을 각오한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렇게 29절, 30절, 34절 말씀을 다시 보면, 이 말씀들은 믿음의 위대한 승리를 말하는 멋진 내용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이해하면, 비로소 히브리서 11장은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믿음의 실체를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마치 큰 산이 짙은 안개 속에 비로소 자신을 보여주는 것과 같습니다.
이 믿음은 승리하는 위대한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과 정반대로, 초라한 십자가와 같은 믿음입니다. 고난을 무릅쓰고 죽음을 무릅쓰고 패배를 무릅쓰고 그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믿는 슬픈 믿음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우리가 잘 아는 믿음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맨 처음 아벨을 말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벨은 믿음으로 의로운 제사를 드리다가 죽은 인물입니다. 아벨은 잘못한 일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으로 살다가 허무하게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이 아벨입니다. 아벨이라는 이름은 ‘헛되다’라는 의미인 헤벨에서 왔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두 번째로 에녹을 말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에녹은 그 시대의 외톨이로서 세상과 다른 의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 외로운 에녹을 하나님께서는 소중히 여기시고 죽음을 보이지 않고 데려가셨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가 에녹을 소개하는 의미는 우리도 에녹과 같이 이 이방의 세상 속에서 주류 속에 믿음의 소수자로 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에녹을 데려가신 것처럼 우리를 그분의 품으로 데려가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다음에 히브리서 기자는 노아와 아브라함과 사라를 말씀했습니다.
이들을 소개한 이유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멋지게 승리한 사람들이 아니라, 믿음으로 보이지 않는 어렵고 힘든 길을 걸어간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기도하면 응답받고 믿으면 다 이루어지는 그런 신앙이라면, 누가 하나님을 못 믿겠습니까? 믿음이 그런 것이라면, 누가 믿음을 싫어하겠습니까?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가 11장에서 말씀하는 믿음은 그런 믿음이 아닙니다.
허무한 의로운 삶을 살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외로운 삶을 살고, 보이지 않는 길을 걸어가는 묵묵한 삶을 살고, 자신을 내려놓고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까지 포기하는 삶을 살고, 이 땅의 성공이 아니라 하늘의 본향을 바라보는 삶을 살고, 이루어지지 않는 소망 속에 먼 미래를 계속 바라보는 삶을 살고... 그런 믿음입니다. 그래서 이 믿음은 초라한 십자가와 같은 눈물 나는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세의 부모는 왕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고 모세를 석 달 동안 숨겼습니다. 부모라면 그런 행동이 어쩌면 당연합니다.
그런데 당시 모세의 부모만큼이나 왕을 두려워하지 않은 믿음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 자손의 출산을 돕던 히브리 산파 십브라와 부아입니다. 그들은 히브리 남자 아기를 죽이라는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렸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그 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부모나 히브리 산파들이나 목숨이 위험했지만,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것은 모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애굽의 신들을 섬기며 애굽인으로 살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히브리인이고 히브리인의 한 사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자 했습니다.
돌아보면, 우리 역사 속에 일제 강점기 시절 기꺼이 일본인이 되고자 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위해 민족을 버리고 기꺼이 황국신민이 되었습니다. 해방 후 미군정이 들어서고 미국이 힘을 가질 때는 기꺼이 미국의 아들과 딸이 된 사람도 있습니다.
6.25전쟁이 벌어지고 공산주의 세상이 되었을 때는 기꺼이 공산주의자가 된 사람도 있습니다.
독재자가 권력을 잡았을 때는 기꺼이 독재자의 편에 선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세를 생각하면서 시대와 권력에 따라 기회주의적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비록 눈물을 흘리더라도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동시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모세를 따라나선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록 그들 앞에 무엇이 있을지 몰랐지만, 믿음으로 자유와 해방의 땅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이런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의 행진에 기생 라합도 참여하였습니다. 기생 라합은 죽음을 마다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고 이스라엘의 일원이 되기로 결단하고 정탐꾼들을 숨겨주었습니다.
다윗과 솔로몬 시대를 지나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역사 속에서도 그런 선지자들이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들은 왕 앞에서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뜻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악한 왕들은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마침내 유다가 망하고 유대인들은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 시절 다니엘을 비롯한 유대인들은 이방의 세계 속에서 하나님을 믿기 위해 수시로 위험과 죽음의 기로에 서야 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믿음을 지켰습니다.
가까스로 포로에서 돌아온 신구약 중간기의 역사 속에서도 35절과 같은 끔찍한 박해가 있었고, 예수님 이후 초대교회의 역사 속에서도 많은 박해와 고초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을 마무리하면서 전체적으로 돌아볼 때, 이 믿음이 무슨 믿음입니까? 히브리서 기자가 지금 로마의 유대인 신자들에게 계속해서 들려주고 있는 이 믿음이 무슨 믿음일까요?
히브리서 11장은 이런 믿음, 저런 믿음... 종류대로 다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한 가지 믿음을 말씀합니다.
네, 바로 십자가와 같은 믿음, 십자가를 닮은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는 눈물이 흐릅니다. 슬프고 가슴이 아픕니다. 마찬가지로 이 믿음도 가슴 아프고 슬픈 믿음입니다. 사는 것이 아니라 죽고, 승리가 아니라 패배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며,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기꺼이 선택하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낯선 믿음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귀한 믿음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네, 우리는 이 귀한 믿음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화려한 멋진 믿음과 대단한 믿음이 각광받고 추앙받고 난무하는 오늘날에, 우리는 이 믿음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믿음에 깨어있는 신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할 수 있다면, 우리 믿음의 분량 안에서 이 믿음을 실천하길 원합니다.
지금은 외견상 평화로운 시대여서 이 눈물의 믿음이 필요한 순간이 그리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오늘날도 매우 어둡고 어려운 시대이기 때문에, 우리가 때로 이런 믿음을 실천해야 할 순간이 오게 됩니다.

저는 이런 믿음을 함석헌 선생이나 장기려 박사와 같은 분들의 삶을 통해 많이 배웠습니다.
일전에 함석헌 선생의 이 일화를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분이 고등학생 시절 3.1만세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차마 학교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학교에 다시 가려면, 3.1운동은 잘못된 운동이었다고 공개적으로 말해야 다시 다닐 수 있었습니다. 함석헌 선생은 똑똑한 학생이었기 때문에, 학교를 졸업하고 유학을 갈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고민해도 그건 차마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마음껏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그렇게 감격스럽고 가슴 시원한 날이 없었는데... 그것을 알고 체험하고서도 버젓이 부인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나 개인 양심으로나 도저히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길을 선택한 대가는 무척 힘들었습니다. 그 귀중한 시기에, 고향으로 돌아와 2년의 시간을 버려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2년 뒤 그를 오산학교로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그분을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교회들이 독재정권과 함께 길을 걸어갈 때, 그 잘못된 일을 지적하는 행동하는 신앙인으로 그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분은 정치나 종교나 사상으로 인해 평생 교회 외부인으로 어려운 삶을 살았지만, ‘내 주님이라야 예수님 밖에 어디 있나요?’라고 말하며 주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장기려 박사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환자들을 사랑한 의사로 평생 검소하게 사셨습니다. 그리고 북에 두고 온 부인을 생각하고 독신으로 사셨습니다. 이런 일들은 그분의 믿음이 십자가와 같은 믿음임을 보여줍니다.
아울러 그분은 노년에 한국교회의 신앙을 고민하면서 성경공부 모임도 만들고 무엇이 올바른 하나님의 뜻인지 알기 위해 많은 신앙적 노력을 하셨습니다. 그분 정도면 어디 가도 존경받고 대접받는 교회의 어른이 될 수 있었지만, 그런 자리로 나아가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런 모습도 십자가와 같은 믿음을 보여줍니다.

어느 목사님이 부목사 시절 한 신도시 대형교회에서 사역하였습니다. 그 교회는 토요일마다 모든 사역자가 전도를 하러, 교회 버스를 타고 큰 아파트단지에 갔다고 합니다. 그분은 그날도 전도를 마치고 교회 버스를 타고 교회로 돌아오는데, 그날따라 그 아파트 주변에 있는 작은 교회들이 눈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우리 큰 교회가 여기까지 와서 전도를 하면, 저 작은 교회에는 누가 갈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생각이 집에 돌아와서도 계속 마음을 괴롭혔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분은 결국 어렵게 들어간 그 교회를 사임했습니다. 학비며 생활비며 당장 힘들었지만, 하나님을 믿고 새로운 사역지를 구하기로 했습니다. 그분은 지금 어느 선교지에서 선교사로 사역하고 있다고 합니다.
전도를 그렇게 하는 것이 잘못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분은 본인의 신앙 양심상 그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사임하였습니다.
사역자들은 웬만하면 큰 교회로 가려고 합니다. 그게 모든 면에서 좋습니다.
그러므로 더 어려운 길을 선택하고 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선택을 한 그분의 믿음도 어쩐지 십자가를 닮은 귀한 믿음이라고 생각됩니다.

대체로 우리에게 믿음은 영적인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통로입니다. 더 많은 것을 얻고 더 높은 곳으로 가는 도구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은 그런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 기꺼이 손해를 보고, 기꺼이 포기하고, 더 어렵고 더 낮은 데로 가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돈을 더 벌고 더 높은 곳으로 가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합니까?
아니라고 생각해도 양심의 눈을 꾹 감고, 편법을 사용하고, 타협하고, 거짓말을 하면서... 사람에게 줄을 대고, 권력에 아부하면서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판사들과 검사들 중에도 이런 믿음을 실천하는 분들이 간혹 있습니다.
정권의 방향과 다르게 무죄를 선고하고 법복을 벗은 판사도 있습니다. 항소를 포기하고 징계를 받는 검사도 있습니다.
권력에 맞추어야 잘 살 수 있죠. 다수의 편에 서야 잘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 사람은 하나님을 더 두려워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믿음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조용히 하나님께 기도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 말씀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바로 뒤에 이어지는 말씀은 자주 외면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우리는 그 말씀을 구원의 의미로 격하시키고 우리 현실에서 잘 적용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느덧 넓은 길을 좋아하고 시온의 대로를 좋아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좋아하는 신앙이 되었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그런 신앙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저는 그런 영광과 축복과 번영과 능력에 치우친 신앙이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십자가와 같은 믿음, 십자가를 닮은 믿음, 조금 외롭고 슬픈 믿음... 우리의 믿음이 그런 믿음이 되면, 그날에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눈물을 닦아주실 것입니다.

아무쪼록 욕심과 기대와 욕망으로 어지러운 믿음이 아니라, 참 신앙이 되어 늘 주님을 만나는 우리 교회와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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