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하나님의 도성과 하늘의 본향

믿음찬교회 0 15 04.08 12:05
하나님의 도성과 본향
히 11:8~10, 13~16
2024.04.07.

우리는 지난번 노아와 아브라함과 사라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하나님을 믿고 믿음의 길을 걸었습니다. 리브가도 그렇고, 룻도 그렇습니다. 보이는 길만 걷는 사람은 하나님을 잘 따라가지 못합니다. 자기가 아는 삶 속에 그대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적인 삶이나 실제 삶이나 하나님을 믿고 믿음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렇게 용기있게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제 오늘 말씀은 아브라함에게 집중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통해 믿음에 대해 말씀할 내용이 많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 전체적으로 3가지를 말씀합니다.
첫째,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다.
둘째,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이방 땅의 장막에 거하며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보았다.
셋째,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자신의 외아들인 이삭을 드렸다.
오늘 말씀은 이와 같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두 번째 내용, 즉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들이 가나안 땅에 거하며, 하나님의 도성과 하늘의 본향을 바라보았다는 사실을 말씀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하나님의 도성과 하늘의 본향을 바라본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9절 말씀은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이주한 모습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네, 이 말씀은 그가 약속의 땅에 도착하여 살았지만 한평생 이방인으로 살았다는 말씀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 원주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갈대아 우르에서 큰 강 유브라데를 건너 하란을 거쳐 가나안 땅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사람들은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을 히브리인이라고 불렀습니다. 히브리라는 말은 강을 건너왔다는 의미로, 그들을 낮추어 부르는 말입니다.
가나안 땅에 도착한 아브라함은 세겜을 지나 벧엘을 지나 점점 남방으로 내려가, 마침내 헤브론 땅 마므레 상수리 숲 근처에 거주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기근을 피해 잠시 애굽에 갔다 오기도 했지만, 주로 거기서 평생 장막에서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평생 장막에서 살았지만, 본래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땅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땅도 주시고 자손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일전에 살펴본 바와 같이, 그와 같은 하나님의 약속은 이상하고 특이한 약속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같은 약속을 반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고비마다 그 약속으로 그의 인생을 이끌어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은 약속을 하고 때가 되면 약속이 이루어지는 단순한 1차원적인 약속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순종과 실패 속에 자라고 성장하는 고차원적인 약속이었습니다.
드디어 아브라함은 100세에 이삭을 낳았습니다. 이삭은 하늘의 별과 같은 아브라함의 수많은 후손의 첫 열매입니다. 그런데 이삭을 낳고 끝난 줄 알았는데, 끝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한 번 더 시험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러자 그때야 비로소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최종적인 맹세로 보증하셨습니다.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약속은 마침내 성취되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성취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삭을 통해 아브라함의 자손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시고, 그들을 통해 천하 만민이 복을 받는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빠진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 가운데 자손을 주신다는 약속은 이삭을 통해 성취되었지만, 땅을 주신다는 약속은 아직 아무것도 성취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사라가 127세를 살고 죽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나이 차이가 10살이니까, 그때 아브라함은 137세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를 위해 매장지를 구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그 땅 주민인 헷 족속을 찾아가 헤브론 근처 막벨라 밭과 거기 속한 굴을 샀습니다. 그 사람들이 그냥 주겠다고 했지만, 아브라함은 정당한 값을 주고 그 땅을 샀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을 소유한 것은 그것이 유일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고, 자기가 돈을 주고 샀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창세기 23장 한 장 전체에 걸쳐 중요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거기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섭리와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아브라함이 그 땅을 자기 힘으로 샀고 또 그것은 가나안 땅 가운데 아주 조그마한 땅이지만,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섭리와 뜻 가운데 그것은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상징적인 성취입니다. 그로부터 약 400년 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은 그 땅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생애 가운데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비록 상징적이긴 하지만, 그분의 섭리와 뜻 가운데 성취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 우리가 창세기 23장 말씀을 해석하는 내용이고, 어쨌든 아브라함은 막벨라 밭과 거기 속한 굴 외에는 가나안 땅을 소유하지 못하고, 평생 장막에서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이 자라고 사라가 죽는 그 시간 동안 아직 이루어지지 못한 하나님의 약속인 땅에 대해 많이 고민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땅에 대해 분명히 주신다고 여러 차례 약속하셨기 때문에, 그런데 ‘왜 아직 안 주실까? 언제 주실까?...’ 늘 그런 마음을 가슴 한편에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믿음은 이삭까지 바치는 믿음이었기에,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땅에 대한 아브라함의 고민과 믿음... 한편으론 고민하면서 한편으론 믿으면서... 그렇게 그런 아브라함의 시간은 얼마나 흘렀을까요?
이삭을 바침으로 씨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고 완성된 것이 대략 그의 나이 115세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때부터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본 아브라함의 시간은 115세에서 175세까지 약 60년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나님을 만나 175세에 죽었습니다. 그 100년 동안에 40년은 씨에 대한 약속을 바라보며 살았고, 60년은 땅에 대한 약속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여전히 바라보는 노년의 아브라함의 모습이 창세기 23장과 24장에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은 창 23장에서 사라의 매장지인 막벨라 밭과 굴을 살 때, 헷 족속에게 이렇게 자기를 소개합니다.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니...” 즉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로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땅에 대한 아브라함의 간절한 마음과 고민을 엿볼 수 있는 말씀입니다.
또 아브라함은 창 24장에서 이삭의 아내를 구하러 자기 종을 보낼 때 이렇게 말합니다.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고향 땅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가 그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실지라...” 이렇게 아브라함은 그때에도 여전히 하나님께서 이 땅을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땅에 대한 아브라함의 믿음과 고민이 점점 깊어지던 어느 날 어느 시간에, 비록 우리가 그것을 창세기 말씀에서 직접 발견할 순 없지만, 아브라함은 영적인 하나님의 도성과 하늘의 본향을 바라보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이 가나안 땅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도성과 하늘의 본향을 바라보는 굉장히 영적인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10절 말씀이 바로 그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그래서 제가 지금까지 아브라함의 노년에 대해 설명한 내용은 바로 이 10절 말씀을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오늘 본문 10절 말씀을 기록하였습니다. 우리는 히브리서 기자가 어떻게 창세기에 나오지 않는 이 10절 말씀을 기록할 수 있었는지 그 배경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창세기 말씀을 읽으며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는 노년의 아브라함을 묵상하고 발견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렇게 성경을 깊게 읽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가 직접적으로 말씀하지 않지만, 그 말씀의 행간의 의미를 성령의 감동 가운데 읽으며, 말년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도성과 하늘의 본향을 바라보는 영적인 사람이 되었음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히브리서 기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말년에 땅에 대한 미완의 약속을 통해 아브라함을 그렇게 영적으로 인도하셨음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에서 늘 장막에 거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고, 그 결과 가나안 땅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의 도성과 하늘의 본향으로 나아간 영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와 같은 오늘 말씀을 통해 어떤 믿음의 교훈을 받아야 할까요?
네, 간단합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서 살며 하나님과 동행하고 믿음이 깊어지고... 그렇게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도성과 하늘의 본향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육신의 장막을 벗고 이 세상의 장막을 정리하고, 하나님의 도성과 하늘의 본향으로 갈 준비를 해야 합니다. 우리의 시선이 그렇게 하늘을 올려다 보게 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대개 우리는 아브라함의 생애를 성경에서 볼 때, 창세기 22장 즉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내용까지 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침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대체로 거기서 끝납니다.
그 후에 아브라함이 어떻게 되었는지 관심도 없고 잘 모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그때까지 하나님과 동행한 시간은 40년밖에 안 됩니다. 아직 60년이 더 남았습니다. 그 60년 동안에 아브라함은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살았고, 영적으로 더 깊어졌습니다. 아브라함의 영안은 열리고 하나님의 도성과 하늘의 본향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영적인 모습은 야곱에게서도 발견됩니다. 야곱은 젊은 시절 매우 영리하고 형의 축복을 가로채고 삼촌 라반의 집에서 더부살이를 하며 점박이와 얼룩이 양과 염소를 만들어내고 그 누구보다 치열한 삶을 살았지만, 노년의 야곱은 어느덧 변화된 영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하나의 예는 야곱의 임종 직전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할 때 발견됩니다. 야곱은 겨우 침상에서 일어나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축복했습니다. 요셉은 눈이 보이지 않은 아버지 야곱의 오른손 쪽에 장자 므낫세를, 왼손 쪽에 차남 에브라임을 나아가게 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비록 눈이 보이지 않았지만, 자신의 팔을 바꾸어 오른손을 에브라임에, 왼손을 므낫세에 얹어 축복했습니다. 이를 본 요셉이 당황하여 야곱에게 말하자, 야곱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의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의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이렇게 말년의 야곱은 젊은 시절의 야곱과는 완전히 다른 영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나 야곱이나... 대표적인 이 두 사람의 신앙과 삶을 볼 때, 우리는 노년이 되고 말년에 이를수록, 우리의 믿음은 계속 나아가서 마침내 영안이 열리고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만나고 하나님의 도성과 본향을 뚜렷이 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성경이 말씀하는... 우리 믿는 자들의 삶과 신앙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런 아브라함의 노년과 야곱의 노년을 우리 교회와 신자들은 잘 주목하지 않습니다. 많은 설교들도 다 젊은 시절의 아브라함과 젊은 시절의 야곱만 말합니다. 그래서 노년에 그들이 변화되어 참으로 영적인 모습이 된 것을 놓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단순히 창세기 말씀을 잘 모르기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보다 깊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대체로 지금 우리가 삶과 신앙의 완성에 큰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지금 교회가 주로 말하는 내용과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믿으면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처음부터 그런 믿음을 가진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좋은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완성은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구원의 완성은 지금 많은 교회와 신자들에게 생소한 말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 교회와 신자들 가운데서 그렇게 믿음의 완성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끝까지 믿음의 길을 걸어 믿음이 점점 완성되어 하나님의 도성과 본향을 영적으로 바라보는 분들이 생각보다 적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더 욕심이 많아집니다. 말년이 될수록 더 아무것도 내려놓지 못합니다. 세상 현실과 돈과 지위와 권력과 욕심에 여전히 민감하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세상의 모습입니다.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끝까지 이 땅만 바라보고, 끝까지 욕심을 부리고, 끝까지 돈과 권력을 붙잡고, 마지막까지 용서하지 못하고, 이 땅에 매달립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은 그런 모습이 되어선 안 됩니다.
우리 믿음은 자라고 성장하고 마침내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우리의 본향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나라가 영적으로 보이고 그 도성이 보인다면, 우리는 그곳을 향해 갈 준비를 하겠죠. 안 보이니까 갈 준비를 못합니다.
우리가 젊은 시절에는 꿈과 야망이 있고 치기 어린 삶을 살고 실수도 하고 좌충우돌하지만, 나이가 들면 하나님을 더 생각하고 하늘의 본향을 더 생각해야 합니다.

저의 어머니는 노년에 몸이 불편하셨습니다. 돌아가시기 1년 전에 뇌출혈이 와서, 그때부터 거동이 불편해지셨습니다. 주로 집에 계셨고 주일에 저와 함께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고 친구분들을 만나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이셨습니다. 제가 회사에 출근하면, 집 근처를 산책하고 하루 종일 집에 계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제가 퇴근하고 집에 오니, 작은 상이 늘 펼쳐져 있고 그 위에 성경책이 놓여있었습니다. 뭐 하셨냐고 물어보니, 예배드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러려니 했습니다. 원래 무심한 아들이었고, 저도 그때 저 나름대로 회사 생활과 사회 생활을 하느라 힘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어머니가 저를 기다리시면서, 하루 종일 그렇게 시간을 보낸 것이 마음 한켠에 남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제가 사드린 어머니의 성경책을 펼쳐보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까지 이사야서 말씀을 보셨던 것 같습니다. 이사야서 26장의 한 구절에 밑줄을 그어놓으셨습니다.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어놓으리로다”
제가 생각하기에, 하나님께서 그런 귀한 말씀으로 어머니의 마지막 시간을 아름답게 인도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머니의 갑작스런 죽음에 한편으론 마음이 힘들었지만, 하나님의 그 사랑의 손길에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여러분, 생각보다 죽음은 갑자기 우리를 찾아옵니다. 그날은 도적같이 우리에게 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그냥 가겠다 생각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어떻게든 가겠지... 그런 생각도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잘 준비해서, 점점 하나님의 나라가 보이고, 점점 그곳이 나의 진짜 본향임이 느껴지고, 점점 하나님의 사랑과 함께하심이 느껴지고...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께로 가야 합니다.
동물의 세계에서 짐승들은 갑자기 죽음이 찾아옵니다. 지나가다가 잡아먹히고, 둥지에 있다가 잡아먹히고... 그러나 우리는 그런 준비되지 못한 죽음을 맞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영안은 열리고 점점 그곳이 뚜렷이 보여야 합니다.
사도바울의 마지막 편지에도 그런 귀한 말씀이 있습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도성과 하늘의 본향을 보았다면, 사도 바울은 면류관을 보았습니다. 주님께서 의로운 재판장이 되셔서, 자신에게 의의 면류관을 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보고 로마에서 마침내 주님의 품에 안길 수 있었습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께로 가는 마지막 시간 동안에 무엇을 보시기를 원하십니까? 사랑의 하나님과 우리 주님은 여러분에게 가장 알맞은 무엇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지상에서 천국으로 하나님의 도성과 하늘의 본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런 소망이 없지만, 우리는 그런 소망 속에 하나님의 나라로 올라가는 사람들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그런 믿음의 완성을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 속에 누리시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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