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예수님의 부활과 연합한 자

믿음찬교회 0 16 04.02 15:38
예수님의 부활과 연합한 자
롬 6:4~11
2024.03.31.

성경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가장 많이 언급하고 말한 사람은 사도 바울입니다.
복음서들이 대개 4~5번 정도 예수님의 부활을 말하는 데 비해, 사도 바울은 자신의 편지에서 8번이나 예수님의 부활을 말하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찾아보면 그보다 훨씬 더 많이 말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가장 많이 말한 사람도 사도 바울입니다. 바울은 정통 유대인과 이방인 앞에서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예수님과 그분의 부활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 가운데 예수님의 부활을 가장 많이 열정적으로 말한 사도로 사도 바울을 꼽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왜 이렇게 예수님의 부활을 가장 많이 말하는 사람이 되었을까요? 네, 그것은 사도 바울이 처음부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그가 처음 예수님을 만난 것은 예수 믿는 자들을 잡으러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이었습니다.
그때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 만나게 되는데, 그 사건이 얼마나 놀랍고 생생한 사건이었는지... 바울은 한평생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를 시작하면서도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그리고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 신앙의 아주 어려운 문제를 설명하면서, 예수님의 부활을 언급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이 우리 신앙의 어려운 현재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된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성찬식을 가졌습니다. 성찬식은 과거 현재 미래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부활도 과거 현재 미래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과거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고, 현재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능력이 되고, 미래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은 약속과 기다림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죄를 이기고 극복해야 하는 우리 신앙의 현재 문제를 언급하면서 그 문제를 지금도 역사하시는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으로 이길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가장 잘 아는 사도 바울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의 현재적 의미를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무엇인가... 그것은 오늘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사실입니다. 또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부활주일을 맞아 이와 같은 예수님의 부활의 현재적 의미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2,000년 전에 있었던 예수님의 부활이 단순한 역사적 사실에 불과하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한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의 과거 사건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역사적 지식으로 배우고 기억하고 기념일을 지킬 수도 있겠지만, 지금 우리에게 큰 의미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살아계시고 오늘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은 오늘 우리에게 임하는 능력이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지금 로마서를 쓰면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그 능력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로마서를 쓰면서, 복음을 설명하고 구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 믿는 자들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았지만, 우리는 아직 최종 구원에 이르지 못한 상태에서 믿음의 현재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믿음의 현재와 현실에는 어려운 신앙 문제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죄가 여전히 역사한다는 문제입니다.
죄는 결코 가볍게 생각할 수 없는 신앙 문제입니다. 우리가 구원파의 가르침과 교리를 비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구원파는 죄사함의 영적 비밀을 알면 죄 문제가 다 해결된다고 말하며, 죄를 가볍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면 넘어집니다. 성경이 그것을 말씀하고 교회 역사가 그것을 말씀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파의 가르침을 따라가선 안 됩니다.
구원파는 우리 믿는 자들의 믿음의 현실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믿는 자들의 믿음의 현실에는 3가지 힘이 역사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3가지 힘을 로마서 5장에서 8장까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법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항상 우리 곁에 있습니다. 그것은 구약 율법으로 나타나고 예수님의 말씀으로 나타나고 우리 양심의 법으로도 나타나고, 항상 우리 삶에 역사하는 영적인 기준이자 힘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잘못하고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면, 성경 말씀이 우리를 정죄하고 성령님이 그렇게 하시고 우리 양심과 도덕도 그렇게 합니다.
문화는 다를 수 있고 관습은 다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된 것이 저기서는 문제가 되지 않고, 그때는 문제가 된 것이 지금은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하나님의 법과 기준을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둘째는 죄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았지만 여전히 죄가 역사하는 현실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과 성화는 이루어져 가고 있지만 우리의 육신과 자아는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죄를 짓습니다. 거짓말도 하고 나쁜 생각도 합니다. 성화를 부정해서도 안 되지만, 완전한 성화를 추구해서도 안 됩니다. 수십 년 수도원과 동굴에서 기도해도 우리 안에는 여전히 죄에 대한 마음이 있습니다.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죄는 우리 믿는 자에게 여전히 역사하는 현실입니다.
셋째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법이 엄연히 살아있고 죄가 여전히 역사하는 현실 가운데, 그러나 우리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합니다.
하나님은 본래 은혜로우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에덴에서 쫓겨나는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하나님이십니다. 율법도 은혜의 율법이고, 언약도 은혜의 언약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님을 통해 절정에 이르고 성취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만끽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성령님을 통해, 말씀을 통해, 교회를 통해 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의 현실은 하나님의 법과 죄와 은혜가 공존하는 현실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법과 죄만 있는 현실이지만, 우리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법과 죄와 은혜가 있는 한 차원 높은 현실을 삽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신앙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죄를 극복하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서 죄와 싸우며 하나님의 법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것을 잘해 낼 수 있을까요? 우리는 죄와 싸울 수 있을까요? 우리는 우리 육신의 본성인 죄와 싸워 궁극적으로 승리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말씀을 진행하던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 이르면 깊은 절망에 빠집니다.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 도다...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러나 사도 바울의 그런 깊은 영적인 절망은 로마서 8장에서 극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여기서 말씀하는 그리스도 예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사도 바울은 또 말씀합니다.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서 말씀하는 영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성령님입니다. 그래서 부활의 능력 되신 성령님이 우리 안에 거하면, 우리는 육신을 이기고 몸의 행실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감격스러운 로마서 8장 말씀은 오늘 본문인 6장 말씀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를 해방하고,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며 역사하실 수 있는 이유는 오늘 본문과 같이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과 연합한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믿음으로 그분과 함께 죽고 그분과 함께 살아났습니다. 우리는 그런 믿음의 의식인 세례를 받았고, 그래서 그분의 죽음은 나의 죽음이 되고 그분의 부활은 나의 부활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죄된 인간 본질을 영적으로 변화시킵니다. 물론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사실입니다. 예수 믿고 세례 받아도 겉으로는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주어진 그 영적인 사실과 은혜를 우리가 믿고 붙들면, 그것은 마침내 우리 삶 속에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 열매가 무엇입니까? 네, 우리 신앙의 당면 문제인 죄를 극복하며 살아갈 수 있는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그 부활의 능력으로 인해, 우리는 영적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변화된 사실을 비록 보이지 않아도 믿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여기서 ‘여길지어다’라는 말씀이 바로 그렇게 믿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믿음 속에 죄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늘 싸워야 합니다. 그런 우리의 영적인 싸움 속에 우리는 죄를 이기는 승리를 얻게 됩니다.
네, 이상의 내용이 오늘 본문에 대한 설명입니다.

다시 짧게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음으로, 그분의 부활과 연합한 자가 됩니다. 우리는 변화되어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살아있는 자가 됩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한 결과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신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우리의 영적인 변화와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님의 역사 속에 죄를 극복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죄를 극복하는 믿음의 삶... 네, 그것이 우리가 구원의 길을 걸어가는 모습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구원의 표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부활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와 능력이 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를 새로운 영적인 사람으로 만들고, 그 은혜와 능력은 죄를 이기고 믿음으로 살게 하는 능력이 됩니다.

우리는 본 회퍼의 다음과 같은 시를 잘 압니다. 일전에 우리가 ccm 찬양으로도 불렀던 노래입니다.
그 선한 힘에 고요히 감싸여, 그 놀라운 평화를 누리며, 나 그대들과 함께 걸어가네
나 그대들과 한 해를 여네
지나간 허물 어둠의 날들이, 무겁게 내 영혼 짓눌러도, 오 주여 우릴 외면치 마시고
약속의 구원을 이루소서...
이 고요함이 깊이 번져갈 때, 저 가슴 벅찬 노래 들리네, 다시 하나가 되게 이끄소서, 당신의 빛이 빛나는 이 밤...
그 선한 힘이 우릴 감싸시니, 믿음으로 일어날 일 기대하네, 주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셔, 하루 또 하루가 새로워
여기서 이 시가 찬양하는 그 선한 힘의 정체가 무엇일까요?
차가운 감옥 안에서도 놀라운 평화를 누리게 하는 그 선한 힘, 무겁게 내 영혼을 짓누르는 허물과 어둠을 이기게 하는 그 선한 힘, 초라하고 불안한 나를 고요히 감싸 주시는 그 선한 힘, 믿음으로 일어날 일을 가슴 벅차게 기대하게 하는 그 선한 힘...
그 선한 능력은 전지전능한 어떤 신으로부터 오는 거대한 능력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능력입니다.
우리의 죄와 어둠을 물리치시고, 우리의 불안과 두려움을 거두시고, 우리의 후회와 한숨을 만지시고, 초라한 우리의 몸과 마음을 일으시키는 그 능력은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오는 살아있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그 부활의 능력은 단순한 힘이 아닙니다. 그 능력은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거쳤기에 우리의 죄와 허물과 연약함을 아시는 능력입니다.
오늘 나의 문제와 좌절과 절망도 아시고 일으켜 주시는 인격적인 능력입니다.
그것은 오늘의 우리의 힘이 되고 내일의 우리의 소망이 됩니다. 오늘의 우리 영육간의 문제를 해결하고, 내일의 우리의 영원한 약속이 됩니다. 우리는 그날에 생명의 부활로, 영원한 집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부활을 가장 많이 말한 사도가 된 것은 지극히 합당합니다. 단순히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 만났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고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빌립보서에서 자신의 분투하는 삶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사도 바울은 이렇게 자신의 삶과 사역에서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두 개의 큰 능력으로 간직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님들도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을 사도 바울처럼 아시고 체험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이제 중요한 것은 이 능력을 우리 삶에 가져오는 일입니다. 이 능력을 우리의 죄와 어둠과 좌절과 문제와 연약함에 사용하는 일입니다.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은 나의 어디에 필요한가... 우리 가정의 어디에 필요한가... 내 문제의 어디에 필요한가...
그런데 그 능력을 사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머리가 좋은 것이 아닙니다. 머리가 좋아서 그 능력을 어디에 사용해야 할지 잘 찾아내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과 연합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면, 그 능력은 자연스럽게 나타납니다.
본 회퍼가 차가운 절망적인 감옥에서 그 능력을 내가 사용해야지 해서 그 능력이 나온 게 아닙니다. 그가 예수님 안에 연합하여 있었기 때문에, 부활하신 주님의 선한 능력이 그에게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주님과 언제나 연합한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모든 상황 속에서 그 능력은 아름답게 흘러나오게 될 것입니다.

권정생 선생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강아지 똥, 몽실 언니... 그런 작품을 남긴 동화작가이자 소설가이시죠. 평생 지병을 가지고 살았고 가난했고 독신이었고 굉장히 불우했습니다. 비빌 언덕 하나, 의지할 지팡이 하나 없는 절망의 종합선물세트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차가운 예배당 바닥에서 기도하며 하나님을 원망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자기 삶을 아름답게 살아냈습니다. 자기의 어려운 삶을 재료로 따뜻한 희망의 작품을 많이 썼습니다. 저도 어릴 적에 몽실 언니를 tv 드라마로 보면서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가난과 질병과 불우한 환경과 절망과 좌절이 그의 삶에 가득했지만, 그는 그것을 가지고 희망적인 작품을 만들고 아름다운 삶을 만들었습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나는 것이 정상이죠. 그러나 그는 좌절을 삼켜 희망을 뱉어내고, 차가운 것을 삼켜 따뜻한 것을 뱉어냈습니다. 말년엔 통장에 돈도 제법 있었지만, 평생 산 허름한 좁은 집에 그대로 살며 가졌던 모든 것을 좋은 일에 남겼습니다.
그런 분이었기에, 그분이 평생 신자로 살면서 하나님을 찾고 신앙과 교회에 대해서도 귀한 글들을 많이 남겼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삶을 보면, 그분은 정말 예수님의 부활과 연합한 자로 살았습니다. 그것이 아니고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의 자리에서 우리의 능력 안에서 예수님의 부활과 연합한 자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절망이 굳어지기 전에, 어둠이 짙어지기 전에, 죄가 죄를 낳기 전에, 그 능력은 우리를 일으키실 줄 믿습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오늘 부활절을 맞아,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의 현재적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그 능력은 오늘 우리를 일으키시는 살아있는 능력입니다.
아무쪼록 예수님의 부활과 연합한 자가 되심으로, 언제나 그 능력 가운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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