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예수님이 죽임당하신 실제 이유

믿음찬교회 0 21 03.26 13:31
예수님이 죽임당하신 실제 이유
요 19:12~16
2024.03.24.

오늘은 고난주간을 앞두고, 히브리서 말씀을 잠시 내려놓고,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에 대해 돌아보는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기독교에는 사순절이라고 하는 오랜 전통이 있습니다. 사순절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앞두고 40일 전부터 지키는 절기입니다. 이 기간에 신자들은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하고, 참회의 시간을 갖고, 금식을 하고, 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4세기 니케아 회의에서 정한 전통인데, 40일로 정한 이유는 그 숫자가 성경 안에서 의미있는 숫자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기간을 꼭 40일로 지켜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이전까지 교회는 자유롭게 며칠간 금식을 하며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절을 준비했습니다. 신약성경에도 이와 관련 특별한 가르침이나 기록은 따로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별다른 말씀이 없는 상태에서 40일이 조금 길다면, 내일부터 시작하는 한 주간의 고난주간을 그렇게 경건하게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번 고난주간과 부활절을 맞아, 각자 이번 한 주를 경건하게 보내고, 금요일에 함께 모여 기도하고, 그리고 주일에 부활절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우리에게 큰 은혜와 유익이 될 줄 믿습니다.

고난주간에 대체로 우리가 주로 묵상하고 생각하는 주제는 예수님의 죽음과 우리의 죄입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내용은 우리가 잘 아는 내용이기 때문에, 오늘은 우리가 조금 새로운 내용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살펴볼 새로운 내용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명절 준비기간, 즉 십자가에 달리시기 일주일 전 예루살렘에 도착하셨는데, 그때부터 십자가에 달리시는 금요일까지 많은 일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때의 말씀과 사건들을 살펴보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향하여 어떤 심정을 가지고 어떻게 준비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시간은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 예루살렘 사역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크게 3가지 사역을 하셔야 했습니다.
첫째는 성전의 종말과 성전 당국의 죄와 잘못을 공개적으로 선포하셔야 했습니다.
둘째는 새로운 영적 공동체인 교회를 시작하셔야 했습니다.
셋째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 바쁘셨던 마지막 일주일간의 사역을 살펴보면서, 그렇게 폭넓게 고난주간을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마지막 시간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십자가로 나아가셨는지 우리가 잘 이해할수록,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에 깊이 동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그 예수님의 마지막 시간 속에 있었던 한 사건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바로 예수님의 재판입니다.
예수님께서 법정의 재판을 통해 어떤 죄목으로 실제 기소되어 십자가형을 받으셨는지... 그 내용을 알아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이 내용을 통해 예수님의 죽으심의 현실적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예수님의 재판은 두 번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유대 산헤드린 공회에서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또 예수님은 어떤 죄를 범한 일도 없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정죄하려는 성전 당국과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그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이전부터 그들은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안식일을 어겼다, 율법을 어겼다, 성전을 모독했다, 귀신의 왕 바알세불이 들렸다... 온갖 올가미와 혐의를 씌우려고 했지만, 다 실패했습니다. 예수님이 성경과 율법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시고, 그들의 온갖 혐의와 정죄를 다 물리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날 산헤드린 재판에서도 예수님에 대한 정죄와 기소가 어려웠습니다. 예수님은 재판 중에 아무 말씀 없이 그들의 정죄와 기소를 지켜보셨습니다. 최종적으로 그들이 준비한 것은 성전 모독죄였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증인들의 말이 서로 맞지 않아서 무산되었습니다.
그러자 결국 대제사장이 나서서 예수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네가 찬송 받으실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네, 드디어 예수님께서 대답할 가치가 있는 발언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이 말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그니라, 네가 말하였느니라, 네가 그 사람이라고 말하였느니라...” 이렇게 복음서마다 조금씩 다릅니다만, 어쨌든 그 내용을 시인하시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죄가 최종적으로 확정되었습니다. 대제사장은 자신의 옷을 찢었고, 공회원들은 돌아가며 예수님에게 침을 뱉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라고 말했다는 신성 모독죄로 사형이 선고되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당시 성전 당국이 죄수를 사형할 권한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죄수를 사형할 권한은 빌라도 총독에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처형하려면 빌라도에게 가야 하는데, 문제는 빌라도에게 예수의 혐의와 죄목을 뭐라고 할 거냐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신성 모독죄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구체적인 혐의와 죄목을 3가지로 준비했습니다. 이 내용은 누가복음이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고발하여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
백성을 미혹하고 선동했다, 세금을 금했다, 자칭 왕 그리스도라 했다... 이렇게 3가지로 예수님을 고발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도 허술한 사람이 아니기에, 이 고발 내용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라고 해봐야 지금 몇 명 되지도 않고,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했다는 것도 거짓 혐의이고, 문제가 될 만한 것은 자칭 왕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그렇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말씀을 다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이 사람이 로마와 로마 황제를 위협하는 정치적인 행위를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았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이 내키지 않는 재판을 피하기 위해 개인적으로 노력했습니다.
예수님의 출신 지역이 갈릴리임을 알고 마침 예루살렘에 와 있던 헤롯에게로 보내기도 하고, 예수를 때려서 놓겠다고 제안하기도 하고, 명절에 죄수 한 사람을 풀어주는 관행을 이용하여 예수를 풀어주려고 하기도 하고... 이렇게 빌라도는 계속 재판을 지연하였습니다.
그러자 이를 지켜보던 성전 당국과 유대지도자들이 마지막 결정적인 말로 빌라도를 압박했습니다.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네, 예수의 죄는 반역죄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빌라도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반역죄에 대해 관용을 베푼다면 자신도 위험해지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이제 성전 당국의 사주를 받은 유대 군중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를 질렀고, 소요 사태가 일어날 조짐마저 보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빌라도는 어쩔 수 없이 선고를 내려야 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을 위해 한 가지 일을 행합니다. 물을 가져와서 자신의 손을 씻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의 죽음에 대하여 자신은 책임이 없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러자 거기 있던 유대 군중이 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이렇게 해서 재판은 끝나고, 군인들은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골고다 언덕으로 데리고 올라갔습니다.
그러므로 빌라도 법정에서 예수님의 공식적인 죄목은 반역죄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국가전복, 반란, 내란 선동... 그런 정치적인 죄목이 됩니다.

그런데 산헤드린 법정에서의 신성 모독죄나 빌라도 법정에서의 반역죄나... 그것은 예수님의 진짜 혐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혐의이지, 진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네, 예수님을 진짜 죽인 사람들은 유대 성전 당국과 유대 종교지도자들이고, 그들이 예수님을 죽인 진짜 이유는 예수님이 그들의 잘못을 비판하고 그들의 권력을 흔들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권력 기반인 율법과 성전을 무너뜨리는 새로운 하나님의 뜻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지 않으면 유대 백성이 깨어나고 그들의 잘못과 거짓이 드러나고 그들은 모든 힘과 권력을 잃어버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돌아가셨지만, 실제 역사 속에서 그 과정은 이와 같은 이유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은 당대의 정치 종교 사회를 하나님의 뜻으로 개혁하고자 하셨던 개혁가셨기 때문에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개혁을 하지 않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뜻만을 말씀하실 순 없었을까요?
네, 그럴 순 없었습니다. 유대 백성이 하나님께로 나아가 구원을 받기 위해선, 잘못된 율법과 제도가 잘못된 율법과 제도인 줄 그들이 알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유대 백성들은 그것을 깨닫고 거기서 벗어나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로 갈 수 없었습니다.
아울러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는 잘못된 율법과 제도와 성전 체제와 그 모든 것을 기반으로 하나님을 거역하던 대제사장 및 서기관들과 공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음은 영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필연적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처음부터 자신이 죽음의 필연적 이유를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삶은 온전히 십자가로 나아가는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갑작스런 죽음은 예수님이 외치셨던 개혁과 하나님의 나라의 실패를 의미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님의 역사로 그 모든 것은 교회를 통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성전 당국과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교회와 제자들을 다시 한번 가로막고 핍박했지만, 그러나 교회는 예수님의 새로운 말씀과 능력을 가지고 성장했습니다. 로마 황제와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또 가로막고 핍박했지만, 그러나 교회는 더 힘차게 성장했습니다. 수많은 이방인들도 나아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교회의 새로운 가르침이 그들에게 당대의 어떤 신이나 종교가 줄 수 없는 놀라운 소망과 생명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알게 되었고, 자신들이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리하여 더러운 우상숭배를 버렸습니다.
그러나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한 후 안타깝게도 기독교는 그런 새로운 힘과 생명을 잃게 됩니다. 교회는 종교와 제도와 권력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중세 천년의 암흑기를 보내었는데, 하나님은 다시 루터를 통해 종교개혁을 일으키셨습니다.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혜... 교회는 다시 한번 예수님의 개혁적인 말씀과 가르침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런 예수님의 복음이 우리나라에 전해졌습니다. 그래서 지금 한국의 교회들은 다 그와 같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종교개혁의 전통에 서 있는 개혁교회가 된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우리의 본질적인 정체성은 성경적으로 보나 역사적으로 보나 개혁된 말씀에 있습니다. 예수님도 그런 분이시고, 예수님의 말씀도 그런 말씀이고,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셨고,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언제나 그런 역사적 전통 속에 존재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우리는 이와 같은 예수님의 죽음의 이유를 돌아보면서, 다시 한번 우리의 정체성을 개혁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은혜만이 아니라, 하나의 개혁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놀랍게 바뀌는 일입니다. 은혜의 목적은 그것이죠. 은혜는 우리의 변화와 개혁을 위해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자 선물입니다. 그래서 주의할 것은 은혜는 헛되이 받으면 안 됩니다. 은혜는 거두어지고 성령님은 떠나시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은혜를 받고 구원을 받고 구원 안에 자라면, 우리 안에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개혁적인 말씀과 뜻이 자라게 됩니다.
어떤 사람도 한순간에 성숙한 개혁적인 신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조금씩 자라며, 하나님과 우리 주님의 세상과 다른 새로운 말씀과 뜻을 이해하며, 그와 같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고,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지 않게 됩니다.

돈에 대한 가치관이 달라집니다. 세상에서 돈은 인생의 전부이지만,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우리는 돈이 많든 적든 거기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많아도 교만하지 않고, 적어도 실망하지 않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며 하나님이 주신 것에 만족하며 삽니다. 많이 가진 사람을 시기하지 않고, 나보다 없는 사람을 멸시하지 않습니다. 돈에 좌우되고 돈을 섬기고 결정적인 순간 돈을 선택하는 사람이 되면, 우리는 아직 예수님의 새 생명의 개혁과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성공에 대한 생각도 달라집니다. 아등바등하며 치열하게 경쟁하며 무리하게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리에서 감사하며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때가 되고 필요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높이실 줄 압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달란트를 남긴 사람에게 다섯 달란트든 두 달란트든 똑같이 칭찬하시는 분이심을 알고 언제나 평안합니다. 그래서 손해 볼 줄도 알고, 양보할 줄도 알고, 매사에 계산하지 않고, 영악하거나 인색하게 살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실과 아름다운 과정을 성공과 결과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보시고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성공과 결과를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이 잔인한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고 만족하며 성실한 한 사람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세상과 다른 개혁적인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계급과 서열도 더 이상 따지지 않습니다. 교회의 직분은 목사든 장로든 집사든 다 섬기는 직분이지 계급이나 서열이 아닙니다. 오히려 목사님이나 장로님은 식사할 일이 있으면 줄의 맨 끝에 서야 합니다. 대접을 받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불편해져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잔치의 상석에 앉지 말고 끝에 가서 앉으라고 친히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에 가더라도 사람을 위아래로 나누고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낮추고 자기를 높이는... 그런 세상적인 삶의 방식을 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내가 사장이라고 표시를 내고 내가 회장이라고 표시를 내고 내가 높은 사람이라고 표시를 내는... 그런 사람이 되면 안 됩니다. 아무도 나에게 머리를 숙이게 하는 삶을 살아선 안 됩니다.
그런 사람은 아직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개혁적이지 않은 사람입니다.

우리 신앙도 자꾸 보수화가 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알려고 하지 않고 자꾸 구약 말씀만 보면, 신앙이 보수화가 됩니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뜻과 의미를 알지 않고 피상적으로 성경을 보면, 신앙이 보수화가 됩니다. 성경 말씀을 계속 배우지 않고 게으르고 문자에 갇히면, 신앙이 보수화가 됩니다. 오늘날의 지식과 과학과 역사적 발전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신앙이 보수화가 됩니다. 성령의 역사와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의 오래된 생각과 잘못된 문화와 전통을 벗지 못하면, 신앙이 보수화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자꾸 교회 안에 머물고 갇힙니다. 세상의 변화와 발전을 다 나쁘게만 봅니다. 세상 사람들과 소통하거나 대화하지 못합니다. 가진 것을 잃어버리지 않고 지키려고만 합니다.
지금 우리 교회들이 많이 보수화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잘 알면 우리 신앙은 새롭고 진취적이고 결코 보수화가 될 수 없는데, 그것을 알지 못하니 눈에 보이고 권위적이고 현세적 복을 받고 크고 화려한 구약 신앙을 선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기도는 이런 기도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도 당신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소서, 당신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우리가 진정으로 이 기도를 알고 드린다면, 이 기도대로 세상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교회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도록,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나님께서도 역사하시지만 우리도 그 거룩한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리심이 이 땅에 나타나도록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전도와 선교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상 정치 사회 경제 모든 곳에서 하나님의 이름과 나라와 뜻이 통하는 세상이 되도록 기도하며 만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면 전도와 선교도 잘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그러나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는 전례는 구약에도 없고 신약에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을 기도하라고 하신 일도 없고 예수님도 그런 것을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공중의 새를 보고 들에 핀 꽃을 보라 하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용할 양식이라는 ‘에피우시온’은 모호한 단어입니다. 그 단어는 성경 안에서는 물론이고 헬라 문헌 어디에도 없는 특별한 단어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그 단어의 의미를 그 단어를 이루고 있는 어근과 어미를 통해 추정하는데, 그 결과 그 단어는 오늘의 양식도 되고, 내일의 양식도 되고, 미래의 양식도 되고, 존재의 양식도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그 특별한 단어를 ‘그날의 미래의 양식’으로 번역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한 사람입니다.
그날 우리가 하늘에서 먹게 될 하늘의 양식을, 우리가 오늘 먹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죠. 예수님은 우리가 그렇게 하늘의 양식을 지금 먹고, 늘 새롭게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며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보수 신앙 혹은 보수 기독교란 말은 별로 좋은 말이 아닙니다.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그 말은 하나님의 살아있는 영원한 말씀과 예수님의 새로운 개혁적인 말씀을 따르고 적용하고 실천하는 우리에게 잘 어울리지 않습니다.
물론 잘못된 것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여선 안 되죠. 지켜야 할 것은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 신앙이 보수화되어서 옛것을 지키기만 하는 웅크린 모습이 되어선 안 됩니다.
우리는 당시 세상과 신앙을 하나님의 뜻으로 개혁하려고 하셨던 예수님의 제자로서, 오늘날 동일한 정체성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기도해서 능력 받고, 은사 받고, 기적이 일어나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새로운 개혁적인 말씀과 뜻을 우리가 오늘날 얼마나 실천하고 따라가는가... 그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역사의 발전과 정치와 사회 현실을 볼 때에도 개혁적인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지식과 경험과 성향과 기호에 따라 자신만의 시각을 가집니다. 그것은 자신의 고유의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과 시각에 대해 말하실 수 있는 유일한 한 분이 계십니다.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내가 우리 주님과 다른 생각을 하고 내가 우리 주님과 다른 시각을 가지면, 언젠가 우리가 그분 앞에 설 때 우리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너의 생각과 삶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느냐?”
“나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정의를 이 땅 가운데 이루기 위해 왔는데, 너는 그런 방향으로 함께 나아갔느냐?” 물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 하면서, 교회 안에 갇힌 신앙과 천국 가는 신앙만 있고, 이 잘못된 세상과 역사를 바로잡고자 하신 예수님의 크신 뜻과 시각이 없다면, 우리가 과연 예수님의 제자인지 자신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역사의 모든 잘못된 것들과 이 세상의 정치 사회 경제의 모든 잘못된 것들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늘 고쳐지고 개혁될 수 있도록, 바라고 기도하고 힘을 보태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아무쪼록,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과 구원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서 한 사람의 개혁가로서 죽으신 그 죽음을 생각함으로, 그 길을 같이 걷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여러분과 저에게 하나님께서 언제나 큰 능력과 은혜를 주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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