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우리 믿음의 뿌리

믿음찬교회 0 24 03.12 10:55
우리 믿음의 뿌리
히 11:3, 6
2024.03.10.

제가 어릴 적 교회를 다닐 때 들었던 말 중에,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는 말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믿음의 뿌리라는 말입니다.
교회에서 집사님들이 서로 이야기하시면서, ‘아무개는 믿음의 뿌리가 있다, 없다...’ 그런 말씀을 두런두런 하시는 것을 듣곤 했습니다. 저의 어머니도 가끔 집에서 똑같은 말을 하셨습니다. ‘아무개가 요즘 교회에서 잘 안 보이는데, 그래도 걔가 믿음의 뿌리가 있어서 어디 가지는 않을거야...’
그래서 그런 말을 자주 듣다 보니, 제 기억 속에 믿음의 뿌리라는 말이 인상적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믿음은 아~ 뿌리가 있어야 하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믿음의 뿌리라는 말은 지금도 교회 안에서 잘 사용되는 말입니다. 목사님들도 설교할 때, ‘믿음의 뿌리가 있어야 한다’고 권면하는 일이 흔합니다.
‘믿음의 뿌리’라는 말은 성경에 직접적으로 없지만, 그러나 성경을 찾아보면 믿음을 이렇게 뿌리와 연관 짓는 말씀이 있습니다. 주로 사도바울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이 말씀들은 다 이렇게 우리가 무언가 하나님 앞에서 뿌리가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면서, 특별히 그것을 믿음을 통해 그렇게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뿌리가 있는 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 믿음의 뿌리에 대해 다시 한번 살펴보는 시간이 되고자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히브리서 11장은 믿음 장이고, 믿음의 사람들을 소개하는 믿음 열전입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믿음으로 에녹은...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씀을 진행합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11장 안에서 믿음의 사람을 말하지 않고, 믿음에 대해서만 말하는 특별한 말씀 3개가 있습니다. 바로 1절, 3절, 6절입니다.
1절은 믿음이 무엇인가를 말씀합니다. 3절과 6절은 우리가 무엇을 믿는가... 혹은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를 말씀합니다. 1절은 우리가 살펴보았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3절과 6절을 볼 차례입니다.
3절은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하심을 믿는다고 말씀합니다. 6절은 우리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다고 말씀합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상 주심을 믿는다고 말씀합니다.
생각해 보면, 이것은 세 개의 시제입니다. 하나님의 창조하심은 과거이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은 현재이고, 하나님의 상주심은 미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이 행하신 것을 믿고,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을 믿고, 하나님이 행하실 것을 믿는 영원한 믿음입니다. 우리 믿음이 이와 같은 것을 온전히 믿어 뿌리를 가질 때, 영원한 믿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11장 안에서 특별히 빛나는 이와 같은 3절과 6절을 통해, 우리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믿는지 혹은 믿어야 하는지... 우리 믿음의 뿌리에 대해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첫째, 우리는 오늘날 이 시대 속에서도 하나님의 창조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중세 천 년의 교회 시대가 끝나고, 르네상스와 인문주의가 대두되고, 근대과학이 발전하면서, 신앙은 사람들을 지배하던 자리에서 내려오게 됩니다. 사람들은 교회와 신앙의 권위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생각하고, 인본주의를 추구하고, 교회를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4~5세기 전 일어났던 그런 거센 물결이 오늘날에 다시 재현되고 있습니다. 우주물리학, 입자물리학, 양자역학, 진화생물학, 생명공학, IT 및 인공지능 등 더 발전한 과학과 기술 혁명으로 본격적인 무신론 인본주의 시대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사람들은 신과 종교와 신앙에 대해 당연한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신과 종교와 신앙은 과학을 모르던 오래전 낡은 유산과 산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시대 속에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성경 말씀을 믿고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런데 그런 어려움 속에 교회와 믿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세상의 변화와 과학의 발전에 눈을 감는 일입니다. ‘그것은 다 세상 일이야...’라고 말하면서, 우리는 그저 교회 안에서 신앙만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앙을 추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기도를 하고 예배를 드리더라도, 세상의 변화와 발전을 따라가고 과학이 발견하는 새로운 지식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교회는 우리만의 고립된 장소가 되고 전도도 무의미해집니다. 무조건 믿으라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오늘날 이와 같이 과학이 발전한 시대 속에 여전히 하나님의 창조하심을 말할 수 있을까요?
네, 여전히 말할 수는 있습니다. 신앙적으로 성경적으로 말하는 것을 넘어서, 과학적인 관점에서도 그것을 어느 정도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과학은 그간 무수한 발전을 이루어왔지만, 우주의 시작과 생명의 본질에 있어서 여전히 많은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과학은 우주가 빅뱅으로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과학은 빅뱅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설명합니다. 보이지 않는 양자들이 팥죽처럼 끓는 양자 요동의 상태에서, 어느 찰라의 순간 양자의 쌍생성과 쌍소멸이 어긋나면서 빅뱅이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런 사실을 과학적으로 연구하고 밝혀낸 것만 해도 너무 놀랍습니다.
그러나 아직 거기까지입니다. 왜 양자들이 거기 있었는지... 그 비물질적인 힘과 에너지는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합니다.
과학은 거대한 우주에서 눈을 돌려 물질의 근원을 들여다봅니다. 입자물리학은 여러 장치와 실험을 통해, 물질의 가장 작은 단위인 새로운 입자들을 계속 발견하고 있습니다. 그 입자들 중에는 질량이 없는 입자도 있고 다른 입자에 질량을 부여하는 입자도 있습니다.
그런데 물질이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물질의 가장 작은 단위인 입자로 가면, 물질 입자는 입자의 성질과 파동의 성질을 동시에 가지게 됩니다. 학생들의 교과서에도 나오는 이른바 물질의 이중성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물질이 단순히 이런 이중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넘어, 물질 자체가 입자이자 파동이라는 사실이 되고... 그래서 물질은 파동이라고 하는 에너지로부터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이중성을 가진 물질은 관측을 통해 파동에서 입자가 되는데, 만약 물질이 관측 전 상태인 파동으로 존재하면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양자 중첩이라고 하는 현상, 즉 그것은 여기 있을 수도 있고 저기 있을 수도 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모인 자리에 문을 통과하여 나타나신 것처럼, 서로를 통과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재까지 과학은 우주의 시작에 대한 연구이든, 물질의 근원에 대한 연구이든... 물질이 비물질에서 온 줄 알고 그 경계까지 이르렀지만, 거기에 멈추어 있습니다. 그 업적과 성과는 놀랍지만, 그 너머의 세계는 큰 커튼에 가리어져 있고 우리가 알지 못합니다. 과학이 과연 그 경계를 넘을 수 있을까요?
그러므로 저는 목사로서 이런 과학적 상황 속에서 3절 말씀을 읽습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히브리서 기자의 이 말씀은 비록 과학적 진술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과학이 발견한 이상의 사실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부터 왔으며,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세계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 보이지 않는 근본 원인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오늘날 이 시대 속에서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창조하심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비과학적인 무지가 아닙니다.
신앙은 과학을 미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과학이 올바른 길을 걸어 진리를 계속 발견한다면, 과학은 하나님을 드러내는 좋은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님들은 이 시대 속에서도 언제나 하나님의 창조하심을 믿고, 믿음의 뿌리를 든든히 가지시길 바랍니다.

둘째, 우리는 오늘날 이 시대 속에서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그런 절망감이 몰려옵니다.
우리의 어려움이 깊어질 때, 고통의 시간이 계속될 때, 악이 횡행하고 악인이 오히려 잘될 때...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을 부정하게 됩니다. 우리가 그런 믿음의 부재의 상태에 빠질 때, 영적인 불청객인 마귀도 우리를 흔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오랜 세월 종살이를 했습니다. 그들에겐 조상들이 말해준 약속이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완전히 잊어버리신 것 같았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애굽으로 가기를 거부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가서 말하면, 그들이 내 말을 믿지 않고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을 것인데, ‘내가 그들에게 당신의 이름을 무엇이라고 말하리이까?’라고 질문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네가 내 이름을 묻기는 왜 물어... 가라면 가지... 왜 쓸데없이 말이 많을까...’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대답해주셨습니다.
스스로 있는 자... 네, 하나님은 그런 자존하시는 하나님이시죠. 그러나 현재의 이 번역은 어쩐지 그때 모세가 들었던 하나님 이름이 아닌 것 같습니다.
본래 거기에 ‘스스로’ 라는 말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본래 말씀은 “에흐예 아세르 에흐예”, 즉 “나는 나다” 혹은 “나는 존재하는 자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없다’라고 절망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어울리는 그 이름의 번역은 바로 “나는 존재하는 자이다”입니다. 이 말씀은 ‘너희는 지금 고통 가운데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가 없다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나는 언제나 존재하는 자이고 너희 고통 가운데 존재하는 자이다...’ 이런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의 이름을 그렇게 말씀하시며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내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존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것을 믿고, 어려울 때에 어렵다고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어려울 때에 어렵다고 하는 기도는 진실한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고 능력이 크시기에, 그런 진실한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저는 그런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한 일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때에는 자신을 시험하라고 말씀하신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시험해서는 안 되지만, 때로는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신가, 나를 사랑하시는가, 사랑하신다면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그런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간절한 기도와 하나님을 찾는 과정 속에,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언젠가 저는 저의 문제에 대해 하나님께 음성을 들려달라고 떼를 쓴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제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습니다. ‘결혼하게 하셨으면 아이도 주셔야지... 이치가 그렇지 않습니까? 말씀을 좀 해주세요...’ 그렇게 하나님께 겁 없이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러던 어느 날 기도하는 중에 갑자기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음성으로 직접 말씀하시면, 내가 과연 그 음성을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가슴이 떨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시내산 앞에서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지 않고 모세가 대신 말하기를 간청했던 이스라엘 백성처럼, 두려운 마음으로 제 기도를 취소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작은 경험이지만, 제가 하나님을 만난 하나의 경험이었습니다.
이렇게 살아계신 하나님은 우리의 문제와 고통 가운데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선지자들도 제자들도 다 그것을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기 원한다면, 우리도 어느 날 그것을 깊이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연약한 인간으로서, 멀리 내다보지 못하는 눈과 조급한 생각과 많은 걱정과 의심 속에 ‘하나님은 없다’라고 함부로 말하지만, 그러나 내가 ‘하나님이 없다’ 말한다고 하나님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부정한다고 하나님의 존재가 부정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존재하십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지금도 우주 만물을 붙들고 계십니다. 우주가 찰라의 역사로 처음에 시작되었다면, 우주는 찰라의 역사로 순식간에 붕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으로 이 우주를 붙들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언제나 고백하는 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체험하시고, 언제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셋째, 우리는 이제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상 주시는 이”... 이 단어는 한 단어입니다. ‘미스다포도테스’라는 단어인데 성경 전체에서 여기에만 나오는 특별한 단어입니다. 이 단어의 정확한 의미는 ‘보상자, 보답자’입니다.
우리가 일을 하면 삯을 주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하면 거기에 걸맞게 보상하시고 갚아주시는 분이시라는 의미입니다.
미스다포도테스... 이 말에 ‘포도’라는 말이 들어 있으니, 우리는 자연스레 ‘포도원 품꾼’ 비유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 비유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포도원에 품꾼을 불러 일을 시키는 주인으로 묘사됩니다. 포도원 주인은 아침 일찍 품꾼을 불러 일을 시킵니다. 또 점심때에도 품꾼을 불러 일을 시킵니다. 오후 늦게도 품꾼을 불러 일을 시키고, 마지막에는 1시간을 남겨 두고 또 나가서 품꾼을 불러 일을 시켰습니다.
그 비유에서 놀라운 점은 그렇게 마지막에 온 품꾼에게 하루 종일 일한 대가인 한 데나리온을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마지막에 온 그 품꾼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그 사람들은 보기에 가장 일할 능력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약하거나 병들거나 어디가 불편하거나... 그래서 그들은 하루 종일 일할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가장으로서 하루 종일 얼마나 마음이 힘들었을까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부르시어 한 데나리온을 손에 쥐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침 일찍 와서 하루 종일 일한 사람들도 한 데나리온을 받았는데, 그 문제는 따로 생각해야 할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비유에서 하나님은 마지막에 온 연약한 품꾼에게도 그 마음을 헤아리시며 풍성한 삯을 주시는 분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꼭 갚아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에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에게,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서 손해보고 밀려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꼭 보상하십니다.
저는 지금까지 살면서 하나님을 위해 몇 가지 잘한 것이 있습니다. 일상적으로 잘못한 일은 너무 많지만... 그래도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제가 이런 거 이런 거 하나님을 위해 잘한 일들... 아시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조금 있습니다.
제가 무슨 큰일을 했겠습니까? 그저 제 혼자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죠.
청년 때 교회 분란이 일어났을 때 다수의 편에 서지 않고 올바른 소수 편에 선 일, 그때 목사님이 교회에 못 들어갈 때 나도 같이 멱살 잡히고 욕먹은 일, 옮긴 교회에서 청년회 회장 하면서 교회 일 하고 교사하고 찬양대 한 일, 12월에 크리스마스 츄리 단다고 교회 종탑에 올라간 일, 10년 정도 간사 생활한 일, 그리고 교회 개척한 일...
큰일도 아니고 큰 결과도 없지만... 때로 가끔 생각할 때면, ‘하나님은 그것을 다 아시고 기억하신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제가 지금 이렇게 하나님의 복을 많이 받고 잘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유목사님, 이목사님, 장로님들, 권사님들, 모든 분들 한 분 한 분... 지금까지 하나님 믿고 애쓰시고 헌신하시며 여기까지 오셨는데...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은 다 기억하시고 갚아주시는 줄 믿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보상이 이 땅에서 다 이루어지지는 것은 아닙니다.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 순교를 당하는 사람들... 하나님을 위해 의로운 피를 흘리는 사람들... 그런 분들은 하나님 앞에 가서야 비로소 보상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지막 품꾼의 품삯도 갚아주시고 보상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은 영원한 진리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직접 말씀해주신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님들은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나 감사하며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시길 바랍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는 이 시대 속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의 믿음에 뿌리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태초에 하나님이 말씀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지금도 살아계시고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가까운 미래와 온전한 그날에 우리의 품삯을 지불하시고 풍성히 갚아주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 믿음 속에 흔들리지 않을 때, 우리 믿음은 뿌리 깊은 믿음이 됩니다.
아무쪼록 그런 깊은 믿음 속에, 이 시대의 오늘을 힘차게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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