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느니라

믿음찬교회 0 17 03.03 16:02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느니라
히 11:1~6
2024.03.03.

대개 목사님들이 설교 제목을 정할 때, 성경 본문에서 설교 제목을 정합니다. 저도 대체로 그렇습니다. 지난주 설교 제목도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라고 1절 말씀을 그대로 제목으로 정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설교 제목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느니라”인데, 오늘 본문 안에 그런 말씀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번역이 조금 다르게 되어 있을 뿐, 사실은 이 말씀이 오늘 본문 안에 3번이나 나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느니라’에 해당하는, 3번이나 나오는 오늘 말씀은 무엇일까요?
네, 그것은 바로 ‘증거를 얻었느니라’입니다. 2절, 4절, 5절 이렇게 3번입니다.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고, 아벨이 의로운 자라 하는 증거를 얻었고,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습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성경이 어떤 말씀을 짧은 본문 안에 여러 번 반복하면, 그것은 마치 깜빡깜빡하는 신호등입니다. 성경을 읽거나 해석하는 사람은 반드시 그 신호를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우리는, 히브리서가 짧은 본문 안에 이렇게 3번 말씀하는 내용을 살펴보고 은혜와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우선 2절의 ‘증거를 얻었느니라’ 라는 말씀은 11장 전체로 볼 때, 11장 맨 마지막 39절의 ‘증거를 받았으나’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네, 서론과 결론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11장 전체는 1~2절이 서론이고 39~40절이 결론입니다. 그래서 11장은 이렇게 서론과 본론에 동일하게 ‘증거를 얻었다’라는 말씀으로 본론을 감싸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증거를 얻었느니라’ 혹은 ‘증거를 받았느니라’ 라는 말씀은 11장 전체를 감싸고 있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중요한, ‘증거를 얻었느니라’라는 말씀은 어떤 의미일까요?
네, 이 말씀은 우리말의 예전 한자식 표현인데, 지금 표현으로 하면 바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느니라’입니다. 대부분의 영어 성경과 최근의 한글 성경들 모두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원어는 ‘마르튀레오’입니다. “인정하다, 칭찬하다, 선언하다, 증언하다”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동사의 주어는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다, 하나님의 칭찬을 받았다, 하나님의 선언을 들었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1절에 나오는 ‘증거’와는 다른 말입니다. 1절의 ‘증거’는 ‘엘렝코스’이고, 2절의 ‘증거를 얻었느니라’는 ‘마르튀레오’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다른 말인데, 지금 우리 성경이 같은 말처럼 같은 단어로 2번 반복하고 있어서 일말의 오해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1절과 2절은 최종적으로 이렇게 읽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느니라”
히브리서는 이렇게 11장 말씀을 시작하면서, 여기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이제 3절부터 본론이 시작됩니다.
본론의 첫 말씀은 창세기 1장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창조를 안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는 우리가 다음 주에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믿음으로 말한 히브리서 기자는 4절과 5절에서 최초의 믿음의 인물 2명을 소개합니다. 바로 아벨과 에녹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두 사람이 어떤 믿음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는지 알아야 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아벨입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아벨은 의로운 자라 하시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히브리서 기자의 말씀은 우리가 선뜻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아벨은 제사를 잘 드려서 의로운 자가 된 것인가?... 제사를 잘 드리면 의로운 자가 되는 것인가?... 제사는 오늘날의 예배인데, 그러면 우리도 예배를 잘 드리면 의로운 자가 되는가?...’ 이런 여러 가지 의문이 듭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런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창세기 4장의 가인과 아벨에 대한 말씀을 찾아 읽으면, 이런 새로운 의문도 듭니다.
창세기 4장은 아벨의 믿음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창세기 4장에는 믿음이라는 말이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가인과 아벨이 제사를 드린 일과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일과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 가인을 벌주신 일이 기록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히브리서 기자가 이와 같은 창세기 말씀을 가지고 왜 아벨을 믿음의 사람으로 말씀하는지, 또 아벨의 믿음을 왜 하나님께서 인정하신다고 말씀하는지... 좀 더 설명이 필요합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히브리서 기자와 같은 정통 유대인들은 성경을 읽을 때, 성경 말씀을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으로 여기고 매우 깊이 읽었습니다. 성경은 함축적이고 상징적인 말씀이 많기 때문에 그렇게 읽어야 했습니다.
창세기 4장의 가인과 아벨 사건은 1장의 창조와 2장의 에덴동산과 3장의 타락만큼이나, 쉽지 않은 본문입니다. 특히 왜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는지... 그 이유를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오래전부터 이 문제가 궁금해서 많은 설명을 했습니다. 혹 가인이 드린 제물에 문제가 있었나? 아니면 가인의 삶에 문제가 있었나?... 그래서 그중 한 설명은 가인이 피의 제사를 드리지 않아서 하나님이 받지 않으셨다는 설명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설명은 크게 지지받지는 못했습니다. 아직 율법이 없는 시대에 농사꾼이 자신이 거둔 농산물로 제사를 드린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죠.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그런데 창세기 4장은 다만 이와 같은 결정적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우리는 그때 가인의 삶이 구체적으로 어떤 잘못이 있었는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 말씀을 볼 때, 가인은 선한 삶을 살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가인과 아벨의 제사와 관련해서,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지만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신 이유는, 제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인의 삶에 있다고 해석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히브리서 기자는 이와 같은 창세기 말씀을 믿음이라는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를 받으신 이유는 양의 첫 새끼와 기름으로 즉 올바른 방법으로 피의 제사를 드렸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벨의 삶을 보시고 그것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히브리서 기자의 해석입니다.
네, 올바른 해석입니다. 하나님은 그저 바치면, 받는 신이 아니십니다. 우리를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자신을 사랑하고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 그 마음을 담아 하나님께 드릴 때, 하나님은 받으십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도 누군가 우리를 좋아하고 관계가 있을 때, 어떤 선물을 주면 기쁩니다. 그러나 우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고 신뢰 관계가 없는데, 무엇을 주면 기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인격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얼마나 더 그런 분이시기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평소 아벨이 자신을 믿고 양을 치며 자신의 삶과 생활을 하는 것을 보시고, 그의 제사를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아담과 하와가 들려주는 하나님 이야기, 에덴동산 이야기... 이런 이야기들이 싫었던 것 같습니다. 가인이 그런 이야기들을 싫어하고 하나님을 싫어한 이유는 지금 자신의 현실이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저주받은 땅 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인은 농사를 지으며 그런 현실을 절감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사를 드리기는 드려도 마음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가인의 제사를 하나님은 받으실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이렇게 믿음이라는 렌즈로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살펴보고 그들의 삶을 살펴보는, 히브리서 기자의 이와 같은 해석은 탁월한 해석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는 마음으로 일상을 살고, 그 마음과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야 합니다. 그러면 그 예배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산 제사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평소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내 생각대로 살다가, 주일날 시간이 되어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를 드린다면, 하나님은 그 예배를 받으시기 어렵습니다. 우리 마음과 삶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네가 정녕 나를 믿느냐?, 네가 정녕 나를 믿고자 마음으로 왔느냐?” 하나님은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그러면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아벨이 되어야 합니다. 가인이 되어선 안 됩니다. 저주받은 땅과 어려운 현실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해선 안 됩니다. 어려운 것은 아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벨은 양을 기르기 위해 여기저기 떠도는 생활을 했습니다. 양치기는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오는 생활이 아닙니다. 며칠 만에 집에 돌아오고, 몇 주 만에 돌아오고... 늘 밖에서 생활해야 했습니다. 농사일보다 더 힘든 것이 양 치는 일입니다.
그러나 아벨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제사를 기쁘시게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아벨 같은 믿음이 되시길 바랍니다. 어려움 중에도 하나님을 믿는 순전한 믿음... 그것이 아벨의 믿음입니다.
그런 아벨의 믿음은 어떻게 보면 바보 같은 믿음입니다. 뭐가 감사할 게 있다고... 떠도는 생활이 뭐가 좋다고... 양의 첫 새끼로 제사를 드립니까?
아마도 그런 생각을 가인이 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 뭐가 감사할 게 있냐고... 가인은 그런 면에서 똑똑한 사람입니다. 다 계산이 됩니다. 우리를 에덴동산에서 추방하시고 이 세상의 고된 현실에 버려두신 하나님께 감사할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믿을 일도 없고 제사 드릴 일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안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가인이 되어선 안 됩니다.
역사는 엄정한 것입니다. 그렇게 가인은 가인이 되었고 가인의 후손들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어려움 속에서도 아벨은 아벨이 되었고 아벨의 후손들이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역사를 보면서, 선택을 해야 합니다. 똑똑해서 가인이 되고, 감사할 게 없어서 가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성도님들은 어려움 속에서도 다 아벨이 되시고 아벨의 믿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에녹입니다.
에녹은 창세기 5장에 나오는 사람입니다.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365세를 살았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네,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지금 우리가 보는 구약성경 원문엔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되어 있는데, 히브리서 기자가 주로 보던 70인역 성경엔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히브리서 기자는 그 성경에 의거하여, 에녹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동행한 것이 맞을까요? 기쁘시게 한 것이 맞을까요? 네, 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런 문제에 이 둘 사이에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라고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하나님과 싸우며 동행할 리는 없기 때문입니다.

에녹에 대해선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이 많지 않습니다. 그에 대한 말씀도 짧고 다른 설명도 없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6장을 보면 노아가 나오는데, 우리는 노아가 살던 시대가 어떤 시대였는지 설명하는 말씀을 발견하게 됩니다.
노아 시대와 에녹 시대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에녹은 노아의 증조부이기 때문입니다. 노아의 아버지는 라멕인데, 라멕의 할아버지가 바로 에녹인 것입니다. 노아는 에녹을 보지 못했지만, 라멕은 할아버지 에녹을 어릴 적에 보았습니다.
그래서 노아 시대와 에녹 시대가 크게 다르지 않은데,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노아 시대는 이런 시대였습니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그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네, 노아 시대는 타락과 폭력과 부패와 야만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에녹은 그런 세상에서 타락하지 않고 부패하지 않고 폭력적이지 않고 공격적이지 않고... 그런 세상의 방식과 다르게 살아갔습니다. 에녹은 자신을 지키며 그런 세상에 물들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에녹이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에녹의 믿음은 다른 말로 세상에 물들지 않는 믿음입니다. 그런 에녹의 믿음 때문에, 그 후에 노아가 태어났습니다. 아버지의 할아버지의 믿음이 타락한 세상을 이기고 그렇게 흘러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세상 속에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는 말씀은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도 창세기를 읽을 때 주목하지 않을 수 없고, 에녹을 믿음의 2번째 인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에녹의 믿음은 참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아벨의 믿음이 우리의 개인적인 믿음이라면, 에녹의 믿음은 우리의 시대적인 믿음입니다. 에녹의 믿음이 없으면 우리는 이 시대를 살아가기 어렵습니다.
그때만큼이나 험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타락과 부패는 선을 넘었습니다. 사람이 그럴 수 있나... 사람이 그러면 안 되지... 그런 순진한 말은 세상 물정 모르는 말이 되었습니다. 독사의 독보다 더 독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2년 전에 이런 뉴스가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아파트 29층에서 음식 배달을 주문했습니다. 배달원이 아파트 입구에 도착하여 전화를 했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다른 곳에 갔다가, 다시 와서 다른 사람이 들어가는 틈에 아파트 현관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 있었습니다.
배달원은 할 수 없이 29층까지 걸어 올라갔습니다. 올라가는 도중 사장님으로부터 주문자가 걸어서 배달해달라고 요청이 왔다고 했습니다. 자기 아들도 걸어서 왔다고 하면서... 그래서 겨우 29층까지 올라가서 배달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14층까지 내려오는데, 주문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주문 취소했으니 가져가라는 것입니다. 이유를 물으니 배달 시간이 늦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뉴스를 볼 때마다, 그냥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어떤 한 사람의 일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이 시대를 말해주는 사건입니다. 그런 일들이 지금 우리 세상에 너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파트마다 주차 빌런이 주차장 입구를 막았다... 주차 칸 두 개를 혼자 사용한다... 작은 접촉 사고에 며칠씩 입원을 한다... 이런 몰양심적이고 악한 뉴스들이 일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돈과 이해관계와 권력이 오고 가는 우리 사회의 높은 곳으로 가면 어떨까요? 정치가 있는 곳, 돈과 권력이 있는 곳,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곳... 거기엔 더 적나라한 타락과 부패와 거짓과 폭력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그런 곳의 지금 상태는 노아 시대 이상입니다. 인간의 마음을 완전히 상실하고, 법과 제도를 변질시키고, 폭력과 살인과 거짓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대의 에녹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에녹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에녹은 세상을 분별하고 세상과 거리를 두고 믿음의 길을 걸었습니다. 이것은 배타적인 신앙이 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세상과 담을 쌓으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세상을 알고 물들지 않는 믿음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짓된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고, 악한 자들이 악을 행하고, 잔인한 자들이 잔인한 폭력을 휘둘러도... 우리는 선한 믿음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세상에 물들면,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는 말씀은 그런 의미입니다.
막연한 일반적인 믿음이 아니라, 아벨의 믿음과 에녹의 믿음을 말씀합니다. 단순히 교회를 다니고 ‘하나님을 믿습니다’하는 믿음이 아니라, 세상의 어려움과 부패와 타락 속에서도 하나님을 변함없이 믿는 실제적인 믿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믿음은 교회 안에서 아멘 하는 안일한 믿음이 아닙니다. 아벨과 에녹처럼 내 인생의 어려움 한가운데에서, 세상의 부패와 타락 한가운데에서 하나님을 믿는 강하고 아름다운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귀하게 보시고, 그 믿음을 인정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믿음으로 하나님께 늘 헌신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는 헌신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헌신예배는 단순히 우리가 교회의 사역을 잘하기 위해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을 다시 한번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입니다.
영적인 밤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이 어두운 때에 우리가 다시 한번 마음의 허리를 단단히 묶고, 우리 믿음을 하나님께 올려드려야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우리 성도님들은 이 시대 속에 아벨이 되시고 에녹이 되셔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인정을 받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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