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우리의 믿음의 길

믿음찬교회 0 31 02.18 15:31
우리의 믿음의 길
히 10:32~39
2024.02.18.

그렇지 않은 분들도 계시겠지만, 대체로 사람은 길을 좋아합니다. 이어지는 길을 보면서 상념에 잠기고, ‘저 길 끝에는 뭐가 있을까, 저 언덕을 넘어가면 뭐가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아마도 사람이 길을 보면서 본능적으로 끌리는 것은 우리 인생이 동일한 길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길입니다. 살아온 날이 많을수록, 우리는 어느 날 뒤돌아보며 걸어온 길을 보게 됩니다.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하고, 울퉁불퉁 하기도 하고, 갈림길을 만나기도 하고, 쉬어가기도 하고... 내가 걸어온 길이지만 우리는 미지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길을 좋아하고 걷는 것을 좋아합니다. 오랜 시간 길을 걸으면, 어느 순간 우리는 산을 보거나 경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보고 새로운 영감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이 이렇게 길인 것처럼, 우리 신앙도 하나의 길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 신앙이 그런 의미라는 관점에서 말씀합니다.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고 지금 믿음의 길 위에 있습니다. 우리는 뒤로 물러가면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 영혼의 최종 구원을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이 길은 언제 시작이 되었을까요? 네, 오늘 첫 말씀이 그 시작입니다.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히브리서 기자는 그들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만난 사건을 빛을 받은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로마교회의 유대인 신자들... 그들의 부모 세대는 아마 일찍이 유대 땅에서 로마로 끌려온 포로들이었을 것입니다. 그 후손인 그들은 이제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비록 이방 땅에 살지만, 매년 절기마다 예루살렘을 방문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해, 그들은 오순절 예루살렘에서 사도행전의 성령강림 사건을 목격하고,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예수님과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베드로의 설교는 놀라운 메시지였습니다. 그래서 아마 그때 로마로 돌아간 그들에 의해 로마에 교회가 하나 둘 세워졌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로마 교회에는 아마 처음부터 이방인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말씀을 전하고 세례를 준 백부장 고넬료와 그 가족들을 압니다. 그와 그의 가족도 임기를 마치고 다시 로마로 돌아갔을 것이고, 그들도 로마의 어느 가정 교회에 합류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로마의 교회들은 선교를 통해 세워진 교회가 아니라, 복음을 들은 로마에 살던 사람들에 의해 세워진 자생적인 귀한 교회였습니다.

오순절 사건 이후 생겨난 로마의 가정 교회들은 약 15~20년 정도 잘 성장했습니다. 그런데 AD 49년 최초의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로마의 유대교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는 기독교 유대인들과 교회를 공격하는 소동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때는 사도 바울이 이방 지역을 선교하던 1차 전도 여행 시기였는데, 바울도 각 도시에서 동일한 소동과 소요 사태를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갖은 모함과 비방을 들었습니다. 믿는 형제자매들이 모여 성찬식을 갖고 예수님을 오직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을 보고, 그들은 남녀가 섞인 부도덕한 무리들이고 피를 마시는 사교 집단이고 우상 숭배에 참여하지 않는 반사회적 집단이라고 비난받았습니다. 유대교 유대인들의 고소와 고발이 있었고 공개적인 모욕을 당하고 그러는 가운데 신자들 중 많은 수가 감옥에 갔습니다. 그때는 다 매를 맞고 빛이 들어오지 않는 지하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의 교회들과 유대인 신자들은 이와 같은 일련의 사태를 통해 오늘 말씀과 같이 큰 고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AD 49년 로마에서 일어난 이와 같은 소요 사태는 일명 ‘크레스토스 사건’으로 불리어집니다. 이에 당시 황제였던 글라우디오는 로마에서 유대인 추방령을 내립니다.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이든, 기독교를 믿는 유대인이든, 황제는 골치 아픈 그들 모두를 로마에서 추방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집과 재산을 빼앗기고 로마를 떠나야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도 그때 로마를 떠나 고린도로 갔고, 거기서 바울을 만났습니다.
이에 따라 로마의 가정 교회들은 심각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교회의 중심이었던 유대인 신자들이 다 추방당하고, 소수의 이방인 신자들이 남아 겨우 교회를 지켰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연약한 교회들을 돌아보셨고 신자들 또한 신실하였기에, 교회는 생명력을 잃지 않고 계속 모였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글라우디오 황제가 죽고, 떠났던 유대인 신자들이 로마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시기의 로마 황제는 네로였고, 아울러 로마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에 대해 여전한 적대감과 반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상 숭배를 거부하고 자신들과 달랐던 것은 유대교도 마찬가지였지만, 유대교는 대부분 유대인들만 믿었고 사회에 큰 위협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유대교에서 나온 이 새로운 신앙은 비유대인들도 많았고 점점 확산되고, 유대교 못지않은 유일신 신앙 및 반사회적 신앙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런 기독교인들을 싫어했고 적대감을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로마의 교회와 신자들은 이와 같은 상황 속에 놓여 있습니다. 커져 가는 반감과 사회적 차별과 불이익 속에 유대인 신자들은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유혹을 받았습니다.
신자들의 그런 불안함은 그저 불길한 기우가 아니었습니다. 이로부터 얼마지 않아 로마에 대화재가 발생하고, 그런 사회적 혼란과 정치적 위기 속에 네로 황제는 그 대화재의 원인을 교회와 기독교인들에게 돌렸습니다.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로마의 기독교 박해는 네로 황제로부터 시작하여 AD 313년 기독교를 공인하는 밀라노 칙령까지, 무려 10번의 대박해가 있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와 같은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의 역사를 미리 생각하면서, 오늘 본문을 보면 참 마음이 먹먹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지금 믿음의 담대함을 잃지 말라고 말씀하지만, 교회와 신자들 앞에는 이제 본격적인 박해의 서막이 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우리 신앙이 이와 같은 험한 길을 걸어왔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신앙이 이와 같은 험한 길을 걸어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신자들은 신실하고, 또 우리 신앙에는 세상과 다른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 시대나 지금 시대나 세상엔 소망이 없지만, 오직 우리 주님께는 영원한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처음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만나고 빛을 받은 후에 이 신앙의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신앙의 길을 걸었고 어려운 고비를 넘어왔습니다. 그것은 고난의 큰 싸움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위기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일본에 가면 유럽 알프스에 비견되는 일본 북알프스가 있습니다. 거기에 3,000미터 이상의 고봉들이 많은데, 그 고봉들 사이를 걷는 트레킹 코스가 유명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많이 찾아서 이정표에 한글 표시도 많이 되어 있습니다.
대부분의 트레킹 코스는 안전한데, 일부 험하고 위험한 코스가 있습니다. 그중 다이기렛토라고 하는 위험한 코스가 있습니다.
다이기렛토라는 말은 큰 협곡이라는 말인데, 3,000미터급 두 봉우리 사이에 푹 파진 큰 V자 협곡입니다. 수백 미터를 내려갔다가 수백 미터를 올라가야 하는데, 길은 하나밖에 없고 양쪽은 다 절벽입니다. 고도감을 이겨내며 줄과 바위를 붙잡고 좁다란 바위 능선을 통과해야 합니다. 일본의 산은 우리나라와 달리 안전장치도 최소한으로 해놓았습니다. 어떤 분은 잘 모르고 단체 여행으로 거기를 갔다가, 집에 와서 자녀들을 보고 울었다고 합니다.
경치를 볼 새도 없이 정신 없이 수직으로 내려와서 바위 능선을 넘으면, 이젠 올라갈 길이 막막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출 수는 없습니다. 중간에 내려가는 길도 없습니다. 다시 바위 봉우리를 올라가야 합니다. 바위 봉우리 맨 위에 산장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거기 가보지 않았지만, 가본 분들의 영상을 많이 보면서 오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그렇습니다. 영적으로 볼 때, 우리는 지금 동일한 믿음의 험한 길 위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빛을 받은 후 처음 믿음의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크고 작은 어려움을 헤치며 지금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우리 앞에는 더 큰 봉우리가 있고 위험한 길이 펼쳐져 있습니다.
그러나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것은 신앙적으로 멸망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 믿음의 운명이라면 운명이고, 예정이라면 예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담대함을 가지고 계속 걸어가야 합니다. 돌아서지 않고 믿음을 가지고 영적인 다이기렛토를 통과하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오히려 어려움이 찾아옵니다. 길이 넓고 잘 되고 편안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길이 좁고 힘들고 더 어려워집니다.
우리 영혼은 빛을 보고 우리 안에는 영생과 하나님의 나라가 있지만, 지금 우리 현실은 이 세상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매트릭스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거대한 매트릭스 안에서 인간은 행복했습니다. 정신을 빼앗겼지만, 따뜻하고 영양분을 공급받고 편안합니다. 그러나 매트릭스에서 깨어 그 껍질을 깨고 나오면, 그 사람에겐 이제부터 고난과 투쟁이 시작됩니다.
예수 믿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믿으면, 이 세상이라는 매트릭스에서 깨어난 사람이 됩니다. 그 사람은 그때부터 다른 것을 보기 시작하고 다른 것을 추구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어려움이 찾아옵니다.
‘예수 믿으면 범사에 잘 되고 복 받습니다. 믿으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다 도와주십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을 그런 행복 일변도의 신앙으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믿음으로 이겨내고 인내해야 하는 어려운 일이 더 많이 생깁니다. 잘못된 세상에서 의롭게 산다는 것, 어두운 세상에서 빛으로 산다는 것, 비정상 속에 정상으로 산다는 것...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도 잘 된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어려움이 닥쳐오고 있지만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 하나님이 다 지켜주신다...’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박해를 예견하는 히브리서 기자가 하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너희가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인내하라, 뒤로 물러가지 말라,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져라’입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만약 히브리서 기자가 지금 이 시대에 목사를 하시고 목회를 하신다면... 아마도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유명한 목사님은 되시기 어려울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그것은 히브리서의 이와 같은 말씀이 듣기 좋은 말씀이 아니라, 듣기 어려운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말씀에는 쉬운 말씀이 있고 어려운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쉬운 말씀을 듣고 신앙생활을 해왔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믿으면 다 됩니다. 기도하면 다 응답받습니다. 믿으면 복 받고 잘 됩니다...”
그러나 그런 신앙은 하나도 어렵지 않은 신앙입니다. 누구나 믿을 수 있고 누구나 바라는 신앙입니다. 바위에 절하는 사람도 믿고, 나무에 절하는 사람도 믿고, 무당 잡신을 믿을 바에야 교회에 와서 그런 말씀을 들으며 그런 신앙을 가지는 것이 더 좋습니다.
여러분, 한국 교회의 역사를 보면, 한국 교회는 하나의 올바른 교회가 아닙니다. 한국 교회 안에는 수많은 것들이 들어와 있는 혼합된 교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 안에 있다고 안심하고 올바른 신앙을 추구하지 않으면, 쉽고 편안한 세상적인 신앙에 우리는 길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출애굽 할 때 처음엔 하나님 믿는 것이 쉬웠습니다. 애굽의 열 재앙, 유월절의 밤, 홍해의 역사...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춤추고 노래했습니다.
그러나 홍해를 건너고 본격적인 광야 길이 시작되자 그들은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장 마실 물이 없고 먹을 음식이 없자,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불평과 원망을 받아주셨습니다. 그들에게 그것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율법과 성막을 주셨습니다. 노예 민족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신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여기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는 출애굽 한 지 약 1년이 지난 후, 그들이 시내산을 출발하여 가데스바네아로 갔을 때입니다. 거기서 그들은 정탐꾼을 보내고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비로소 하나님의 어려운 말씀을 듣게 됩니다. 바로 하나님을 믿고 가나안 땅을 정복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쉬운 말씀은 들었지만, 어려운 말씀은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쉬운 말씀은 믿음이 필요하지 않지만, 어려운 말씀은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거기서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저 가나안 땅을 정복할 수 있느냐고 말하며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출애굽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 이야기는 우리의 영원한 영적 교훈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쉬운 말씀만 듣고 어려운 말씀을 듣지 못하면, 우리도 구원의 길에서 실패한 이스라엘이 되고 맙니다.

복 받는다는 말... 쉬운 말씀입니다. 구원받는다 말... 쉬운 말씀입니다. 잘 된다는 말... 쉬운 말씀입니다. 은혜로 된다는 말... 쉬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싸우라는 말... 어려운 말씀입니다. 인내하라는 말... 어려운 말씀입니다. 구원에 이르라는 말... 어려운 말씀입니다. 너희가 지난번 고난의 큰 싸움을 싸우고 견딘 것을 생각하고, 지금 다가오는 신앙적 어려움 앞에서도 계속 담대하라는 말... 어려운 말씀입니다.
이런 어려운 말씀에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보통 그렇습니다. 처음 만나는 고난과 어려움은 믿음으로 잘 이깁니다. 처음이니까 잘 해냅니다. 그러나 두 번째 세 번째 계속 고난이 찾아오고 어려움이 닥치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하나님을 의심하고 불평합니다.
하나님 잘 믿고 있는데, 갑자기 건강이 나빠져 병원에 다니게 됩니다. 잘 치료하고 나아서 하나님께 감사했는데, 이번에 다른 곳이 건강이 나빠져 또 병원에 다닙니다. 그런데 그런 가운데, 이제는 아이까지 아픕니다...
직장 생활 잘하고 있는데, 갑자기 회사 사정이 나빠져 회사를 나오게 됩니다. 이리저리 직장을 구하고 있는데, 갑자기 차 사고가 납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이렇게 연이어 사고와 불행이 닥칠 때, 우리 믿음은 흔들립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 마음에 전혀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어려움 가운데에서 우리의 영혼이 거칠어지지 않고 우리의 마음이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할 때, 우리는 믿음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믿음은 미신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행복 속에서 행복의 의미를 찾고, 불행 속에서 불행의 의미를 찾고... 좋은 일이 계속 생기면 자신감을 갖고,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위축되고... 바람이 이리 불면 이리 흔들리고, 저리 불면 저리 흔들리고... 우리의 믿음은 현실을 따라가는 그런 미신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고골리라는 러시아 작가는 자신의 소설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네프스키 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뀐다.’ 우리는 변하는 세상의 길거리에서 믿음을 잃어버려선 안 됩니다.
우리는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적인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어려울수록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분명하다면, 어려워도 괜찮습니다. 우리는 계속 믿음의 길을 걸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약해지지 마시길 바랍니다. 아직 우리 시대에 신앙의 박해의 시기는 오지 않았습니다. 예수 믿지 못하게 하는 국가도 없고 황제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 믿음에 크고 작은 어려움이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믿음으로 살지 못하면, 더 큰 시련이 올 때 어떻게 견뎌낼 수 있겠습니까?
일본 북알프스에 회자되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야리가다케를 오르지 못하는 사람은 다이기렛토에 데리고 가지 마라.’ 야리가다케는 창악이라고 하는, 북알프스의 중심에 있는 창처럼 생긴 뾰족한 산입니다. 겁이 나서 그 산의 정상에 오르지 못하는 사람은 다이기렛토에 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두려워하지 마시고,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런 믿음과 용기를 가진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아무쪼록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는, 믿음의 성도님들이 다 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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