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금식을 폐하신 예수님 (1)

믿음찬교회 0 22 2023.11.08 13:57
금식을 폐하신 예수님 (1)
막 2:18~22
2023.10.27.

예전에 우리 한국교회는 금식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웬만한 목사님들의 경우 일주일 혹은 열흘 금식기도는 보통이고, 좀 특별한 분들은 40일 금식기도도 하시곤 했습니다. 목사님들뿐만 아니라 일반 성도님들도 며칠씩 금식기도를 하시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한국교회가 금식기도를 많이 하지 않습니다. 금식기도에 대한 이야기나 강조도 많이 사라졌고, 금식기도회나 집회도 거의 없고, 교회 내에서도 금식기도 하시는 분들이 별로 없습니다.
아마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생활의 변화가 큰 요인인 것 같고 나아가 그간 해왔던 금식기도의 목적이 성경 말씀과 조금 맞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그런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한국교회는 금식기도에 대해 과거엔 무척 적극적이었는데 지금은 많이 차분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금식기도에 대한 이와 같은 오해와 혼선은 예수님 당시에도 있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과 세례요한의 제자들은 정기적인 금식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경건한 신앙생활의 한 모습으로 금식을 했고, 요한의 제자들은 스승인 세례 요한의 가르침 때문에 금식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그들의 눈에 금식을 전혀 하지 않는 예수님과 제자들은 이상했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은 오히려 세리 및 죄인들과 식사를 즐기기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그들의 눈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이상한 정도가 아니라 무척 불신앙적이고 불경건한 무리처럼 생각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에게 나아와 이렇게 질문을 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2가지로 대답하셨습니다.
첫 번째로 ‘혼인집 손님’과 ‘신랑’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는 금식할 수 없지 않느냐?...”
그리고 예수님은 두 번째로 ‘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 말씀을 하셨습니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이렇게 예수님은 금식에 대한 대답으로 혼인집 손님과 신랑 그리고 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금식에 대한 예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이 예수님의 말씀을 살펴보고 은혜와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금식에 대한 예수님의 첫 번째 말씀은 ‘혼인집 손님’과 ‘신랑’에 대한 말씀입니다.
‘왜 금식하지 않는가?’에 대한 예수님의 이 첫 번째 대답은 간단합니다. ‘지금은 아니다’입니다. ‘지금 신랑과 함께 하는 즐거운 혼인잔치가 진행되고 있는데, 어떻게 금식을 하겠는가?’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신랑은 메시아이고 예수님 자신입니다. 그리고 그 식사는 메시아적 만찬입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면 다시 만나를 먹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 말씀은 ‘나는 메시아이고 지금은 메시아와 함께 하는 즐거운 시간인데, 어떻게 지금 우리가 금식을 하겠는가?’라는 의미입니다. 메시아와 함께 하는 시간 동안 금식은 일시 중지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금식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두 번째로 ‘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 말씀을 하셨습니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여기서 우리는 금식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의 본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낡은 옷 같고 낡은 가죽 부대 같은 금식 전통은 폐지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식에 대한 예수님 말씀의 본 뜻은 금식의 일시 중지를 넘어, 금식의 폐지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금식의 폐지를 말씀하시는 걸까요? 경건한 금식과 금식기도는 신앙에 유익하고 좋은 것 같은데, 왜 예수님은 그것을 거절하시고 나아가 폐지를 말씀하시는 걸까요?
이 내용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가 이스라엘의 금식의 역사를 잠깐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본래 구약 율법에는 단 하나의 금식 전통이 존재했습니다. 그것은 대속죄일의 금식입니다. 유대 종교력 7월 10일(태양력 9월말), 그날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며 금식했습니다.
그런데 유대 역사 속에서 남유다는 망하고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이런 역사로 인해 넷째 달과 다섯째 달과 일곱째 달과 열째 달의 금식(슥8:19)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페르시아 시절 에스더서의 부림절과 관련하여 또 한 번의 금식 전통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구약 말미에 유대인들은 총 6번의 금식 전통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여기에 또 하나의 금식 전통을 추가했습니다. 그것은 누가복음의 한 바리새인의 기도에서 볼 수 있는, 일주일에 두 번 하는 금식(눅18:12)입니다.
이렇게 해서 바리새인들의 신앙생활을 보면, 일 년 6번의 정기 금식에다가 일주일 두 번의 금식까지 더해서 이렇게 그들은 정말 금식을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여기에 기도와 구제를 더하고, 또 안식일과 절기와 각종 율법적 규례를 지키는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당시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바쁘고 분주한 종교 생활을 하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와 같은 많은 금식과 바쁘고 분주한 종교 생활이 과연 하나님의 뜻일까요?

여러분,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금식과 관련한 하나님의 뜻은 본래 하나였습니다. 그것은 대속죄일이죠. 대속죄일의 금식의 의미는 회개였습니다.
그런데 남유다 왕국이 멸망했고 그 일로 인해 애도의 의미로 금식 전통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페르시아 시절 부림절을 통해 민족적 위기 앞에 금식하는 금식 전통이 또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지금 바리새인들이 경건의 의미로 또 금식 전통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지키고 있던 금식은 본래 하나였던 하나님의 뜻에 여러 개의 인간 금식 전통이 결합된 복잡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렇게 많은 금식을 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뜻은 영원하지만, 사람의 뜻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계속 금식 전통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요?
네, 그 결과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여호와 신앙은 어둡고 침울한 율법적 신앙이 되어 버렸습니다. 사람의 많은 전통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가리고 참된 신앙을 어렵게 하는 걸림돌이 되어버렸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신앙이란 어디까지나 사람의 구원과 자유와 평화와 해방인데, 금식은 그것을 짓누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바리새인들이 금식을 경건의 수단으로 삼은 것이 큰 문제였습니다. 금식은 경건의 수단이 아닌데, 그들은 그것을 그렇게 규정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경건을 위해 정기적으로 금식하도록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금식은 겉으로 보기엔 경건한 여호와 신앙 같지만, 그러나 실제로는 하나님의 뜻과 무관한 인간의 신앙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은 당시 유대인들의 신앙 생활의 문제점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금식의 폐지를 말씀하셨습니다. 비록 특별한 역사적 의미로 금식 전통이 생겼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그것은 중지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본래 제정하신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금식은 국가적 위기나 회개 같은 특별한 경우에 한정되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신랑을 빼앗길 날이 되면 금식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물론 이것도 그분을 빼앗긴 날은 실제로 3일에 불과했으므로, 교회는 새로운 금식 전통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 교회들은 금식 전통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금식은 특별한 경우에 하는 것이지, 우리 신앙의 일반적인 내용이 아닙니다. 따라서 금식을 경건의 수단이나 능력의 수단이나 기도 응답의 수단으로 삼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금식에 대한 이와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삶과 신앙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전통을 구분하고,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추구하는 교회와 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기에 대한 구체적인 말씀은 다음 시간에 계속 이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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