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2)

믿음찬교회 0 114 2023.10.24 16:46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2)
막 2:17
2023.10.20.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이와 같은 일반적인 의미만이 아닌, 역설적인 의미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대체로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하지 않고 이중적인 의미를 가질 때가 많습니다. 씨뿌리는 비유는 말 그대로 씨를 뿌리는 비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비유는 4가지 밭에 대한 비유이기도 합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 말씀은 죄짐을 지고 버림받은 예수님의 고백이기도 하지만, 시편 22편의 하나님의 놀라우신 구원 계획을 찬양하는 예수님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은 이중적인 의미를 가질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도 그렇습니다. 이 말씀은 역설적인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역설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네, 그것은 이 의인과 죄인을 자칭 의인과 자칭 죄인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의 의미는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닌, 자기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부르기 위해 오셨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그렇게 역설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이유는 당시 상황 때문입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당국은 자신들의 가르침과 규례를 잘 지키는 사람을 의인으로 규정하고, 반면에 자신들의 가르침과 규례를 잘 따르지 않거나 잘 못하는 사람을 죄인으로 규정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당국이 가르친 율법과 각종 규례는 실로 복잡했습니다.
제사 법, 안식일 법, 십일조 법, 금식 법, 정결 법, 그리고 각종 절기와 명절 법 ... 그들은 율법을 세분화하고 구체화하여 그렇게 복잡하게 만들었습니다.
물론 그 취지야 이론상 좋은 것이죠. 하나님을 더 잘 믿고 잘 섬기기 위해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그것은 유대 백성들을 지배하고 짓누르는 수단과 평가 기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법과 규례를 잘 지키는 사람은 의인이라고 하고 대우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죄인이라고 하고 폄하했습니다.
그에 따라 힘없고 가난한 대다수 사람들은 돈이 없어 제사도 못 드리고 절기도 못 지키고, 또 글을 모르니 율법의 뜻과 규정도 따를 수 없어서, 저절로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에 따라 그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 밖에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죄의식과 죄책감 속에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당시 유대 사회는 사람이 만든 의인과 사람이 만든 죄인으로 넘쳐났습니다. 사람이 만든 의인은 바리새인처럼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18:11~12)라고 당당히 기도했습니다.
반면에 사람이 만든 죄인은 세리처럼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18:13)라고 기도하며 절망했습니다.
이와 같은 안타까운 당시 상황을 예수님은 잘 아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신 말씀 속에는 이런 상황을 알고계신, 역설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은 ‘나는 율법과 사람이 규정한 자칭 의인이 아닌, 율법과 사람이 규정한 소외된 죄인을 부르러왔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거짓 의인이 아니라,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참된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것입니다.

그때 율법과 성전당국과 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사람을 의인과 죄인으로 나누었던 그와 같은 잘못된 일이, 안타깝게도 오늘날 우리 일부 교회 안에 여전히 있습니다.
오늘날 어떤 교회와 목회자는 그렇게 동일하게 의인과 죄인을 만듭니다.
주일성수, 십일조와 헌금, 교회봉사, 교회건축, 목회자 섬김, 목회자에 대한 태도, 전도, 새벽기도... 이런 것들이 그 기준이 됩니다.
그래서 이런 기준에 부합하는 신자는 교회에서 의인으로 대접받고, 그렇지 못한 신자는 교회에서 대접받지 못하고 소외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는 십일조 죄인, 새벽기도 죄인, 전도 죄인, 교회봉사 죄인, 교회건축 죄인, 주의 종 함부로 대하는 죄인, 주의 일과 교회를 무너지게 하는 죄인이 만들어집니다. 
이렇게 오늘날 일부 신자들은 이런 불필요한 죄의식에 갇혀 있는데, 이런 분들은 자신의 구원도 무척 불안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반면에 교회에서 대접받고 인정받는 신자들은 별로 죄인 의식이 없습니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 인정받고 수시로 축복받고 또 중요한 교회 직분을 맡고 있기 때문에, 자신에 대한 의인 의식이 가득합니다. 구원의 확신도 차고 넘칩니다.
그래서 그런 그들의 영적으로 교만한 눈에, 세상은 죄로 가득한 타락한 세상으로 보이고, 세상 사람들은 그저 어리석고 못난 죄인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전도를 해도 형식적인 전도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의인들은 평소엔 그렇게 의인 의식으로 가득하다가도, 무슨 자신의 실수나 잘못이 나타나면 180도 달라집니다. ‘우리는 다 어쩔 수 없는 죄인이다. 비판하지 말고 은혜로 하자. 너는 죄 없냐?’ 그렇게 말합니다. 이렇게 그들은 상황에 따라 자칭 의인과 자칭 죄인을 오가며, 모순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깨어있지 않으면, 오늘날에 우리 교회 안에도 그런 악한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만든 의인과 사람이 만든 죄인, 자칭 의인과 자칭 죄인이 우리의 교회와 신앙을 어지럽힐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만들어진 의인이 되어선 안 됩니다. 목사, 장로, 권사, 집사, 찬양인도자, 청년회장... 그런 직책과 사역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지 못합니다. 또 설교와 헌금과 봉사와 헌신... 그런 일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지 못합니다. 목회자의 칭찬과 인정이 나를 거룩하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의로움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와야 합니다. 우리의 의로움은 오직 성령의 확신과 성경 말씀으로부터 와야 합니다. 우리의 의로움은 오직 삶과 열매로부터 와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교회 안에서 만들어진 자칭 죄인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십일조 죄인, 새벽기도 죄인, 전도 죄인, 교회봉사 죄인, 교회건축 죄인, 주의 종 함부로 대하는 죄인, 주의 일과 교회를 무너지게 하는 죄인 ... 이런 저런 불필요한 죄책감과 죄의식을 가지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불필요한 죄책감과 죄의식을 가지게 하고 우리 구원의 여정을 힘들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우리는 계속 믿음의 길을 힘차게 걸어갈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오직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우리는 계속 구원의 길을 회개하며 바르게 걸어갈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우리 성도님들은, 하나님 앞에서 의인과 죄인이 되심으로,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는 사람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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