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가시와 엉겅퀴

믿음찬교회 0 72 2023.10.22 11:48
가시와 엉겅퀴
히 6:4~8
2023.10.22.

오늘 본문은 경고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히브리서 안에서는 물론이고 신약성경 안에서 가장 강한 경고의 말씀 중 하나라 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이와 같은 말씀을 하는 이유를 우리는 압니다. 많은 유대인 신자들이 임박한 박해를 피해 유대교로 돌아갈 마음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경고의 말씀은 ‘아뒤나톤’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할 수 없나니...” 원문 성경은 이 말이 맨 처음에 강하게 나옵니다. 그래서 이것은 한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그러다가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할 수 없다는 강한 의미입니다.
그러면 이 타락은 어떤 타락일까요?
여기서 이 말씀은 도덕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이것은 신앙을 저버리고 배교하는 일을 가리킵니다. 스스로의 선택과 자기 결정에 의해, 예수 신앙을 저버리고 유대교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그렇게 신앙을 떠난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요?
네, 그들은 예수님께로 다시 돌아오지 못합니다. 그것은 그 일이 연약한 마음으로 잠시 주님을 부인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거두어지고 더 이상 회개의 은혜는 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떠난 자리에는 사탄이 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돌아오고 싶어도 돌아오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비극적인 예를 가룟 유다를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오랜 시간 자기 안에 있었던 자기 결정으로 예수님을 마침내 팔았습니다. 성령은 그를 떠나셨고, 그날 밤 그의 마음에는 사탄이 들어갔습니다. 다음날 그는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안에 회개의 능력은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습니다.
한편 오늘 본문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그들이 돌아올 수 없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그들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구원받아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저버린다면, 그들이 다시 돌아오기 위해선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이 다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돌아오지 못합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가 1세기 로마교회의 유대인 신자들을 향해 선포된 이 경고의 말씀을 자세히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네, 필요가 있습니다. 비록 상황과 여건은 다르지만, 배교는 어느 시대나 우리 신앙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박해와 고난만이 배교의 유일한 이유는 아닙니다. 그때는 박해와 고난 때문이지만, 오늘날은 다른 이유로 신앙을 저버릴 수 있습니다.
돈을 위해 신앙을 저버리고, 세상이 좋아서 신앙을 저버리고, 자유로운 삶을 위해 신앙을 저버리고, 영적인 무지와 자기 생각으로 신앙을 저버립니다. 혹 교회에 실망하거나 신앙의 이유를 찾지 못해 신앙을 저버리기도 합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배교는 현실의 주된 현상이 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그중에는 잠시 교회를 쉬는 가나안 성도들도 있지만, 아주 떠나는 사람도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신앙을 떠나도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편안하고 좋습니다. 주일날 교회 안 가도 되고, 목사의 설교도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내 생각과 판단대로 살아가면 되고, 무슨 일을 할 때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죄책감이나 죄의식도 없습니다. 우리를 몰래 나선 어린양처럼 편안하고 자유롭고 해방감마저 느껴집니다. 저의 어린 시절 교회 친구 몇몇도 지금 그렇게 하나님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유가 어떠하든 사연이 어떠하든,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다가, 하나님을 저버리고 가시와 엉겅퀴를 생산한다면, 우리에겐 밤이 찾아오고 구원을 잃어버리고 마침내 심판을 받습니다.
그래서 혹 불가피한 사정이나 마음의 갈등으로 교회를 떠나는 경우가 있더라도, 그 마음은 가룟 유다의 마음이 되어선 안 됩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전적으로 부인하거나 자기 결정적인 배교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방황이 멈추고 나의 의문이 풀리고 다시 하나님을 만난다면, 돌아오겠다는 최소한의 마음은 남겨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길은 길로 이어지고 돌아오기 어렵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 이 경고의 말씀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신앙을 저버리는 일이 확대되는 이 안타까운 시대 속에서, 우리는 이 경고의 말씀을 듣는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영적인 눈으로 볼 때, 우리가 걸어가는 길은 오직 한 길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생명을 얻은 우리는 그분의 나라로 들어가는 길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어린아이로 그 자리에 머물러도 안 되고, 신앙을 버리고 뒤로 돌아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주님이 가신 그 길로 계속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앞에 놓인 신앙의 길을 안이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큰 어려움이 닥칩니다. 세상과 악한 마귀는 언제나 그 길에서 그런 사람을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가는 우리는 오늘 말씀 6절과 7절처럼, 영적으로 땅이고 밭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는 땅과 밭을 가리지 않고 뿌려지지만, 우리는 세상 속에서 길가 밭이 되기도 하고 돌짝 밭이 되기도 하고 가시떨기 밭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가라지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은 영적인 실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히브리서 기자를 통해 말씀하시는 이 경고의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기는 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 경고의 말씀은 이렇게 두려운 내용인데, 그러나 이 경고의 말씀을 조금 다르게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경고의 말씀은 맞지만, 그러나 그렇게 걱정하고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한번 구원받은 신자는 결코 구원의 탈락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장로 교회들이 그렇게 가르칩니다. 그분들은 이 말씀을 대체로 이렇게 해석합니다.
첫째는, 이 타락한 사람들은 결코 구원받은 신자가 아니라고 해석합니다.
“이 사람들은 교회에는 왔지만, 아직 구원의 여정이 시작되지 않는 경계선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에게 한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 구원받은 신자들은 이 말씀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이렇게 말합니다.
두 번째는, 이 말씀은 실제가 아닌, 아직 일어나지 않았고 또 일어날 수 없는 가상적인 상황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래서 배교와 구원의 상실은 구원받은 신자에게 일어날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끝까지 신자들을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당의 학동이 천자문을 외우듯이, 다음 성경 말씀을 말합니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8)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롬8:39)
그래서 믿는 자들의 구원 상실 문제는 개연성은 있지만, 가능성이나 현실성은 없다고 힘주어 말합니다.
세 번째는, 이 말씀 전체를 비유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이 말씀은 전체가 구약을 배경으로 한 비유의 말씀이다. 한번 빛을 받고는 불기둥을 비유한다,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는 만나를 비유한다,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는 광야에서 하나님의 영이 임한 것을 비유한다, 선한 말씀은 모세를 통해 받은 율법을 비유한다, 내세의 능력은 그들이 광야에서 여러 이적과 기적을 체험한 것을 비유한다.
그래서 이 말씀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을 비유적으로 가리키는 말씀으로, 오늘날 우리와 직접 상관이 없다. 이 말씀은 다만 그들의 잘못된 모습을 따르지 말라는 경고의 말씀이다” 이렇게도 말합니다.
네 번째는, 이 말씀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읽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문자 그대로 읽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일차적으로는 문자적으로 읽고, 이차적으로는 문자를 넘어 의미로 읽고 비유로도 읽는다. 그런데 간혹 오늘 본문 같은 말씀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읽어야 한다.
가령 아들이 맨날 사고를 치고 문제를 저지르면, 하루는 그 아버지가 그 아들에게 ‘너 그러다간 큰일 나, 너 그러다가 죽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 아버지의 마음이 아들이 죽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러므로 이 말씀도 마찬가지다. 이 말씀은 실제로 구원을 잃어버린다는 말씀이 아니라, 그렇게 되지 말라는 경고의 말씀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을 너무 두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고, 다만 신앙생활을 잘하면 된다.” 네,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이상의 내용은 제가 이번 주에 설교를 준비하면서 찾아본 여러 설교들입니다. 대체로 이렇게 설교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그런데 이상의 해석이나 가르침들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 말씀의 대상을 비신자로 보건, 이 말씀의 상황을 가상이나 가정으로 보건, 이 말씀 전체를 비유로 보건, 이 말씀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읽거나 보건... 그 한 가지 공통점은 구원받은 신자는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너무 걱정 안 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교회 강단에서는 그렇게 설교를 하지만, 그러나 많은 성경 주석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이 사람들은 분명히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한번 빛을 받았다는 말은 그저 한번 빛을 받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그런 가벼운 의미로 이 말을 할 분도 아니고 할 이유도 없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여기서 한번이라고 하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한번 죽으셨다고 할 때의 그 결정적 한번을 의미합니다.
하늘의 은사와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았다는 말도 그저 살짝 맛을 보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 말을 그런 의미로 보는 것은 히브리서 기자에 대한 모독입니다. 이 말은 히브리서 기자가 2:9에서 말씀한 바와 같이,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셨다고 할 때의 그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주석은 히브리서 기자의 이 말씀을, 구원받은 신자를 가리키는 명백한 표현이라고 해석합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결론입니다. 누구나 이 말씀을 신학적 편견 없이 읽으면, 그런 결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구원받은 신자들입니다.

그러면 히브리서 말씀은 구원받은 신자도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강하게 말씀하는 것 같은데, 왜 지금 많은 교회와 설교는 이 말씀을 그런 의미로 보지 않고 이 말씀을 자꾸 순화하려는 걸까요?
그것은 그 배경에는 그렇게 말하는 신학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신학은 바로 칼빈주의입니다. 한국 교회는 장로교가 많은데, 장로교의 신학은 아시는 바와 같이 칼빈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칼빈주의는 우리의 구원을 오직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관점에서 봅니다. 다시 말해 칼빈주의는 우리의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선택과 작정과 예정에 달려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작정하시고 예정하시면 그 사람은 구원을 받는 것이고, 하나님이 선택 작정 예정하지 않으시면 그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이 없습니다.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이고, 하나님은 무조건적으로 우리를 선택하시고, 예수님은 택하신 자들을 위해 죽으시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불가항력적인 은혜를 주시고, 우리를 끝까지 견인하십니다. 구원의 시작도 하나님이고 구원의 완성도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칼빈주의 구원론은 하나님 중심적인 구원론이기 때문에, 구원의 탈락을 불가능한 일로 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실패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칼빈주의 구원론에 입각한 많은 교회와 설교들은 오늘 말씀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단지 경고일 뿐이야, 구원의 탈락은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아...”

그러나 여러분, 이 말씀을 칼빈주의라는 신학으로 해석하고 안심하기엔 오늘날 우리 신앙의 현실이 너무 어렵고 심각합니다. 어제까지 교회를 잘 다니던 사람이, 오늘 우리 공동체 안에서 보이지 않습니다. 어제까지 예수 잘 믿던 청년이, 오늘 세상으로 간다고 말하고 교회를 떠납니다. 어제까지 잘 있던 작은 교회가, 오늘 지나가는데 보면 사라졌습니다.
그것이 지금 우리 믿음의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런 잃어버린 사람을 보면서, 남은 우리끼리 다독이며 이렇게 말해야 할까요? “그 사람들은 본래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야”
네, 너무 비정한 말인 것 같습니다. 너무 사랑이 없는 말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말하게 되는 것은 칼빈주의 구원론이 그렇게 비정한 구원론이기 때문입니다. 칼빈주의는 이중예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누구를 구원으로 예정하셨고, 누구를 유기로 예정하셨다고 말합니다. 선택과 유기... 이렇게 하나님은 사람을 예정하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칼빈주의는 예정은 운명과 다르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신자이건 불신자이건 배웠든 안 배웠든 누가 생각해도 칼빈주의의 예정은 거대한 운명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지옥에 가는 사람도 사실은 자기가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그를 선택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속죄도 없고, 불가항력적인 은혜도 없고, 견인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도 교회는 이런 칼빈주의 구원론 교리를 내부적으로 잘 간직해 왔습니다. 모순적이고 불합리하고 설명하기 어려운 면이 있지만, 그 신학은 다른 좋은 장점이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예수님의 속죄가 어떤 속죄인지, 원죄가 무엇인지,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이런 내용들을 체계적으로 잘 설명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칼빈주의는 그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체계적인 좋은 신학이기 때문에 지금도 주된 신학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칼빈주의가 아무리 좋은 신학이어도 하나님의 말씀 위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오늘 히브리서 말씀이 만약 구원받은 신자라도 탈락할 수 있다고 말씀하는 것이 맞다면, 우리는 이 말씀을 칼빈주의 신학으로 가려서는 안 됩니다.
아울러 신학의 줄기를 보더라도, 칼빈 위에 어거스틴이 있고 어거스틴 위에 바울이 있고 그리고 바울이 있는 곳에 히브리서 기자도 있다면, 이 말씀을 칼빈주의로 가리는 것은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칼빈주의 신학 전체를 무조건 맹신하기보다는, 그 신학이 설명할 수 없는 불가피한 모순이나 불합리한 점을 고민해야 합니다.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칼빈주의의 가장 곤란한 점은 하나님의 이중예정입니다. 하나님이 누구는 천국으로 예정하시고, 하나님이 누구는 지옥으로 예정하셨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설령 그것을 교회 안에서는 그저 믿음으로 말하고 넘어간다고 하더라도, 오늘날 우리는 그것을 교회 밖에서 일반 사람들에게 도저히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이중 예정의 하나님을 누가 사랑의 하나님으로 생각할 수 있을까요? 그런 독단적인 하나님을 누가 좋게 주권적인 하나님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그런 하나님을 전한다면, 누가 그런 하나님을 쉽게 믿을 수 있을까요?
그러므로 우리는 칼빈주의 신학을 존중하되, 그 신학 안에서 하나님을 잘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수정된 생각을 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신학은 발전하고 있고, 그런 면에서 그 신학은 400년이 된 어쩌면 낡은 옷입니다. 그 낡은 옷을 숭상하며 계속 입는 것은 보기 안쓰러운 일입니다.
칼빈도 사람입니다. 뛰어난 신학자이고 종교개혁가이지만, 그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칼빈주의를 무조건 신봉하기보다는, 시간 속에 낡아진 것을 고치고... 그렇게 잘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조금 길게 칼빈주의와 예정론에 대해 말씀드렸지만, 이 말씀을 드린 이유는 무척 간단합니다. 오늘 히브리서 말씀을 칼빈주의 해석의 시각으로 보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단순한 경고의 말씀으로 가볍게 여기지 말고, 진짜 경고의 말씀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히브리서 기자는 로마교회에 있는 대다수 유대인 신자들에게 이 편지를 쓰면서 진짜로 경고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만약 배교하고 떠난다면, 너희는 돌아올 수 없는 길로 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하지 말라, 예수님의 십자가를 욕되게 하지 말라” 그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 편지 후 로마교회에는 환난과 박해가 닥쳤습니다. 네로는 그 시대 속에서 로마의 기독교인들을 자신의 정치적 희생양으로 삼았습니다. 어떤 이는 배교를 했고, 어떤 이는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을 동일한 위기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여기 계신 한분 한분은 결코 예수님을 떠나지 마시길 바랍니다. 갑자기 건강을 잃어도, 갑자기 사업이 실패해도, 갑자기 환난이 닥쳐와도, 갑자기 가난하게 되어도... 예수님을 떠나시면 안 됩니다.
갑자기 지적인 방황이 찾아오고, 갑자기 불신앙적인 마음이 생기고, 갑자기 과학이 무슨 말을 하고, 갑자기 세상이 무슨 말을 해도... 예수님을 놓치시면 안 됩니다.
성경에 나오는 가장 슬픈 말씀 중 하나는 이것입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감옥에 갇힌 노년의 사도 바울은 함께 사역했던 데마가 신앙을 저버리고 떠나는 것을 그렇게 쓸쓸하게 바라보았습니다. 바울이 얼마나 간절히 설득했을까요? 그러나 데마는 떠났습니다.
데마와 같이 신앙을 떠나는 것은 우리의 전부를 잃는 일입니다. 살기는 살지만, 빈껍데기로 사는 일입니다. 그리고 밤이 찾아오고 죽음이 가까이 오면, 우리는 부모도 없고 돌아갈 집도 없는 슬픈 아이가 됩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이 말씀을 기억하심으로 이 어렵고 어두운 시대 속에 끝까지 주님을 따라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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