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1)

믿음찬교회 0 81 2023.10.16 13:03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1)
막 2:13~17
2023.10.13.

마가복음을 통해 예수님의 생애와 말씀을 차례대로 살펴보는 것은 기쁘고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예수님의 생애와 말씀만큼 우리에게 큰 의미와 빛을 비춰주는 것이 없습니다. 문학도 좋고 음악도 좋고 미술도 좋고 철학도 좋지만, 예수님의 생애와 말씀 앞에서는 작고 희미한 빛일 뿐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매주 금요기도회 시간에 마가복음을 살펴보는 것은 하나님의 큰 은혜인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계속해서 큰 의미와 열의를 가지시고 마가복음 말씀을 살펴주시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으로 들어가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크게 3가지입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레위를 부르신 것, 둘째는 레위의 집에서 세리 및 죄인들과 식사를 하신 것, 셋째는 식사하시면서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말씀하신 것.
오늘 설교는 이 3가지 내용 중에서 첫 번째 내용은 편의상 넘어가고, 둘째와 셋째 내용에 집중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레위의 집에서 세리 및 죄인들과 식사 하신 것, 그리고 그때 말씀하신 내용을 중심으로 은혜와 교훈을 생각하자 합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님이 세리 및 죄인들과 식사하신 일을 주목하는 분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대체로 그것을 예수님의 일상적인 일로, 혹은 예수님이 그런 사람들도 편견 없이 가까이 한 사랑의 행위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예수님의 단순한 일상이나 단순한 사랑의 행위로 보기엔... 좀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마가뿐 아니라 마태와 누가도 다 이 사건을 빠뜨리지 않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 복음서는 똑같이 중풍병자 사건에 이어서 레위 집에서의 식사를 말하고 이어서 금식 논쟁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볼 때, 예수님께서 레위의 집에서 세리 및 죄인들과 식사하신 일은  단순한 일이나 사건이 아닌, 어떤 의미가 담긴 중요한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예나 지금이나 식사를 함께 한다는 것은 무척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물론 단순히 밥 한번 먹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러나 정식으로 함께 식사를 한다면 그것은 결코 단순한 의미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이사야서 5장을 보면 왕과 귀족과 장군들이 함께 연회를 가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때 남유다 왕국은 위정자들이 국가주도의 농업 정책과 무역 정책을 펴고, 거기서부터 나오는 막대한 이익과 부를 왕과 귀족과 장군들이 독점하고 있었습니다. 그 정책으로 인해 백성들은 갈수록 피폐해지고 가난해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정책으로 부를 쌓고 연회를 베풀며 악의 카르텔을 형성하고, 가난한 백성을 돌보라는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호화로움과 많은 무리와 떠드는 것과 즐거워하는 것이 다 스올의 입에 빠질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이렇게 그들의 연회는 단순히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닌, 악한 이익과 부를 함께 나누고 결속을 다지는 고도의 정치적인 행위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식사를 하고 연회를 한다는 것에는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예수님께서 세리 및 죄인들과 식사하시는 것도 일상적이거나 단순한 의미가 아닙니다. 만약 그런 단순한 일이라면 성경에 굳이 기록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말씀드린 바와 같이 마가나 마태나 누가가 그것을 다 일련의 순서 속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중풍병자 사건에 이어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죠.
그러므로 이 식사는 죄 사함을 받은 사람이라면 이제 예수와 함께 먹는 한 식구가 된다는 영적인 의미가 됩니다.
그리고 나아가 그것은 유대 사회가 배척하고 정죄한 그들의 죄를 예수께서 용서하고 받아들여 그들과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신다는 정치적인 의미도 됩니다.
아울러 예수와 함께하는 그 식사는 궁극적으로 장차 우리가 참여할 그날의 혼인 잔치를 가리키는 종말론적인 의미까지 내포하기도 합니다.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즐거운 잔치와 같은 곳이죠.
그런 점에서 당시의 종교적 규범인 금식은 더이상 우리 신앙의 중심이 될 수 없는 낡은 것이고, 따라서 준수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 복음서는 이와 같은 많은 의미 속에 이 사건들을 차례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자리에 있던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은 세리 및 죄인들과 먹는 예수님의 행위에 대해 반발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그 행위에 담긴 모든 뜻을 다 알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예수께서 그들을 용서하고 받아들여 새로운 무리와 공동체를 형성하려 하고, 그렇게 함으로 자신들이 세운 율법적 사회와 질서를 어지럽히고 흔든다는 사실만은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말합니다.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이와 같은 그들의 문제 제기에 대해 예수님은 우리가 잘 아는 말씀으로 대답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여기서 첫 번째 말씀은 당시 잘 알려진 속담입니다. 두 번째 말씀이 중요한데,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여기엔 이중적인 의미, 즉 일반적인 의미와 역설적인 의미... 2가지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오늘은 우리가 일반적인 의미만 살펴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의인을 부르지 않고 죄인을 부르신다’는 말씀의 의미는 문자 그대로 ‘의인은 배제하고 죄인만 부르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의인보다는 죄인을 우선적으로 부르신다’는 강조의 의미로 이해됩니다.
성경에는 이런 식의 표현들이 가끔 있습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6:6)
그러므로 이렇게 볼 때, 이것은 우리가 잘 아는, ‘예수님께서 죄인인 우리 모두를 부르신다’는 일반적인 의미입니다. 

세리는 잘 아시다시피 당시 죄인의 대명사입니다. 그들은 자기 민족에게 무거운 세금을 거두어 로마에 바친 후 남은 것은 자기들이 먹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자들까지 받아들인다는 것은 어떤 죄인이라도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만 하면, 어떤 죄인이라도 예수님의 한 식구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잘 아는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크신 은혜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의 부르심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단순히 ‘자신에게 나아오라’, 혹은 ‘교회에 출석하라’는 의미일까요? 우리는 이 부분을 잘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분들은 그저 예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부르신다는 것만 알 뿐, 그 부르심이 어떤 부르심인지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네, 이것은 단순히 ‘오면 된다’는 부르심이 아니라, 회개의 부르심입니다.
누가복음이 그것을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2)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회개의 부르심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잘못된 죄와 과거를 청산하고 그분에게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죄인이든지 용서받고, 그분의 자녀와 새로운 공동체 일원이 되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습니다.

한편 그분의 부르심은 이렇게 회개의 부르심인데, 여기서 의미하는 회개는 단회적인 회개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의 삶은 그렇게 무 자르듯 한 번에 변화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잘못된 모습을 예수님을 통해 평생 고쳐나갑니다. 그것이 중생과 회개의 개념입니다.
바울도 그런 생애를 살았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다메섹 도상에서의 극적인 회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회심과 회개는 거기서 완성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나중에 디모데전서를 쓰면서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현재형으로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늘 그렇게 고백하며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생에 걸쳐 거듭나고 중생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면서 우리는 점점 성화 됩니다. 그렇게 우리는 점점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이 어떤 의미인지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우리의 과거를 청산하고, 예수님께로 가야 합니다.
아울러 그런 우리의 새로운 출발과 순종은 우리의 삶 가운데 지속적으로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혹 때로 어려운 죄를 짓고 넘어질 때가 있더라도, 언제나 주님의 부르심을 듣고 즉시 회개하고 새롭게 출발하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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