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

믿음찬교회 0 112 2023.10.09 16:56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
히 5:1~10
2023.10.08.

지난 주일 살펴본 말씀을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우리의 큰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는 분이십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것을 그분의 가장 큰 특징으로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그분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야 한다고 권면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와 같은 지난주 말씀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을 구약의 제사장들과 비교하면서 예수님이 그들과 어떤 면에서 같고 어떤 면에서 다른지... 그리고 우리의 연약함을 어떻게 동정하시는지... 자세히 말씀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어떤 대제사장인지 알고 깨닫는 시간이 되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1~4절은 구약의 일반 대제사장에 대한 히브리서 기자의 설명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의 대제사장에 대해 다음 3가지 내용을 말씀합니다.
1절, 대제사장은 사람 가운데에서 택한 자로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제를 드린다. 2~3절, 대제사장은 자신도 연약함을 가지고 있으며 그래서 자신을 위하여도 속죄제를 드린다.
4절, 대제사장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다.
여기서 1~3절까지 내용은 대제사장이 사람들의 속죄와 거룩함을 위하여, 또 자신의 속죄와 거룩함을 위하여 제사를 드리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말씀을 잘 읽어보면, 여기에 좀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대제사장이 사람 가운데 택한 자로 세워졌지만, 그는 완전한 사람이 아니며 자신의 연약함을 안고 그 직무를 수행한다는 사실입니다. 죄인인 연약한 대제사장은 동일하게 죄인인 연약한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제사장이 사람들과 깊은 동질성과 연대성을 가지고 그 일을 수행한다는 의미입니다.
사람들과 깊은 동질성과 연대성을 가지고 있는 대제사장... 히브리서 기자는 지금 그런 대제사장의 모습을 1~3절까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내용은 우리가 구약 성경을 읽을 때, 쉽게 발견할 수 없는 특별한 내용입니다. 대체로 우리가 구약 성경을 읽을 때, 제사장과 제사장직에 대해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일반적인 특징은 거룩함입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 중 네 형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나아오게 하여, 나를 섬기는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되... 거룩한 옷을 지어 영화롭고 아름답게 할지니... 그를 거룩하게 하여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출28:1~3)
“제사장은 자신을 더렵혀 속되게 하지 말지니라. 머리털을 깎아 대머리 같게 하지 말며 자기의 수염 양쪽을 깎지 말며 살을 베지 말고...”(레21:4~5)
“너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세워 제사장 직무를 행하게 하라. 외인이 가까이 하면 죽음을 당할 것이니라”(민3:10)
이렇게 구약의 여러 말씀은 제사장과 제사장 직무를 말하면서, 그들과 그들의 직무는 거룩하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가 오늘 본문 1~3절에서 제사장에 대해 말씀하는 내용은 단순히 그와 같은 제사장의 거룩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이 백성들과 영적으로 깊은 관계와 연대성을 가지고 그 직무를 수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제사장은 분명 거룩하지만 그러나 한편으론 백성들과 동일한 모습으로, 그런 동질성과 연대성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는 사실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지금 여기에 중요한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이 내용은 히브리서 기자가 구약의 말씀을 매우 깊이 있게 해석하는 중요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기자는 4절을 말씀합니다. 4절은 하나님이 제사장을 직접 세우신다는 내용을 말씀합니다.
이렇게 히브리서 기자는 1~4절까지 제사장과 제사장직을 설명합니다.

이어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와 같은 1~4절까지 내용을 바탕으로, 이제 5절부터 예수님의 대제사장직을 설명합니다.
5절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이 구약의 제사장들을 세우신 것처럼, 하나님이 예수님을 대제사장으로 세우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님을 단순히 구약의 대제사장으로 세우시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매우 다른 특별한 제사장으로 세우셨습니다.
어떤 점에서 본질적으로 매우 다르고 더 특별하신가?... 히브리서 기자는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두 개의 시편 말씀을 인용합니다. 시편 2편과 시편 110편입니다.
시편 2편 말씀은 이렇습니다.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이 말씀은 왕이신 메시아에 대한 예언입니다. 왕이신 메시아에 대해 예언한 말씀이지, 제사장이신 메시아에 대해 예언한 말씀이 아니죠.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놀랍게도 이 말씀을 제사장이신 예수님에 대한 말씀으로 해석하고 가져옵니다.
얼핏 생각하면, 아주 잘못된 성경 해석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가 우리보다 성경을 모르거나 실수할 리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럴까요?
네, 히브리서 기자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왕 같은 제사장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왕이면서 동시에 제사장이십니다. 그래서 그 예언 말씀을 여기에 가져올 수 있습니다.
이어서 히브리서 기자는 시편 110편 말씀을 인용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증명합니다.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여기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랐다는 말씀은 어떤 의미일까요? 이것은 쉽게 말해, 예수님이 멜기세덱의 제사장 모델을 따랐다는 의미입니다.
이 내용을 조금 더 설명드리겠습니다. 여러분, 구약에는 크게 보면 2종류의 제사장이 있습니다.
하나는 레위 지파의 아론과 그의 후손들입니다. 일반적인 제사장들이죠.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그들을 제사장으로 세우셨습니다.
다른 하나는 모세와 아론보다 훨씬 이전 인물인, 아브라함 시대의 멜기세덱입니다. 멜기세덱은 창세기 14장에 갑자기 등장해서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신비한 인물인데, 아무튼 창세기 말씀은 그 사람을 살렘 왕이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자 아브라함을 축복한, 즉 아브라함보다 더 높은 인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멜기세덱은 왕이면서 동시에 제사장인 특별한 인물로 성경에 나오고 있습니다.
한편 ‘반차’라는 말은 말 자체로는 순서, 계열, 계승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 말씀에서 ‘반차’는 그와 같은 일반적인 의미를 넘어선 보다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랐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단순히 멜기세덱을 계승하거나 그 계열의 후손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멜기세덱과 같은 왕이자 제사장이신 모델 혹은 그러한 본질을 따랐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지금 히브리서 기자는 시편 2편과 110편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왕 같은 특별한 제사장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히브리서 기자는 5절과 6절을 통해, 예수님을 첫 번째로 하나님이 세우신 대제사장으로 말씀하고, 그리고 두 번째로 왕 같은 특별한 제사장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어서 히브리서 기자는 7절과 8절을 말씀하는데, 히브리서 기자는 여기에서 예수님의 세 번째 대제사장의 모습을 말씀합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여기에서 말씀하는 예수님의 세 번째 대제사장의 모습은 무엇일까요?
힌트는 1~3절에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여기서 예수님의 세 번째 대제사장의 모습을 말하기 위해, 1~3절에서 미리 그와 같은 구약의 대제사장의 모습을 말했습니다.
네, 예수님은 세 번째로 우리와 같은 동질성과 연대성을 가진 대제사장이십니다.

말씀드린 바와 같이, 구약의 제사장들은 거룩하지만 그러나 동시에 백성들과 동질성과 연대성을 가지고 그 직무를 수행했습니다. 즉 백성들과 깊은 영적인 관계와 연결 속에 그 직무를 수행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제사장이든 신약의 예수님이든... 제사장의 본질은 죄인인 사람들과의 차별성이나 거룩함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인인 사람들과의 동질성에 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은 아주 묘한 이중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거룩하고, 한편으로는 백성들과 동일하고... 한편으로는 구별되고, 한편으로는 백성들과 한 몸이 되고... 제사장은 그렇게 사역을 감당한다고 히브리서 기자는 말씀합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그런 구약의 대제사장의 모습이 예수님에게서 온전히 성취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시기 위해 온전히 사람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육체가 되셨고, 마리아의 몸에서 나시고,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자라고,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과 어려움을 겪으셨습니다. 7절 말씀은 바로 그와 같은 예수님의 모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7절 말씀은 단지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님이나 십자가 위에서의 예수님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성육신하신 이 땅에서의 삶 전체를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모양과 육체로 오셔서, 어렵고 힘들 때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때로는 통곡으로 때로는 눈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약의 대제사장이 연약한 자기 자신을 위해 속죄하고 백성들과 같은 동질성과 연대성 속에 하나님께 나아간 것처럼, 예수님도 비록 죄는 없으셨지만 사람들과 같은 모습과 같은 어려움 속에 자신을 두시며 그런 동일한 대제사장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만히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의 삶은 정말 왕으로서의 삶과 동시에 제사장으로서의 삶인, 그런 양면성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은 때로는 왕처럼 말씀하시고 행동하시고, 때로는 제사장처럼 말씀하시고 행동하셨습니다.
8절은 계속해서 말씀합니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그러니까 예수님은 높은 자리에서 거룩한 옷을 입고 제사를 드리는 그런 화려한 대제사장이 아니라, 우리와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우리의 연약함을 짊어지시는 초라한 대제사장적인 삶을 사시고, 마침내 십자가로 그 삶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런 과정을 통과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늘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며, 늘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며, 늘 우리에게 때를 따라 돕는 은혜의 보좌로 역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 중요한 말씀은 1~3절, 그리고 7~8절입니다. 우리와 같은 모습이 되신 예수님의 대제사장적인 삶... 히브리서 기자는 이 내용을 지금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물론 이 내용은 새로운 내용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대제사장적인 삶... 혹 이 말 자체는 처음 들을 수 있고 새로울 수 있지만, 교회를 다니는 신자 중에 예수님이 이 땅에서 그런 삶을 사셨다는 사실을 처음 듣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귀한 내용을 단순히 아는 것과 깊이 아는 것은 매우 다릅니다. 단순히 아는 것은 내 안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그러나 깊이 아는 것은 내 안에 들어옵니다. 내 안에 들어와 정신이 되고 철학이 되고 신념이 되고 믿음이 됩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같은 동질성과 연대성 속에 우리와 같은 어렵고 힘든 동일한 삶을 사셨다는 것은 우리의 단순한 신앙 지식이 되어선 안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깊이 알아서, 우리의 정신이 되고 철학이 되고 신념이 되고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족하나마, 그와 같은 예수님의 발자취를 쫓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전하고 사역을 하는 목사님들이 먼저 이런 정신과 믿음을 깊이 가져야 하죠. 대체로 많은 목사님들은 구약의 제사장을 좋아합니다. 목사직이 구약의 제사장직과 많이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목사님들 가운데 백성들 앞에 서서 영광스럽게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제사장은 알아도, 히브리서가 말씀하는 이와 같은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큰 교회 높은 단상 위에서 청중을 좌지우지하고 사람들의 추앙을 받는 그런 큰 목사님들이 어쩐지 생소합니다. 거기에 예수님의 모습이 있는가...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누구는 교단장도 되시고 누구는 한국교회도 대표하시고 누구는 국가조찬기도회에 가서 설교도 하셔야 하겠죠.
그러나 그런 유명하고 교회를 대표하는 목사님들이라 할지라도 자신을 거룩하게 하고 미화하고 차별화하기보다는 자신을 낮추고 신자들과 같은 동질성과 연대성을 가질 때, 거기에 예수님의 모습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선교사님들도 이런 정신과 믿음을 깊이 가져야 합니다. 어려운 선교지에 가서 예수님처럼 그곳 사람들과 어울리며 사역하시는 선교사님들은 정말 귀한 분들입니다. 저는 문화가 다르고 음식이 다르고 생활도 힘든 선교지에 갈 자신이 많이 없습니다. 그래서 정말로 현지에서 사람들과 어울리고 적응하고 사역하시는 선교사님들을 보면 참 존경스럽습니다.
처음에 한국에 복음을 전해준 선교사님들은 모두 그렇게 훌륭하신 분들이죠. 그러나 가끔 그런 선교사님들의 지금 남아있는 선교사 사택을 보면, 좀 묘한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일전에 대구에 갔을 때 대구 서문시장에서 가까운 청라언덕에 대구에서 제일 오래된 교회가 있는데, 그 교회 옆에 작은 공원이 있고 거기에 선교사 사택 몇 채가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대구는 중심지에 그런 유서 깊은 기독교 유산을 가지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선교사 사택은 멋진 서양식 건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저는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때 선교사들이 그런 집에 살았을 때, 우리 한국 사람들은 어떤 집에서 살았을까?...’
그래서 그저 제 생각이지만, 그때 선교사님들이 그런 크고 멋진 집이 아니라, 좀 작고 소박한 집에서 살면서 사역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해봤습니다. 초기 선교사분들 중에는 더러 한국인 신자에게 고압적인 분들도 있었죠. 물론 대부분은 당시 가난했던 한국 사람을 존중하고 아름답게 사역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우리의 신분이 목사나 선교사를 떠나서, 예수님을 믿는 우리 모두가 깊이 생각해야 할 말씀입니다.
지금 세상은 모든 면에서 점점 차별화가 심화되고 있습니다. 위는 위로 굳어지고, 아래는 아래로 굳어지고 있습니다. 위에 사는 사람은 계속 자기들만의 세상에서 살려고 하고, 자기가 사는 세계의 아래로 내려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강남에서 사는 사람은 강남에서 계속 살려고 하고, 혹 강남 밖으로 이사 가게 되면 큰일이 나는 줄 안다고 합니다.
연예인들도 계층이 있다고 하고, 배우와 모델들도 다 급이 있고 계층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 지위에 걸맞는 대우를 받지 못하면, 큰 사단이 난다고 합니다.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도 부모가 누구냐에 따라 다 같은 학생이 아니고,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도 다 같은 아이들이 아니라고 합니다. 지금 우리는 그런 세상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와 같은 세상 현실을 좌절할 필요도 없고 혐오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조용히 그런 세상과 결이 다른 삶을 살고, 조용히 우리의 능력에 알맞은 삶을 살아가면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렇게 차가워지고 차별화되는 세상 현실과 다른 결을 가지고, 그리고 아래로 내려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어서 많은 복을 받고 자꾸만 위로 올라가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물처럼 낮은 곳으로 흐르고 그런 정신을 갖고 그런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이 나보다 높은지 낮은지 평가하고 거기에 따라 행동하고... 나보다 높은 사람에겐 조심하고 나보다 낮은 사람에게 함부로 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세상의 방식이지 예수님의 방식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잔치 자리에 가면 낮은 자리에 가서 앉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신앙 정신을 가져서 낮은 곳으로 나아가고, 또 언제든 낮은 곳으로 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일부러 의도적으로 억지로 그렇게 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이 사상이 되고 정신이 되고 태도가 되어 자연스러운 삶으로 그렇게 하자는 말씀입니다.

정치지도자 중에 사람들을 속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신이 지도자가 되면, 큰 일을 하고 큰 사역을 하고 큰 변화를 가져오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선거 때만 되면 시장에 와서 떡볶이도 사 먹고 튀김도 사 먹고 어묵도 사 먹습니다. 그분들이 왜 그런 일을 할까요? 네, 참은 낮은 곳에 있다는 진리를 그분들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라기는 우리나라의 많은 정치인들이 가끔 한 번씩 시장에 와서 그렇게 할 것이 아니라, 참으로 낮은 곳을 아는 훌륭한 지도자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님을 본받아 낮은 곳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돈을 많이 벌고 열심히 노력해서 높은 자리에 올라도, 낮은 곳을 아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열심히 살고 정직히 노력하며 산 결과가 비록 힘들고 가난해도, 높은 곳을 바라보지 않고 부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감사하고 자족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런 자를 복되다 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한층 더 가깝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잘 살아도 낮은 곳을 바라보고, 못살아도 낮은 곳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신앙이 되고 정신이 되고 삶의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과 결을 같이 하고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참으로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라고 부르고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런 복된 은총 안에 여러분과 제가 있기를 원합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 성경을 깊이 해석하면서 우리가 잘 몰랐던 대제사장의 모습을 말씀합니다. 사람 중에서 택함을 받아 자신의 연약함 속에 사람을 위하여 사역하는 대제사장... 그런 대제사장의 낮고 아름다운 모습은 예수님을 통해 온전히 성취되었습니다.
아무쪼록,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그런 귀하신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사역을 통해 구원의 은총과 복을 누리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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