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중풍병자 사건 (1)

믿음찬교회 0 231 2023.09.26 14:25
중풍병자 사건 (1)
막 2:1~12
2023.09.22.

하나의 성경본문은 그 본문 자체의 의미도 있고, 동시에 전체 흐름 안에서의 의미도 있습니다. 그것은 해석의 기본이죠. 본문을 보고 문맥을 보고... 이렇게 해석자는 이 둘을 동시에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본문은 중풍병자 사건인데, 이 사건은 본문 자체의 의미도 있고 동시에 마가복음 전체 흐름 안에서의 의미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잘 볼 때 이 사건의 의미를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는 먼저 오늘 본문을 마가복음 전체 흐름 안에서 살펴보고, 은혜와 교훈을 생각하고자 합니다.

이 마가복음 2장의 중풍병자 사건은, 우리가 얼핏 보면, 예수님의 병자 치유 사건의 하나로 보게 됩니다.
1장 중반 이후 예수님께서는 계속 병자들을 치유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시몬의 장모와 가버나움 사람들을 치유하셨고, 갈릴리의 많은 사람들과 한 나병환자를 치유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이어지는 오늘 본문은 마가복음이 계속 예수님의 치유 사건을 말씀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 본문과 앞뒤 문맥을 잘 살펴보면, 우리는 여기서 마가복음이 사실 새로운 내용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예수님의 중풍병자 치유 사건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중풍병자 치유 사건을 통해 어떤 중요한 내용을 말씀한다는 것이죠. 이 사실은 우리가 오늘 본문 자체를 봐도, 또 앞뒤 문맥을 봐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우선 오늘 본문을 읽어봐도 이 사건의 초점은 중풍병자 치유가 아닙니다.
중풍병자 치유라면 중풍병자가 이야기의 중심에 있어야 하겠죠. 그렇지만 이 중풍병자는 한마디 말도 없습니다. 그저 침상에 실려 왔다가 마지막에 자기의 침상을 들고 나가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이 치유 기적은 그 자체의 중요성보다는 다른 뭔가를 위한 입증의 수단이 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치유 사건의 초점은 중풍병자 치유에 있지 않고 어디에 있을까요?
네, 그것은 바로 이 사람을 치유하시면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자기주장에 있습니다. 여기에 본문의 중심과 초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실로 엄청난 말씀을 하십니다.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만약 이 말씀의 의미가 ‘당신은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았다’고 선언하는 말이라면 괜찮습니다. 제사장들은 그런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래도 예수님은 제사장이 아니기 때문에 율법적으로 문제 되는 발언을 하신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발언은 그런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현장의 서기관들도 그런 의미 정도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예상은 맞았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알게 하려 하노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지금 여기에서 직접 죄를 사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만약 자신의 앞날과 안전을 생각하신다면 결코 해서는 안 될 말씀입니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죄를 사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건 하늘에 속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일을 ‘내가’ 그리고 ‘여기서’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와 같은 말씀의 배경엔 사실 다니엘서가 있습니다.
다니엘서 7장엔 인자 같은 이가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백성과 나라들에 대한 영원한 권세와 영광을 받는, 놀랍고 중요한 예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다니엘서의 예언을 지금 자신에게 적용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예언의 성취를 당시 사람들은 알 수 없었습니다.
아무튼 예수님은 이런 파격적인 발언을 하셨고, 여기에 대해서는 2가지 반응이 가능합니다.
첫째는 ‘미쳤다’입니다. 미쳤다고 보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입니다.
둘째는 ‘신성모독’입니다. 제정신으로 그렇게 말했다면 그것은 신성모독이고 그 결과는 당시로선 사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정신으로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서기관들은 그것을 신성모독이라고 생각했고, 그런 서기관들의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거기에 그치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의 발언을 발언으로만 그치지 않고, 불에 기름을 붓듯 중풍병자를 치유하신 것입니다. 그 놀라운 치유의 기적은 자신이 방금 한 말이 맞다는 사실을 입증합니다.
그리고 나아가 예수님의 이와 같은 일련의 발언과 행동은 결국 불가피한 한 가지 사실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당시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사죄를 대리한다고 하면서 온갖 부정과 부패 속에 군림했던 종교지도자들과 성전당국에 대한 도전이자 선전포고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여기서부터 피할 수 없는 사실이 됩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자신의 죽음을 알고 계셨고 작정하고 계셨습니다.

성경을 보는 어떤 일부 사람들은 역사적 예수를 당시 사회를 개혁하려고 시도하다가 실패한 개혁가나 혁명가로 봅니다. 그들은 그렇게 예수님을 역사 속에 있었던 수많은 실패한 개혁가의 한 명으로 격하시키고 낮추어 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시 세상 속에서 뭔가 개혁을 해보려고 했는데 그만 그 일이 뜻대로 잘 안되어서 실패한, 그래서 처형된 안타까운 인물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예수님은 처음부터 자신의 죽음을 알고 작정하고 그 길을 걸으신 분입니다. 하다가 실패하신 분이 아니라, 처음부터 십자가를 향해 가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런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은 이제 중풍병자 사건에 이어 세리 및 죄인들과 어울리는 사건을 말하고, 또 이어서 금식 논쟁과 안식일 논쟁 사건을 연속적으로 말합니다. 마가는 이 내용을 2장과 3장에 걸쳐 자세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사건 하나하나는 모두 당시 성전 및 율법 체제의 근본과 그 근본 가르침을 흔드는 매우 위험한 일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일련의 일들의 결과는 마침내 3:6 말씀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그러므로 이 중풍병자 사건은 이와 같은 마가복음의 문맥상에서 볼 때, 단지 중풍병자 치유의 기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을 설명하는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와 같은 예수님을 보여주고 있는 오늘 말씀에서 어떤 교훈을 발견해야 할까요?
네, 우리는 여기서 부패한 제도와 성전 권력에 거침없이 맞서는 예수님의 모습, 죽음을 작정하고 십자가로 나아가는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해야 합니다.
여러분, 믿는 우리들이 세상과 삶 속에서 얼마나 나약하고 비겁질 때가 많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 하지만 힘과 권력과 물질에 얼마나 약하고 수시로 타협하는지 모릅니다. 해야 될 말을 안 하고 못 하고... 행동해야 할 때 안 하고 못 하고... 그 반대로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오히려 버젓이 하고... 그러면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는다면, 비겁한 사람이 되어선 안 됩니다. 우리는 정치적으로 처신하거나 이익에 좌우되지 않고, 말해야 할 때 말하고 행동해야 할 때 행동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일을 크고 거창하게 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참되지 않은 일에 조용히 ‘아니’라고 하는 사람이 되면 되고, 올바르지 않은 곳에서 조용히 걸어 나오는 사람이 되면 됩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단지 구원의 십자가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와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하나님의 정의의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어렵더라도 진실을 말하고 진실을 따라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님처럼 그렇게 온전히 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능력 안에서, 우리의 믿음 안에서... 그런 힘과 용기를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귀하게 여겨주시고 복된 손길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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