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불신앙과 안식

믿음찬교회 0 30 2023.09.17 11:52
불신앙과 안식
히 3:12~4:11
2023.09.17.

히브리서라는 어려운 말씀을 살펴보고 계시는 우리 성도님들에게 하나님께서 사랑과 은총을 풍성히 내려주시길 빕니다. 히브리서가 어렵다는 것은 단순히 내용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히브리서가 말씀하는 신앙의 길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약이든 신약이든 우리에게 만족을 주는 말씀을 골라서 들을 수 있죠. 히브리서 안에도 그런 말씀은 꽤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성경이든 그 말씀을 처음부터 잘 읽어보면, 거기엔 현실 속에 한결같은 신앙의 길이 보입니다. 우리의 죄와 잘못은 순식간에 다 용서되고, 예수만 조금 믿으면 하나님의 모든 은혜와 복을 다 받고 천국에 도착하는... 그런 동화 같은 신앙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어려운 길을 가고 안으로는 죄를 극복하고 밖으로는 의롭게 살며, 참된 신앙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물론 그 안에 소망과 행복과 기쁨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히브리서를 통해 그런 어렵지만 단단한 신앙을 배우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하나님께서 우리 신앙을 현실 속에 피어나는 참된 신앙이 되게 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가 어느덧 히브리서 말씀을 오늘로 4장까지 살펴보고 있습니다. 전체 히브리서가 13장이니까, 약 1/3가량을 본 것입니다. 한 책의 1/3을 보면, 대략 어떤 책인지 느껴지죠. 우리는 지금 히브리서가 어떤 책인지 점점 뚜렷해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히브리서를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예수님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은 천사보다 뛰어나신 분이신데, 우리를 위해 큰 구원을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고, 그 들은 것에 유념하여 흘러 떠내려가는 사람이 되어선 안 됩니다.
나아가 예수님은 모세보다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집의 신실한 종이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집을 지은 그 집의 주인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세와 율법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집으로 들어가야 하고, 또 그와 같은 확신과 소망을 끝까지 붙들어야 합니다.
네, 이상이 3:6까지 말씀입니다.
이어서 히브리서는 우리가 그 확신과 소망을 붙들기 위한 3가지 권면을 합니다.
첫째, 우리는 좋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좋은 마음이 아니면, 확신과 소망을 끝까지 붙들기 어렵습니다. 이 내용은 우리가 지난주에 살펴보았습니다.
둘째, 우리는 불신앙을 극복해야 합니다. 불신앙을 극복하고 믿음을 가질 때, 우리는 끝까지 붙들 수 있습니다.
셋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그냥 믿어선 안 됩니다. 그분을 믿되 힘써 믿어야 끝까지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이와 같은 두 번째와 세 번째 권면의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두 번째, 우리는 불신앙을 극복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첫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형제들아~” 네, 이 말씀의 대상은 “믿는 형제들”입니다. 교회 공동체의 모든 신자가 이 경고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불신과 불신앙은 우리의 삶 속에 항상 찾아오는 시험입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욕심 때문에, 어떤 사람은 교만 때문에, 어떤 사람은 세상 지식 때문에, 어떤 사람은 사람 때문에, 어떤 사람은 실패 때문에... 하나님을 불신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불신하는 그와 같은 마음은 악한 마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믿는 우리에게 오래도록 항상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은 우리에게 항상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여주는 모델입니다.
출애굽과 홍해, 구름기둥과 불기둥, 마라의 샘물과 엘림의 열두 샘물, 만나와 메추라기, 아멜렉과의 전쟁, 시내산 체험과 언약, 십계명과 성막... 광야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역사는 40년 동안이나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끝내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악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는 상징적으로 우리 인생의 광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우리 인생의 광야 속에서 크고 작은 역사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목마를 때 샘물을 주시고 주릴 때 양식을 주시고 보이지 않을 때 길을 주시고 힘들 때 새 힘 주시고... 세상 사람들은 자기 힘으로 살아가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항상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분명한 나타난 역사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불신한다면, 우리도 악한 그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네, 그런 사람은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지게 됩니다.

여기서 ‘떨어진다’는 말을 많은 영어성경은 각각 다양하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떨어진다, 떠난다, 저버린다, 돌아선다...”
그런데 이 말씀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가데스바네아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의미를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했던 여호수아와 갈렙의 동일한 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그렇습니다. 그래서 떨어진다는 말씀의 의미는 거역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에게서 떨어진다는 말은 어떤 실수나 부주의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의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을 거역하고 배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불신앙은 악한 것이고 그 마지막은 거역과 배도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13절 말씀으로 권면합니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우리가 하나님을 점점 믿지 않고 세상 속에서 죄 가운데 살면, 한 가지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것은 아주 뚜렷하게 나타나는 영적인 현상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마음이 하나님이 주신 부드러움과 따뜻함을 잃고, 메마르고 딱딱하고 완고하고 뻔뻔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이 달라지고 얼굴이 달라집니다. 죄는 우리 눈을 가리고, 우리 영혼을 그렇게 어둡고 완악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인 공동체 속에서 서로 권면하며, 우리의 불신앙과 죄의 유혹을 극복해 가야 합니다.
그래서 이 설교 시간도 그와 같은 권면의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우리는 죄로 인해 완고하고 강퍅하게 됨을 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잊지 않아야 합니다. 불신앙과 죄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안식에 들어갈 때까지 항상 주의하고 다스려야 할 영적인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피차 권면해야 합니다. 제가 목회자로서 여러분에게 권면하고, 또 저도 여러분에게 권면을 받고... 그렇게 우리는 서로 권면하며, 이 어려운 세상과 죄와 불신앙을 극복하며 신앙을 지켜가야 합니다.

그런 우리에게 14절 말씀은 귀한 약속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지금 로마교회 공동체의 어려운 상황 때문에, 이 약속의 말씀에 머무르지 않고 곧 경고의 말씀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앞서 인용했던 시편 말씀을 다시 인용하면서, 세 번의 연속적인 질문과 답을 말씀합니다. “듣고 격노하시게 하던 자가 누구냐?, 하나님이 40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네, 이 질문의 답은 동일합니다. 하나님을 불신하고 불순종한 바로 그들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마지막 19절에서 그들의 불신앙에 대한 권면의 결론을 이렇게 내립니다.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이렇게 불신앙은 불순종이 되고 불순종은 거역과 배도가 되고 거역과 배도는 가나안 땅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과 저는 이 반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우리의 신앙은 참된 신앙이 되고, 순종하는 신앙이 되고, 끝까지 붙드는 신앙이 되고, 마침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신앙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세 번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확신과 소망을 붙들기 위해 마음을 새롭게 하고 불신앙을 극복하면... 그러면 다 된 것 같은데...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목회자로서 마지막 한 가지 권면을 더 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는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이제 4:1~11까지 이어집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여기서 말씀하는 안식은 우리가 잘 아는 구원 혹은 하나님의 나라와 같은 의미입니다. 그런데 독특하게도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4장 앞부분에는 우리의 구원을 안식으로 설명하는 히브리서 기자의 성경 신학적인 해석이 있습니다. 이 내용을 간략히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마지막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 일곱째 날의 하나님의 안식을 영원한 안식에 대한 상징적인 말씀으로 이해하고 해석합니다.
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갔고 그들은 그 땅에서 마침내 안식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오랜 후에 시편 말씀에서, 하나님은 다윗을 통해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그래서 이 시편 말씀으로 안식을 새롭게 이해한다면, 가나안 땅에서 역사적으로 이루어진 안식은 최종적인 안식이 아니고, 우리에겐 영원한 하나님의 일곱째 날 안식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몸과 영혼이 지친 우리는 하나님의 그 최종적이고 영원한 안식을 약속과 소망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약속과 소망은 진행 중입니다. 문이 열리고 있고, 우리는 지금 안식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안식에 마침내 완전히 들어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힘써야 합니다.
이것이 히브리서 기자의 안식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와 같은 히브리서 기자의 말씀에서, 어떤 교훈을 받아야 할까요? 우리는 이 말씀을 ‘아 알고 보니, 이 말씀은 우리가 평소 우리의 구원과 하나님 나라를 아는 것과 다르지 않구나...’ 단순히 그렇게 생각하고 지나면 안 됩니다.
그것은 히브리서 기자의 강조점은 단순히 안식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데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에서 히브리서 기자의 강조점은 어디에 있을까요?
네, 히브리서 기자의 강조점은 첫 말씀인 4:1과 마지막 말씀인 4:11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네, 히브리서 기자는 안식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있지만, 거기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은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있었고, 히브리서 당시 로마교회 신자들에게도 있고, 지금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약속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2절에서, 우리가 약속을 받고 복음을 받지만 그 약속과 복음이 소용없게 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않으면, 즉 듣는 자가 그 말씀을 믿고 따라가지 않으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대체로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천국에 가는 것을 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히브리서 기자가 우리 신앙의 미래에 대해 매우 조심스럽게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3:6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 사실 살펴보면 이 말씀이 조금 이상합니다. “소망과 확신을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해야 하고 그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놀라운 점은 미래를 말하지 않고 단순히 현재를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의 의미는 ‘미래는 어떻게 될지 모르나, 우리가 그렇게 굳게 잡고 있다면, 현재는 분명 우리가 그의 집이다’라는 의미입니다. 
동일한 말씀은 3:14에서도 발견됩니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그런데 사실 이 번역은 원문과 조금 다릅니다. 원문은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었다’이고, 이것은 완료형이지만 현재 그렇게 되었다는 현재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 미묘한 구절이 영어성경 마다 다르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원문대로 완료형으로 번역하기도 하고, 그 의미를 생각해서 현재형으로 번역하기도 하고, 자연스러움을 생각해서 미래형으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 성경은 미래형으로 자연스럽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의미는 3:6과 같이 현재형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것을 끝까지 잡고 있다면, 지금 우리의 현재는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라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 신앙의 미래를 쉽게 말씀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이나 하나님의 계획이나 하나님의 예정이나... 이런 하나님의 역사를 나 중심으로 쉽게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나 계획이나 예정은 나를 위한 것이고 그것은 무조건 그대로 이루어질거야...’
물론 참된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는 정상적인 신자들은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신자를 끝까지 지켜주시고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않고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자주 세상을 바라보는 신자는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계획과 예정이 그런 사람까지 보호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랑과 신부가 결혼을 약속하고 결혼을 계획하고 예정하면, 대부분의 신랑과 신부는 아름다운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신랑이든 신부이든 그 준비기간 동안 다른 사람을 만나고 전화를 받지 않고 거짓말을 하고 신뢰를 저버린다면, 아무리 예정되어 있다 하더라도 결혼은 이루어질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예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더구나 우리는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의 구원 예정이 정확히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그것이 우리 개인을 예정하신 것인지, 아니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공동체로 예정하신 것인지... 또 그 예정이 우리 개인을 선택하신다는 선택론 즉 결정론에 가까운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신실하게 이루신다는 하나님의 목적과 의지를 말하는 목적론과 의지론인지... 이런 내용을 명확히 모릅니다. 기독교 신학 안에서는 이런 내용이 아직 논쟁중이고 분명히 정립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 않으면서 섣불리 예정론을 믿으시면 안 됩니다.
예정론은 우리를 최종적으로 보호해주지 않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 않다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면, 예정론은 여러분을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아~ 그 사람은 처음부터 하나님이 예정하신 사람이 아니야...”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말씀을 넘어 지나치게 나아가지 말고, 성경이 명확히 말씀하는 말씀에 머물러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신실하게 잘 믿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어떤 예정론이든 그 결론은 이렇게 동일하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예정론이든 하나님을 최선으로 믿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면 우리 구원엔 아무런 문제가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이제 목회자로서 마지막으로 11절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한 마디로 이 말씀은 우리 신앙에 최선을 다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냥 믿지 말고 힘써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정말 뜨거운 마음과 정성된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예배 한번을 참석하시더라도 뜨거운 마음으로 참석하시고, 기도 한번 하시더라도 간절한 마음으로 하시고, 일하고 생활하실 때에도 대충 살아가지 마시고 꼭 예수 믿는 사람으로 살아가시고... 그렇게 정성되게 하나님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자기 중심으로 살고,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찾고, 적당히 예수를 믿고, 죄인 줄 알면서 죄를 짓고, 각종 거짓된 삶을 살고, 다른 사람을 억압하고, 다수의 편에 서고, 내 이익을 중심에 두고, 분노하고 실망하고 낙심하고 ... 그런 생활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는 우리의 영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과 삶 깊이 하나님을 모시고, 우리 앞에 놓인 구원의 길을 힘써 걸어가는 영적인 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히브리서가 말씀하는, 그런 신실한 최선의 신앙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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