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큰 구원

믿음찬교회 0 50 2023.09.03 12:02
큰 구원
히 2:5~18
2023.09.03

오늘 본문 말씀이 조금 깁니다. 긴 만큼 많은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오늘 본문이 전체적으로 하나의 내용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그렇지 않습니까? 숲을 보면서 나무를 보지 못할 때가 있고, 반대로 나무를 보면서 숲을 보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일 좋은 것은 숲도 보고 나무도 보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은 우리가 오늘 본문의 나무가 아니라 숲을 보면서, 오늘 본문이 전체적으로 무엇을 말씀하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히브리서 기자가 말씀하는 두 번째 성경 신학적 해석입니다. 앞서 1장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첫 번째 성경 신학적 해석을 말씀했습니다. 그 내용은 천사보다 뛰어나신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장에서 그렇게 해석의 말씀을 하고, 2장으로 넘어와 2:1~4까지 그에 따른 권면의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이 그런 분이심을 알고 그 들은 것에 유념하여 흘러 떠내려가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히브리서 기자는 먼저 해석하고 그다음에 권면하는 순서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순서가 오늘 본문에서도 그대로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히브리서 기자의 두 번째 성경 신학적 해석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은 어떤 내용을 해석하고 있는가? ... 네, 그 내용은 바로 예수님께서 이루신 큰 구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셨고, 그로 인해 우리는 어떤 구원을 받았는가... 히브리서 기자는 이 내용을 구약 말씀을 인용하면서 잘 해석하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이 해석에 이어진 권면의 말씀이 3:1입니다. “그러므로 ...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예수님께서 그런 큰 구원을 우리에게 베풀어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구약의 제사나 천사나 율법이 아닌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히브리서의 흐름이 이렇게 흘러간다는 것을 이해하면서, 오늘 본문을 보아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이루어주신 큰 구원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 말씀을 잘 들으면, 우리 기독교의 구원이 무엇인지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처음에 구원을 배우면, 우리가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을 구원으로 배웁니다. 그다음에 구원을 좀 더 배우면, 죽어서 천국 가는 것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구원임을 배우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 이 히브리서 말씀으로 구원을 배우면 더 깊은 내용을 배우게 됩니다. 구원은 우리가 단순히 장소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존재론적으로 예수님의 형제와 자매가 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우리를 예수님과 같은 자신의 아들과 딸로 삼아주시고 대우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네, 그래서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구원은 ‘큰 구원’입니다.

그런데 살펴보면, 히브리서 기자는 이 ‘큰 구원’이라는 말을 앞서 2:3절에서 이미 말씀한 바 있습니다. 그때 히브리서 기자는 이 말을 어떤 의미로 말씀했는가 하면, 우리의 구원이 천사와 율법을 통한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기 때문에 그것을 ‘큰 구원’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의 ‘큰 구원’에 대한 말씀은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어지는 오늘 본문에서 본격적으로 ‘큰 구원’이 무엇인지 말씀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그 내용을 오늘 본문에서 크게 3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아들의 직접적인 고난과 죽음을 통하여 이루어진 구원이기 때문에 큰 구원입니다.
이 내용은 9절과 10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구원의 창시자이신데, 놀랍게도 구원의 창시자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직접 죽음의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평범한 우리 생각에, 왜 하나님과 예수님이 그런 선택과 결정을 하셨는지 잘 이해가 안 됩니다. 암만 생각해도 우리 생각에는 그냥 말씀으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면 될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니면 구약의 방식으로 양과 소의 피의 제사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면 될 것 같은데... 그런 방식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자신의 아들을 우리와 같은 존재로 이 땅에 보내시고, 그리고 그 아들의 죽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일에 온전히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같은 우리 구원의 과정을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조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그저 말로 하시는 분이 아닌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를 그저 말로 용서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런 방법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에 위배됩니다.
죄는 피로 용서되고, 피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죄는 죽음으로만 처리되고 용서되는 것이 온 우주를 공의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이런 이유로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존재가 되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아들의 고귀한 피와 죽음으로 이루어진 큰 구원임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무엇의 가치를 모른다는 것은 참 어둡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최근 우리나라에 때아닌 독립운동가 홍범도 장군의 흉상 이전 문제가 대두되었습니다. 조선말 왕과 사대부와 권력가들이 나라를 약하게 만들었고 그런 우리나라를 외세가 삼켰습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나라에 힘없는 백성들 한 사람 한 사람 일어나, 독립의 열망을 품고 독립운동을 했습니다. 홍범도 장군은 머슴을 살던 분이고 배움도 짧고 포수였던 분이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우리나라는 외세에 의해 망한 것처럼 외세에 의해 독립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때 나라의 독립을 위해 고난받고 죽어간 많은 이들의 희생과 가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분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 분들의 가치를 훼손하는 일이 뉴라이트를 따르는 일부 한국교회로부터 나오고 있다는 사실이 매우 슬픕니다. 왜 우리의 일부 교회가 그런 이념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해방 후 한국교회는 일제에 협력한 목회자와 신자들에 의해 주도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라의 사정도 그렇고 교회의 사정도 그렇고... 반공만 강조하고 독립운동은 자꾸 옆으로 밀어내고 있습니다. 당연한 말씀이지만, 반공과 독립운동은 동일하게 중요한 우리의 역사입니다.
여러분, 이 내용에 대해 오해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설교가 영적인 것만 말한다고 좋은 설교가 아닙니다. 영적인 것만 말한다면 구약의 예언자들은 필요가 없고, 영적인 것만 말한다면 우리 신앙은 현실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면 누가 예수님을 믿겠습니까? 그래서 저도 가급적 민감한 정치나 역사나 현실 문제를 설교 시간에 말하지 않고자 하지만, 오늘은 부득이 잠깐 말씀을 드렸습니다. 목회자로서 어느 한쪽 편에 서서 드린 말이 아니라는 점을 잘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친히 자신의 몸으로 베풀어주신 우리 구원의 가치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 고귀한 가치를 깊이 생각하지 않거나 잊어버리는 사람은 세상의 바람이 심하게 부는 어느 날, 유대교로 돌아가고 세상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이 예수님의 큰 희생으로 이루어진 큰 구원임을 알고 끝까지 믿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둘째, 우리의 구원은 우리를 단순히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는 구원이 아니라, 우리를 예수님의 형제와 자매로 삼으시는 구원이기 때문에 큰 구원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와 같은 귀한 진리를 맨 먼저 시편에서 발견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시며 만물을 그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
이 시편 8편은 하나님의 인간 창조의 목적과 계획을 찬양하는 말씀입니다. 이 시편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다는 창세기 말씀과 잘 어울립니다.
수많은 고대 신화는 인간 창조를, 신을 섬기고 신을 위해 하찮은 재료로 만들어졌다고 설명하지만,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신의 형상과 숨결로 창조하시고, 또한 원대한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셨습니다. 바로 우리를 자신의 아들과 딸로 만드시기 위해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의 죄와 타락으로 인해 거듭 실패하고, 그런 거듭된 실패 속에 마침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편 8편 말씀은 예수님을 통해 새로운 의미가 됩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창조 목적은 진정한 인간 즉 인자가 되신 예수 안에서 성취되고, 우리는 실패한 우리가 아닌 승리한 예수 안에서 이 말씀의 실현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사람의 몸으로 오셔서, 우리 구원의 첫 열매가 되시고 맏아들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같은 형제자매로 삼아주시고 우리를 친구로 말씀하시고... 그렇게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끌어 하나님의 원대한 창조 목적과 구원을 이루시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구원은 참으로 큰 구원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 내용을 에베소서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예수님도 이 내용을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기도로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옵소서”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을 생각할 때 천국만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그건 우리의 정말 작은 인간적인 눈으로 구원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간 창조와 구원은 우리를 자신의 아들과 딸로, 곧 맏아들이신 예수의 형제와 자매로 삼으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큰 구원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내용을 시편뿐만 아니라, 이사야서를 통해서도 해석하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그 내용도 같은 의미이기 때문에, 넘어가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왜 깊이 알아서 이와 같은 큰 구원으로 이해해야 할까요? 우리의 구원을 그렇게 크게 이해하면, 우리 삶과 신앙에 어떤 유익한 점이 있을까요?
맨 먼저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내 인간 존재에 대해 매우 높은 이해를 하게 됩니다. 나는 지금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부족하지만 내 존재는 그런 희망찬 미래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구원의 길을 몰랐다면, 우리는 세상의 길을 걷고 있었을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너는 얼마나 돈이 많나, 얼마나 멋지냐, 얼마나 높은 자리에 있나, 얼마나 많은 힘을 가지고 있나... 그런 것을 끊임없이 묻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막상 돈이 많고 아름답고 높은 자리에 오르고 많은 힘과 권력을 가지게 되어도 늘 힘들고 불안합니다.
하나님이 없는 인간은 자기 자신을 알 수 없기에 존재론적으로 늘 힘들고 불안합니다. 기억을 다 잃어버린 사람처럼 인간은 방황하고 괴롭고 불안한 삶을 살아갑니다. ‘나는 그렇지 않은데... 나는 그런 것을 못느끼는데...’ 라고 생각하는 사람 안에도 그것은 있습니다.
저는 얼마 전에 영화평론가 이동진 씨라는 분이 오펜하이머라는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을 최초로 만든 인물이죠. 그는 그렇게 인류를 파괴하는 무기를 만들었지만, 말년에는 그 일을 후회하고 평화운동을 한 매우 모순적인 인물이라고 합니다. 이동진씨는 그 영화와 그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인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모순적인 존재이다. 인간성의 핵심은 인간의 모순에 있다, 인간은 그런 모순적인 수수께끼 존재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다른 인간에게 관심을 가지고 궁금해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을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이런 사람, 저런 사람으로 평가하거나 정의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고 재미없는 일이고 말이 안 되는 일이다...” 그분은 인간에 대해 그런 이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인간을 모순적인 존재라고 하는 그분의 말에 대체로 공감이 되었습니다. 세상과 역사와 사람 안에는 수많은 부조리와 모순이 있고, 제 안에도 그런 수많은 모순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분의 인간에 대한 견해는 맞는 말이고 통찰력이 있지만, 하나님이 없고 현실만 있기에 어두울 수밖에 없다고 느꼈습니다. 우리가 자신 자신을 그렇게 인식하고 또 다른 사람도 그렇게 인식하고 살아간다면,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 어두운 세상을 다르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 히브리서 말씀은 우리 인간을 다르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우리를 창조하셨고 우리를 구원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그 구원은 그저 파라다이스 같은 천국을 우리에게 주시는 정도의 구원이 아니라, 부조리하고 모순되고 죄 많은 우리 존재를 친히 그분의 아들과 딸로 삼으시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우리는 우리 자신과 인간 존재를 새롭게 인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순되고 어두운 나 자신과 세상 현실에 실망하지 않고, 현실과 역사를 넘어 매우 희망찬 인간의 미래를 꿈꿀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을수록 죄를 버리고 모순을 버리고 누추함을 버리고 점점 더 온전한 인간 존재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높은 스스로의 정체성과 존엄성을 가짐으로 누구의 종이 되거나 어디에 굴복하거나 무엇에 매이는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세상은 계급을 만들고 차별을 만들고 이념을 만들고 사조와 철학을 만들고 권력과 힘을 만들고 물질문명을 만들고... 인간을 끊임없이 거기에 매이고 종이 되게 합니다. 그런 세상의 배후엔 사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는 우리는 그런 세상의 길을 버리고 하나님이 계획하신 인간 본연의 참된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그 길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그 아름다운 영원한 길로 인도하시는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신앙도 많이 달라지게 됩니다.
여러분, 신앙에는 구약적 신앙이 있고 신약적 신앙이 있습니다. 구약 신앙과 신약 신앙은 많이 다릅니다. 바로 그 두 신앙 사이에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우리 교회와 믿는 자 중에는 제사장과 각종 제사와 거기 서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었던 그 구약 신앙에 젖어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스스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않습니다. 여전히 소심하게 제사장을 통해서, 제사라는 수단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합니다.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지 않고 그저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빌고 구하고... 그런 신앙에 머물러 있습니다. 감히 하나님과 인격 대 인격으로 만나고 부딪히는 시도를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본질보다 여전히 형식과 겉모습과 껍데기를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구약 신앙은 한 마디로 종의 종교입니다. 어디까지나 종으로서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이런 구약 신앙을 따라가선 안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새로운 신앙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맨 먼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도록 말씀해주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그리고 예수님은 잡히시기 전날 밤, 요한복음 15장에서 제자들에게 이런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그래서 이 말씀 이후, 예수님과 제자들은 선생과 제자가 아닌 새로운 관계로 들어가게 되는데, 바로 대등한 친구 관계입니다. 비록 우리는 여전히 인간이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로 대우해주시는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옵소서” 이 기도는 우리 믿는 자들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한 교제 안으로 연합시키는 놀라운 기도였습니다. 세상의 수많은 신과 우상 가운데 이런 신이 과연 어디 있을까요?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이제 이와 같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종의 종교를 벗고 아들의 종교로 올라가야 합니다. 그저 엎드려 구하고 내 필요를 얻고 자랑하는 그런 옛 종교와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당당히 하나님 앞에 서고, 아버지의 뜻을 아는 아들로 그분과 인격적으로 대화하고, 또 그런 믿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담대한 삶과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만유의 상속자이신데, 장차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만유의 상속자가 될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다스리는 자리에 서게 되고, 만물은 복종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우리는 아직 잘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면, 우리는 그런 영광스러운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원이 이와 같은 큰 구원인 줄 알고, 영적인 높은 내적인 자존감과 밝은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나 자신과 세상 현실에 실망하지 마시고, 절대적으로 긍정적으로 밝게 사시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구원은 죽음에 승리하고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사탄에 승리하는 구원이기에 큰 구원입니다.
인간의 죽음은 필연적이지 않습니다. 운명적이지도 않습니다. 자연적이고 생물학적이지도 않습니다. 인간의 죽음은 죄 때문입니다.
우리는 병이 들어서 죽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내 심장과 호흡이 멈추어서 죽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죄 때문에 죽음을 맞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가 극복되는 날, 인간의 죽음도 극복됩니다. 예수님은 죄와 죽음을 십자가에서 극복하셨고 부활의 첫 열매와 신호탄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그분이 다시 오시는 그날, 우리의 죄와 죽음도 마침내 극복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소망 가운데 그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이런 놀라운 부활을 가져오는 큰 구원이기에 예수님을 떠나선 안 됩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오늘 본문에서 우리의 구원이 얼마나 큰 구원인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큰 구원을 이루어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당시 박해 가운데 있던 신자들은 이와 같은 히브리서 기자의 말씀에 큰 확신을 얻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오늘날 이 말씀에 큰 확신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구원의 가치를 알고, 그 위대한 계획과 의미를 알고, 그 놀라운 결과를 믿음으로 바라보는 여러분과 제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이와 같은 복된 큰 구원의 길로 늘 인도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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