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고난을 통하여

믿음찬교회 0 115 2023.08.20 12:00
고난을 통하여
히 2:9~10
2023.08.20.

본래 오늘 설교할 본문 차례는 2:5~18입니다. 2:5~18까지 하나의 큰 내용이 말씀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긴 말씀 중에 오늘 본문인 9절과 10절은 우리가 따로 살펴볼 필요가 있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히브리서의 문맥과 흐름을 잠시 내려놓고, 9절과 10절 말씀만 보고자 합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인 9절과 10절은 어떤 말씀인가... 네, 오늘 본문은 고난 받으신 예수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되셨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고난이라고 하는 주제를 전체적으로 살펴보면서 우리에게 어떤 고난이 있는지, 그리고 예수님의 고난은 어떤 고난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겪는 신앙적인 어려움을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믿음의 시련이죠.
그런데 고난을 넓게 말하면, 믿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며 살아갈 때 우리에게 닥쳐오는 모든 어려움을 고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신앙적인 어려움이든, 일반적인 어려움이든... 우리는 그 모든 일을 믿음으로 해석하고 극복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난을 넓게 이해하면, 우리가 가난한 것도 고난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프고 병든 것도 고난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실패하고 넘어지는 것도 고난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내가 명백히 잘못해서 가난하거나, 아프거나, 실패하면 그건 고난이라고 말하기 어렵겠죠. 일을 하지 않아서 가난하거나, 매일 술을 마셔서 병이 들거나, 아무런 준비와 노력을 하지 않아서 실패하면 그건 고난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실히 생활하고 예수님을 최선으로 믿는 가운데, 가난하고 아프고 실패하고 넘어지고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는 것은, 그 어려움이 신앙적이든 일반적이든, 다 우리의 고난이 될 수 있습니다.

돌아보면, 저는 고난에 대한 설교를 많이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저도 고난이 싫기 때문입니다. 둘째, 고난에 대한 설교는 항상 일정한 답이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주님 안에서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유익하다... 고난을 잘 받으면 우리가 정금같이 된다...’ 네, 대체로 그렇게 설교합니다. 고난에 대한 설교는 그 이상으로 하기 어렵죠.
그런데 우리의 현실을 보면 참 어려운 일이 많습니다. 바뀌지 않는 현실에 어떻게 사나 싶은 일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런 엄연한 현실 앞에 말뿐인 설교를 한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 고난에 대한 설교를 많이 하지 않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이 고난 받으신 예수님을 말씀하고, 또 그런 예수님에게 고난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말씀하기 때문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이 내용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 믿는 자에게는 크게 3가지 종류의 고난이 닥쳐옵니다.
첫째, 무의미한 고난이 있습니다.
이 내용에 대해서 야고보서가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으니라.”(약1:13~15)
야고보서는 이 시험과 어려움을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된 것이라 말씀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도 아니고, 마귀로부터 온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자신이 스스로 선택하고 자초한 결과 일어난 시험과 어려움입니다.
앞서 서두에서 저는 우리가 일을 하지 않아서 가난하거나, 매일 술을 마셔서 병이 들거나, 아무런 준비와 노력을 하지 않아서 실패한다면 그것은 고난이라고 하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시험과 어려움도 만약 고난이라고 하는 큰 범주에 포함시킨다면, 우리는 그것을 무의미한 고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무의미한 고난, 내가 자초한 고난... 우리는 믿는 자로서 이와 같은 고난에 빠지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으로 새로워지고 온전해지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오래전 제가 선교단체 간사로 있을 때에, 학생들과 일본 오사카로 단기선교를 갔습니다. 저희 팀은 오사카의 한 작은 교회에 머물렀습니다. 그때 거기에 1년간 휴학을 하고 일본 선교를 돕기 위해 온 자비량 학생 한 명이 있었습니다. 언어도 배우고 선교도 돕고 해외 경험도 쌓고... 그 학생은 나름 의미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와 또 저의 단기 선교팀과 많이 친해진 어느 날, 그 학생은 저에게 상담할 게 있다고 하면서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자신이 지금 평일에 일본 식당에서 서빙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데, 사장님 때문에 많이 힘들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아직 일본어가 완전하지 않아서, 손님들의 주문이나 말을 못 알아들을 때가 종종 있는데, 사장님은 그런 자신을 은근히 계속 지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많이 힘들고 위축되는데, 문제는 그 아르바이트 자리를 기도해서 얻은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쉽게 그만두지 못하고 힘은 들고... 어떻게 하면 좋을지 제게 물었습니다.
참 신실한 학생이죠. 그곳이 힘들지만, 기도 가운데 얻은 곳이고 그러면 하나님이 보내신 곳인데, 자기가 힘들다고 그만두면 혹 죄가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그 학생에게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고 이야기해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다 혹은 저것이다’라기 보다는 큰 방향으로 생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도망치던 다윗은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먹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다윗과 아히멜렉 제사장을 이해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학생이 그 가게에서 참고 해야 할 이유가 있다면 계속해야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다른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해도 괜찮은 것입니다. 그래서 단순히 기도하고 구했다고, 하나님이 그곳으로 인도해주셨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고 이야기해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고 거기에 갇혀서 무의미한 고난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해심이 넓지 않은 사장님 밑에서 억지로 참고 불편한 마음으로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요?

저와 집사람은 주해를 출산할 때, 오래도록 자연분만을 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기도한 이유는 자연분만이 산모의 건강에 더 좋고 또 비용도 저렴하고... 그때 저희는 돈이 많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산통은 계속 기미가 없고, 의사 선생님은 뱃속의 아기가 크다고 말하고, 집사람은 나이가 있고... 그래서 저는 비록 기도를 했지만 안전하게 수술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집사람을 설득해서 결국 수술을 했습니다.
낳고 보니 주해는 3.8kg... 자연분만을 해도 될 뻔했습니다. 그러면 저는 그때 하나님께 회개 기도를 해야 했을까요? 저의 불신앙을 회개해야 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회개 기도를 따로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기도했지만, 하나님이 저에게 ‘응 그렇게 될거야’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시진 않았기 때문입니다. 특별한 사인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해가 태어난 후에도 하나님께서 저에게 따로 질책하시거나 뭔가 회초리 같은 일을 행하시지 않았습니다. 주해는 건강하게 태어났고 집사람도 잘 회복했고, 다만 비용이 조금 더 들었을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혹 우리의 결정이 틀릴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믿는 마음으로 최선의 결정을 하면 책임져주시고 인도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시고 잘 생각하시고 최선의 결정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무의미한 고난이나 어리석은 결정은 당연히 피하시길 바랍니다. 아무쪼록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이 언제나 우리 성도님들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두 번째는, 우리 믿는 자에겐 비록 힘들고 어렵지만 유익한 고난이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도 야고보서가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야고보서는 또 말씀합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안타깝지만 이런 말씀을 목사로서 드려야 하겠습니다. ‘우리 삶과 신앙에 있어 고난은 피할 수 없다...’ 왜 고난을 피할 수 없을까요? 네, 우리는 단순히 천국에 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는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신앙의 기초이지만 아주 중요한 성경적 가르침이 있습니다. 천국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지금 여기서 들어가는 곳이란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서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야, 마침내 그날에 천국과 하나님이 나라에 온전히 들어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천국은 죽어서 갑자기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그래서 천국에 들어가는 중요한 관건은 지금 여기서 우리가 천국에 들어갔느냐 혹은 들어가고 있느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상식적으로 나쁜 사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매일 거짓말하고 남을 속이고 미워하고 돈과 권력에 매여있고 악을 행하고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그런 사람이 단순히 교회 다닌다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모든 은혜로운 역사와 수단을 다 사용하십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깊은 경륜의 수단 가운데 하나가 바로 고난입니다.
우리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자기중심과 자아와 죄된 본질... 우리가 그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하나님을 주님으로 부르는 구원은 단순히 말씀과 가르침과 은혜로 잘되지 않습니다. 말씀과 가르침과 은혜로만 될 수 있다면, 고난이 필요 없죠.
그러나 비록 우리는 입으로는 믿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할 때가 많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사용하십니다. 히브리서는 이 내용을 12장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히12:7~8) 하나님은 우리 삶의 크고 작은 고난을 통해 우리를 자기의 자녀로 만들어가십니다.
그래서 여러분, 여러분 삶에 어려움과 고난이 있을 때, 이렇게 생각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아 나는 어째서 이렇게 불행하지? 남들은 다 잘사는데, 나는 어째서 이렇게 재수가 없을까?’ 그런 생각은 세상적인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이렇게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성실히 살아가는 가운데 겪는 모든 어려움과 고난은, 우리를 빚으시는 하나님의 손길이다’ 이렇게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바라보시고 또 그 어려운 일들을 통해 변화되는 여러분을 보시길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남들보다 조금 더 어려울 수 있습니다. 남들보다 조금 더 불행할 수 있습니다. 내 어깨 위에 있는 짐이 남들보다 조금 더 무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삶 속에서도 우리가 주님을 변함없이 믿을 때, 우리는 주님께 올려드릴 내 삶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저희 집 앞에는 꿈터라고 라는 발달 장애인 방과후시설이 있습니다. 매일 저희 집 골목으로 그 장애 아이들과 부모님들이 지나다니십니다. 저는 그 부모님들을 보면서, 얼마나 답답하고 힘드실까 그런 생각을 많이 하였습니다.
며칠 전에 저는 ‘고시원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보게되었습니다. 부도 난 재봉 공장에서 생활하는 부부는 고3 자녀를 고시원에 보내고, 자신들은 공장에서 잠을 자며 쌀을 구하러 다니고 있었습니다. 기특하게도 그 고3 학생이 공부를 잘했습니다. 그 자녀를 쌀을 구해서 도시락을 만들어 학교에 보내고, 부부는 어느 아파트 앞에서 재고로 남은 옷을 1,000원 2,000원에 팔았습니다.
그 고시원에는 아빠와 딸이 나란히 옆방에 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아빠는 전 재산을 사기당하고 자기와 떨어지지 않으려는 딸과 함께 고시원에 살면서 대리운전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추운 겨울날 콜을 잡고 뛰어가는 그분은 늦게 왔다고 짜증을 내는 술취한 손님을 모시고 대리운전을 하는데, 그 손님은 도착해서 20,000원 요금을 15,000만 주고 사라졌습니다.
그 다큐멘터리는 그런 어려운 분들을 보여주었습니다. 저는 99년도에 선교단체에서 막 간사가 되었을 때에, 인천에서 교회마다 돌아다니며 ‘explo 99’ 대회를 홍보했습니다. 그때 교회에 가면 교회 강대상 옆 쪽문에서 나오시는 힘든 목사님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얼마나 그런 작은 교회들이 많은지...
그러므로 여러분, 나보다 또 우리보다 어렵고 힘든 분들을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사람은 위로만 보고 절대 살 수 없습니다. 그리고 고난을 통하여 우리를 빚어가시는 하나님을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이 모든 고난과 어려움을 유익한 것으로 삼으시길 바랍니다. 아무쪼록 하나님께서 우리 모든 성도님들에게 고난을 이기는 넉넉한 능력과 마음을 주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세 번째는, 우리에겐 온전한 고난도 있습니다.
이 미스터리한 고난에 대해서는 오늘 히브리서 본문이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여러분,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신 것은 우리처럼 예수님이 뭔가 부족하고 흠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분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하나님과 함께 이 세상을 창조한 창조의 중재자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고난이 필요 없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런 분이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물론 그 고난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가 아닌 예수님을 향한 목적도 동시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셨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뭔가 부족한 부분이 있어서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분은 본래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고난을 통하여 더욱 그 이름에 합당한 분이 되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천사가 그분 앞에 경배하고, 모든 구원 받은 백성들이 주님으로 고백하고, 온 우주가 그분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에게 고난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과 이런 예수님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욥기에서 욥은 신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그런데 그런 욥이 고난을 받았습니다. 욥은 고난도 고난이지만, 자신이 왜 고난을 받는지 알 수 없어서 이루 말할 수 없이 괴롭고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욥기는 욥의 그와 같은 고난에 대한 이해가 풀리는 과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욥이 더 온전해지는 과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이와 같은 온전한 고난이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간혹 어떤 분들은 감당할 수 없는 큰 슬픔을 당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도대체 왜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큰일을 용인하시는지 이해할 수 없다...잔인한 하나님...’ 행복을 꿈꾸는 착한 막 결혼한 부부가 소박한 여행을 떠났는데, 한 사람이 사고로 평생 불구가 됩니다. 네, 저도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도대체 왜 그렇게 행하시는지 저도 잘 모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자기 아들에게도 그렇게 하시는 하나님이란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비록 우리는 다 이해할 수 없지만, 예수님을 통해 고난이라는 문제를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내가 뭘 잘못해서 고난이 온 것이 아닙니다. 고난은 우리를 더 온전하게 하시고, 작은 보석 같은 우리를 더 빛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무의미한 고난... 그런 고난에 매이지 마시고 벗어나시길 바랍니다.
유익한 고난... 믿음으로 받아들이시고 더 새로워지고 나아가는 영적인 기회가 되시길 바랍니다.
온전한 고난... 우리 믿음이 이 고난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비록 우리 믿음의 분량이 이와 같은 고난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없다 하더라도, 다만 바라보면 우리의 많은 상처와 아픔이 치유될 줄 믿습니다.

아무쪼록, 고난이라는 방법을 사용하시는 우리의 특별하신 하나님이, 연약한 여러분과 저를 항상 고난 중에도 지켜주시고 천국으로 인도해주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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