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회개의 참된 의미

믿음찬교회 0 97 2023.07.12 14:05
회개의 참된 의미
막 1:14~15
2023.07.07.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오늘은 우리가 우리 신앙의 기초인 이 회개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회개는 무엇일까요?
네, 그것은 우선 일반적인 참회나 반성이 아닙니다. 무엇을 잘못했다는 느낌이나 감정도 아닙니다. 잘못을 인정하거나 시인하는 것도 회개라 하기에 한참 부족합니다.
회개란 보다 근본적이고 전체적인 의미입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우리 삶 전체를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돌이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회개가 그런 의미라는 사실은 회개의 어원을 살펴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회개하라’는 헬라어 단어는 ‘메타노에오’입니다. ‘메타노에오’의 뜻은 ‘뉘우치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학자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회개의 진정한 의미는 헬라어가 아니라, 그 단어에 해당하는 구약 히브리어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회개하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슈브’입니다.
그러면 ‘슈브’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네, 그것은 ‘돌이키다’입니다. 즉 그 의미는 자신이 가던 길을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회개하라’의 의미는 단순히 ‘뉘우친다’는 의미가 아닌, ‘하나님을 향해 돌이킨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회개는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와 같은 회개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면서, 회개와 관련하여 다음 몇 가지 내용을 주의해야 하겠습니다.

첫째, 우리는 회개 없이 복음을 믿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회개 없이 복음을 믿는 일은 있어선 안 되는 일이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과거 인물 가운데 그런 사람으로 누가 있을까요?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박마리아라는 인물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선교사의 도움으로 유학을 다녀오고 기독교인으로 살았지만, 그러나 그의 삶의 실제 주인은 돈과 권력이었습니다. 가난한 가정부의 딸이었던 그는 돈과 권력을 바라보며 살았고 그 결과 권력의 2인자의 자리까지 올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습니다.
몇 년 전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최순실씨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최순실 씨도 모 교회를 출석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자신의 딸을 위해 교회에 기도제목도 적어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가 국정에 비정상적으로 개입하고 딸을 부정 입학시키고 기업들에서 뇌물을 받고 권력을 행사한 모습은 그 사람의 인생에 회개의 시간이 과연 있었나하는 회의를 갖게 합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이 삶의 방향을 하나님을 향해 돌이킨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회개 없이 복음을 믿는 것은 본인의 책임이지만 그러나 교회도 책임이 있습니다. 교회의 책임은 다른 것이 아닌, 회개 없이 복음을 믿도록 잘못 가르친 책임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복음을 믿는다는 것을 바울서신에만 의거하여 단순히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정도로 축소 시켰습니다. 그래서 회개 없는 신앙이 교회 안에 만연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신앙과 믿음을 이렇게 잘못 가르친 책임은 교회와 목회자들에게 있습니다.
일찍이 침례요한은 자신에게 회개의 침례를 받으러 나아온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외쳤습니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하지 말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눅3:8~9) 그러자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무리가 물어 이르되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그러자 침례요한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가난한 시대에 옷을 나누고 먹을 것을 나눈다는 것은 근본적인 삶의 변화를 의미했습니다.
세리들도 와서 침례요한에게 물었습니다.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침례요한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당시 세리가 부과된 것만 거둔다는 것은 근본적인 삶의 변화를 의미했습니다.
군인들도 와서 물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침례요한은 같은 말씀을 했습니다.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힘을 가진 군인이 그렇게 산다는 것도 근본적인 삶의 변화였습니다.
한 사람에게 회개가 일어나는 것, 그것은 빛이 어둠을 뚫고 비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누군가에겐 불가능할 만큼 어렵겠죠.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삭개오는 정직한 세리가 되었고 마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삭개오와 마태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은 올바른 예가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과 저는 그렇게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비록 우리는 여전히 부족한 죄인이지만, 적어도 내 삶의 근본은 하나님께로 돌이킨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둘째, 우리는 잘못된 회개를 주의해야 합니다.
여러분, 엄밀히 말해 회개는 회개 기도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회개 기도를 열심히 하는 것으로 회개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오류에 빠지지 않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회개 기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후의 회개의 삶에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많은 교회는 금요기도회를 회개의 시간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주일 예배는 좀 밝고 기쁘게 드리는 경우가 많지만, 금요기도회는 좀 무거운 분위기 속에 회개와 간구의 시간을 가집니다. 네 그런 시간을 정기적으로 갖는 것이 필요하죠. 우리는 늘 우리의 죄와 잘못을 발견하고 고쳐야 합니다.
그러나 거의 매주 그런 패턴과 프로그램으로 이루어지는 기도회는 자칫 우리에게 회개에 대한 오해를 갖게 합니다. 그런 정기적인 기도회에 참석하는 것으로 ‘아 나는 회개의 생활을 잘 하고 있어~’라고 오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가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 기도회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마치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린 무의미한 제사나 금식과 같습니다. 정기적으로 반복적으로 경건하게 드렸지만, 실제적으론 아무 의미 없는 종교 행위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 기도만 하는 종교 행위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또한 성경은 우리 신앙이 성장이나 발전 없이 반복적인 회개의 악순환에 빠지는 일에 대해서도 주의를 주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말씀은 히브리서 6:1~2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이 말씀은 우리가 우리 믿음의 초보적인 내용에 갇히고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는 문제를 지적합니다. 회개와 믿음과 세례와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 이 6가지는 기독교 입문과 기독교 복음의 기초라고 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것은 중요한 내용이지만, 우리 신앙이 그것에 계속 머물며 발전하지 못하는 것은 큰 오류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교회의 가르침이 정죄와 회개를 무분별하게 반복하는 것에 주의해야 합니다. 어떤 목회자들은 매주 금요기도회만 되면 우리의 죄인됨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죄인들입니다... 한 주간 동안 지은 더럽고 추한 죄들을 낱낱이 하나님께 회개합시다... 철저한 회개 없이 우리는 거룩할 수 없습니다...”
저도 학생시절부터 매주 그런 금요기도회에 참석하여, 한 주간의 삶을 회개 기도하였습니다. 물론 그 시간들이 다 잘못되었거나 나빴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의 가르침과 신자들의 영적 생활이 그와 같은 반복적인 정죄와 회개에 매여있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신자들은 당연히 죄된 생활에서 벗어나야 하지만, 교회는 일부러 신자들을 그렇게 죄를 반복적으로 회개하는 신앙생활에 가두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목사로서 우리 신앙에 정죄와 회개를 강조하고 반복하는 것은 좋은 목회가 아니라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철저하고 반복적인 정죄와 회개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영적으로 자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라고 성숙한 신앙이 되면, 우리는 여러 가지 죄의 문제에서 벗어나고 자유롭게 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가 말씀한 내용이 바로 이것입니다.
죄의 문제는 우리가 성장하고 성숙할 때 자연스럽게 극복되는데, 성장과 성숙 없이 회개만 하면 우리는 회개의 악순환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장과 성숙에 보다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아울러 우리는 우리의 지은 죄를 낱낱이 발견하고 고백하는데 너무 많은 신앙 에너지를 쓰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 신앙은 마치 어두운 중세 수도원의 신앙 같습니다.
안타깝지만 철저한 회개가 우리를 궁극적으로 거룩하게 만들지 못합니다. 그런 강박적인 회개는 오히려 우리 신앙을 어둡게 하고 성장을 방해합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 삶이 근본적인 차원에서 하나님께로 돌이켰는가 하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누구나 작은 실수나 실패를 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행한 작은 실수나 죄를 마치 큰 죄인 것처럼 크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큰 죄는 큰 죄로 주의해야 하겠지만, 동시에 작은 죄는 작은 죄로 여겨서 지혜롭게 극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에 대해서도 이렇게 잘 알아서, 죄에 대한 지혜로운 영적인 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회개의 참뜻을 바르게 이해하고 잘못된 회개나 회개의 악순환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쪼록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죄를 넘어선 자유롭고 밝고 성숙한 신앙으로 늘 인도해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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