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현실과 초자연 (2)

믿음찬교회 0 42 2023.06.13 17:49
현실과 초자연 (2)
막 1:2~13
2023.06.09.

우리는 지난 주에 마가복음 서문이 말씀하는 현실과 초현실을 살펴보았습니다. 마가복음 서문이 현실과 초현실을 말씀하는 직접적인 이유는 예수님의 생애를 그런 두 개의 시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오늘날의 우리도 이 세상을 그런 두 개의 시각으로 살피며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신앙과 삶은 현실과 초현실의 균형적인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오래 전 과거에 인간은 신화와 미신에 사로잡힌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때에 신은 신전과 거리와 집 등 도처에 존재했고 사람들의 일상을 지배했습니다. 그래서 그때에는 인간의 사고와 생각이 온통 그런 신과 신화적인 이야기와 말씀 그리고 미신과 미신적인 풍습에 젖어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철학이 나오면서 신화의 시대는 저물게 되고, 그때 인간의 역사와 문명은 개인적인 자각을 하고 발전하게 됩니다. 이후 중세를 거쳐 인문주의 르네상스가 일어나면서, 마침내 세상은 신앙과 종교의 오랜 시대를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눈부신 과학의 발전이 급격히 일어나면서, 무신론적 과학 혁명의 시대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인공지능, 우주 물리학, 생명공학 등 다방면에서 혁명적 진보를 이루어 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과학의 발전 자체는 물론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과학의 발전과 새로운 지식이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고 전통적인 신앙과 믿음에 의문을 제기한다는 점에서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믿는 믿음과 신앙은 어쩐지 낡은 유물처럼 여겨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신앙의 의미와 이유를 찾지 못하고 신앙을 떠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시고, 하나님의 말씀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하나님을 말씀하고 초자연적인 영적인 사실들을 말씀합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마가복음 서문 말씀도 우리 인간의 역사와 삶에 보이지 않는 초자연적인 차원이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의 예언이 성취되고, 성령이 활동하고, 하나님의 음성이 임하고, 동시에 사탄도 활동하고 역사하는 ... 우리는 그와 같은 초현실과 함께 우리의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세계를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는 현실이고, 다른 하나는 초자연적 현실입니다.
아무리 인간의 과학이 발전하더라도 과학이 초자연을 발견하거나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과학은 물리적이고 객관적인 대상을 연구하는 학문이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 뛰어난 물리학자였던 스티븐 호킹 박사가 돌아가셨죠. 그분은 평생 우주를 연구한 훌륭한 학자이지만, 무신론자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우주에 신은 없다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으로 아무리 우주를 관찰하고 연구하더라도, 신을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은 어쩌면 당연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주를 하루를 관찰하든, 평생을 관찰하든 달라지지 않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물리적인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호킹 박사는 우리의 현실 차원만 알고 말한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20세기 물리학자 중 호킹 박사보다 더 유명한 분은 아인슈타인 박사일 것입니다. 그의 연구는 모르는 사람이 없죠. 상대성 이론, 중력 이론, 차원 이론 등 그가 밝힌 세상과 우주의 원리는 놀랍기만 합니다.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 아인슈타인 박사가 양자역학에 대해 이런 발언을 한 적이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은 그가 하나님을 인정한다고 오해하곤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인슈타인의 신과 종교에 대한 이해는 호킹 박사와 비슷합니다. 그가 신과 종교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밝힌 적이 있습니다. 그는 그 내용을 사망 1년 전인 1954년에 편지로 써서, 독일의 한 철학자에게 보냈습니다. 그 손편지가 경매로 나왔는데, 그 내용 일부는 이렇습니다.
“신이라는 단어는 내게 인간의 나약함을 나타내는 표현이자 그 산물에 불과하며, 성경은 신성하면서도 원시적인 전설을 모아놓은 집합체다. 제아무리 정교한 해석도 내 의견을 바꿀 수 없다.”
하나님과 성경에 대한 이와 같은 아인슈타인 박사의 의견은 그가 아인슈타인 박사이기 때문에 더욱 권위 있게 들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잘 알려진 사실은 아니지만, 비록 아인슈타인은 뛰어난 세기의 물리학자이지만 역사와 종교에 대한 이해는 평범한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신에 대한 생각도 자연 자체가 곧 신이라는 철학자 스피노자의 생각을 따랐을 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사실을 고려하면, 그 편지의 내용은 그리 대단한 것이라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우주만 일평생 바라본 사람은 물리적인 우주가 전부이겠지요. 물리적인 우주를 아무리 연구하더라도 그보다 높은 초자연의 세계를 아는 지식은 얻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대의 과학과 과학적 견해를 무분별하게 추종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현실과 함께 초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두 세계의 균형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현실의 차원과 초현실의 영적인 차원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까요? 역사를 퇴행해서, 그 옛날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시대와 같이 현실과 초현실이 뒤섞인 그런 원시적인 모습으로 살고 믿어야 할까요? 그때는 모든 것이 다 신의 섭리였고 신의 역사였습니다. 우리 믿는 자들은 그렇게 살아야 할까요?
아니면 모든 것이 신이라는 현대적인 범신론적 사고를 하거나, 혹은 모든 것이 영적이라고 하는 현대적인 뉴에이지적 사고를 해야 할까요? 일부 현대인들은 메마르고 무의미한 삶의 돌파구를 그런 식으로 찾고, 그렇게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것도 아니라면, 일이 조금 꼬이고 감기 하나 걸린 것까지 모두 마귀 역사이고 귀신의 역사라고 생각하는 그런 미신적인 신앙생활을 해야 할까요?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올바른 신앙은 이런 모습들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신앙생활해야 할까요?
간단합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올바른 신앙 생활은 현실과 초자연의 두 차원을 두 차원으로 그대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두 차원을 합리적이면서도 균형 있게 연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올바른 신앙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행하심을 볼 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초자연적인 분이시지만, 우리에게 그분의 인격과 사랑과 말씀으로 역사하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하시고 말씀을 통해 합리적으로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그분의 초자연은 그야말로 초 자연이지, 몰 자연이거나 몰 상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이해와 생각을 초월하고 뛰어넘는 놀라운 것이지, 우리의 이해와 생각에 기괴하고 이상하고 인격적인 거부감이 드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산에 받은 율법은 그 시대 가장 뛰어난 선진적 법체계였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의 추악한 우상숭배 의식을 금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지금 말씀 드리는 것은 우리가 두 세계를 확고히 인정하되, 그 두 세계를 하나님의 바른 말씀과 우리의 건전한 상식 속에서 합리적으로 또 균형 있게 연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안 좋은 일이 다 마귀 역사는 아닙니다. 불행은 예고 없이 누구를 막론하고 일어날 수 있습니다. 어려운 선교지에서 신실히 섬기는 선교사님도 암에 걸려 안타깝게 돌아가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신실히 지키신다고 약속하셨지만, 그 약속은 그분이 우리를 기계적으로 지키시고 그래서 우리는 전혀 문제없는 평안한 인생을 산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우리 인생의 희노애락을 다 영적인 차원과 직접적으로 연결할 수 없습니다. 어떤 복과 불행은 하나님으로부터 오기도 하고, 어떤 복과 불행은 자신의 선택으로부터 오기도 하고, 어떤 불행과 사로잡힘은 악한 영으로부터 오기도 합니다. 물론 때로는 우연도 작용을 하죠.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다차원적인 우리 삶의 현상과 차원들을 말씀과 기도와 사고로 분별하며 살아야 합니다. 간혹 이해가 안 되는 일들도 있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나중에 깨달아지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실과 초현실이란 두 세계와 차원 속에서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아야 합니다. 보이는 현실만 추종하거나 믿어서도 안 되고, 보이지 않는 초자연만 추종하거나 신봉해서도 안 됩니다. 현실은 현실대로 인정하고 노력하고, 초자연은 초자연대로 믿고 받아들으면서, 그 두 차원을 지혜롭고 균형 있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이를테면 최선을 다해 시험공부를 하고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최선의 계획과 준비를 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것입니다. 물론 때로는 우리가 여건이 안 되어도 믿음의 강을 건너고 믿음의 도전을 해야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불어난 위험한 강물을 믿음으로 어리석게 건넌다든지, 무리한 교회 건축이나 개척을 무분별하게 시작한다든지 하는 것은 피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초자연과 우리의 현실을 지혜롭게 연결해야 합니다.

아울러 우리는 사탄의 초자연과 우리의 현실도 지혜롭게 연결해야 합니다. 말씀 드린 것처럼, 불행한 모든 일이 다 사탄의 역사는 아닙니다. 사탄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 방향에서 역사합니다. 불신자들을 향해서는 그들의 눈을 가리어 복음의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하고, 그들의 소망 없는 삶에 계속 머물도록 역사합니다. 신자와 교회를 향해서는 때론 거짓으로 때론 박해로 바른 삶과 바른 공동체를 무너뜨립니다. 그러나 신자의 삶과 교회가 무너지는 것은 스스로의 욕심과 잘못된 선택으로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탄의 역사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탄과 악한 영들은 과거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어둡고 각종 억압과 불의에 눌려있을 때에 직접적으로 역사를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밝아지고 보편적으로 깨이게 되면 직접적인 일차원적 역사보다는, 교묘하고 간접적인 고차원적인 역사로 공격합니다. 특히 인간의 문명과 사회가 고도화 될수록 정치 사회 경제 도덕 관습 등에 만들어지는 인간 실존의 구조가 고도화 되는데, 이를테면 정치 제도, 정부 조직, 사법 구조, 경제 체제, 사람의 사상 및 사고 체계 등이 그런 것입니다. 그런 인간 실존의 구조는 작은 규모의 회사나 교회나 유치원 같은 곳 안에서도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마귀는 그런 구조들을 통해 역사합니다. 바울은 그렇게 역사하는 사탄과 악한 영들을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이(엡6:12)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므로 사탄의 악한 역사를 막고자 하는 사람들은 우리 삶과 가정과 사회 가운데 있는 잘못된 구조에 대해, 그것이 바르게 되도록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잘못된 구조 속에 사탄은 강하게 활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예를 들면 담임 목회자 1인 중심 체제로 가지 않도록 하고, 직분이 계급이 되지 않도록 하고, 헌금 체계도 단순화하고, 지출도 투명하게 공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탄이 역사하는 구조와 통로를 막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점에서 여러분의 가정과 개인 생활도 영적인 구조를 점검 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돈을 어떻게 버는지, 어떻게 쓰는지, 나의 만족과 기쁨은 어디서 오는지...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마가복음 서문은 현실과 초자연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삶의 두 차원이고 두 세계입니다. 그것은 혼란스럽게 뒤죽박죽 섞여 있지 않지만,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물론 그 연결은 단순하지 않고 좀 복잡합니다. 그러나 마가복음 저자나 사도들이나 모두 그 두 차원과 세계를 하나로 이해하며 믿음과 분별의 삶을 살아갔던 것처럼, 아무쪼록 우리도 지금 그런 믿음과 분별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