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현실과 초자연 (1)

믿음찬교회 0 28 2023.06.07 18:38
현실과 초자연 (1)
막 1:2~13
2023.06.02.

지난번 우리는 마가복음 서문 말씀 안에 있는 광야와 성령이라는 두 단어에 주목했습니다. 그 두 단어는 모두 새로운 시작이라는 의미였습니다.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서 마가복음 서문을 역시 두 주요 관점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 두 주요 관점은 현실과 초자연입니다. 마가복음 서문은 현실을 보여줌과 동시에 현실 이면의 초자연적 현실을 보여줍니다.
마가복음 서문이 보여주는 현실은 이렇습니다. 세례요한이란 인물이 출현한 것, 그가 죄사함의 회개의 세례를 전파한 것, 그로 인해 큰 부흥 운동이 일어난 것, 그리고 그가 유대 지경의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푼 것, 그리고 한 인물이 북쪽 갈릴리에서 내려와 세례를 받은 것... 이런 내용들이죠.
그런데 마가복음 서문은 이와 같은 현실 외에 초자연적 현실도 보여줍니다. 그 초자연적 현실은 이렇습니다. 성경의 오랜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사실, 성령께서 임하시고 활동하시는 사실, 하늘이 갈라지고 하늘로부터 소리가 임한 사실, 광야에서 예수님과 천사 그리고 사탄과 들짐승이 대립하는 사실... 이런 내용들입니다.
이런 초자연적 현실은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예언의 성취도 눈으로 확인되는 일은 아닙니다. 성령의 비둘기 같은 임재와 활동도 시각적으로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늘의 갈라짐과 하늘로부터의 소리도 예수님 자신에게만 일어났을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보였다면 주위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했겠죠. 광야에서 일어나는 그 시험과 장면도 사람의 눈으로 보이는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 모든 내용은 우리의 현실 너머에 있는 초자연적인 현실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마가복음 서문 말씀이 이와 같은 두 개의 차원을 하나로 섞어서 우리에게 말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 설교는 바로 이 질문에 해답을 찾는 것이 목적입니다.

먼저 마가복음이 말씀하는, 그때 일어난 초자연적 실제와 현실을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마가복음은 성경의 오랜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마가가 소개하는 예언은 말라기 3:1과 이사야 40:3입니다.
말라기 3:1 말씀은 이렇습니다.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이 예언은 종말론적인 예언인데, 하나님께서 그날에 공의로운 심판과 회복을 위해 자신의 대리자와 사자를 보내신다는 내용입니다. 말라기는 그 사자를 엘리야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사야 40:3절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이 예언은 일차적으로 바벨론 포로 해방을 의미하지만, 최종적으로는 그날에 그들의 구원을 위해 마침내 하나님께서 오신다는 예언입니다.
그래서 마가는 이 두 예언을 합하여 선지자 이사야의 글이라고 소개하면서, 이 두 종말론적인 예언이 세례 요한의 출현으로 성취되기 시작한다고 말씀합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기록된 것과 같이 침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침례를 전파하니” 이 말씀은 이제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마가복음은 우리의 현실과 역사 안에서 성취되는 하나님의 예언을 말씀합니다. 비록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예언은 계속 성취되고 있고, 이것은 이 땅에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둘째, 마가복음은 성령께서 임하시고 활동하시는 초자연적인 모습을 말씀합니다.
세례 요한의 출현과 마찬가지로 성령의 출현 자체도 종말론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그분이 이 땅에 오셔서 활동하신다는 것 자체가 종말이 시작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마가복음은 성령께서 예수님에게 임하시고, 또 그분을 광야로 이끄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또 예수님이 장차 우리에게 성령으로 침례를 베푸신다고 말씀합니다.
이 모든 성령의 임재와 활동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초자연적인 일입니다.
이렇게 마가복음은 초자연적인 그분의 임재와 분주한 활동을 마치 무대의 커튼 뒤를 걷어 보여주는 것처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셋째, 마가복음은 하늘이 갈라지고 하늘로부터 소리가 임하는 초자연적인 일을 말씀합니다.
복음서를 비교해보면, 다른 복음서는 ‘하늘이 열린다’라고 말씀하는데, 마가복음은 ‘하늘이 갈라진다’라고 특별하게 말씀합니다. 마가복음은 ‘갈라진다’는 이 생생한 표현을 나중에 한 번 더 사용하죠. 바로 15:38에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질 때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안에서 1장과 15장의 두 사건은 같은 의미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늘이 갈라졌지만, 만약 그때 우리가 그 현장에 있었다면, 무엇을 보았을까요? 우리는 그저 갈릴리에서 내려온 한 인물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모습을 볼 뿐입니다. 아니면 그분이 세례를 받고 걸어나오며 잠시 하늘을 바라보는 모습을 볼 뿐입니다. 우리가 그 장면에서 뭘 더 볼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마가는 그때 일어난 초자연적인 놀라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고, 하늘로부터 소리가 납니다. 네, 이것은 정말 엄청난 일입니다. 인간 수천 수만 년의 역사 속에 하늘이 열리고, 신의 영이 어떤 형체로 임하고, 하늘의 소리가 직접적으로 들리는 것은 극히 드문 일입니다. 그중 하나만 일어나도 놀라운데, 그 3가지가 동시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놀라운 사건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인식하게 됩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는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아무리 높아도 인간이고 아무리 똑똑해도 인간입니다. 우리는 다른 차원을 볼 수 없고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와 같은 인간의 고민과 한계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동일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마가복음이 말씀하는, 하늘이 열리는 이 초자연적인 사건을 놀랍게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초자연적인 사건이 가리키는 예수님을 주목하면서, 그분의 삶을 주의 깊게 따라가 보아야 합니다. 

넷째, 마가복음은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고, 또 천사의 수종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는 초자연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장면은 정말 영화의 한 장면 같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광야에 예수님이 홀로 계시고 들짐승이 주변에 배회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영의 눈으로 그 현장을 다시 보면, 거기에 사탄과 천사가 있고, 치열한 시험과 영적 대결과 긴장이 흐르고 있습니다. 들짐승은 아마 그런 의미를 현실과 영적인 차원에서 동시에 보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가복음은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하는 내용에 대해선 말하지 않고, 다만 이와 같은 초자연적인 장면만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장면을 통해, 이후 예수님께서 겪으시는 세상의 반발과 고난의 배후에 사탄이 존재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상으로 우리는 마가복음 서문에 있는 초자연적인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렇게 마가복음은 세례 요한의 출현과 그의 세례 운동, 그리고 예수님의 세례와 광야에서의 모습을 현실적으로 보여주면서, 동시에 그 현실 이면에 있는 초자연적이고 영적인 역사와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서문 말씀의 이와 같은 목적과 의도는 무엇일까요?
네, 예수님의 공생애 이야기와 사건은 눈에 보이는 차원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초자연적이고 영적인 차원에서 균형 있게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지금 이 세상과 우리 삶에도 이와 같은 현실과 초현실이 함께 흐르고 있고, 우리는 그런 두 개의 균형 속에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내용에 대해선, 다음 시간에 좀 더 살펴보고 은혜와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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