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그리스도인의 확신

믿음찬교회 0 79 2023.04.30 11:57
그리스도인의 확신
요일 3:17~24
2023.04.30.

새삼스러운 말씀이지만, 한 사람이 성경을 잘 안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성경을 많이 읽고 성경 말씀을 많이 암송하고 어떤 말씀이 어디에 있고... 이런 것을 잘 아는 사람이 성경을 잘 아는 사람일까요?
성경을 잘 알려면 당연히 성경을 많이 읽어야 하겠지만, 그러나 그것도 어느 정도 되면 그때부터는 많이 읽는다고 성경을 잘 알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 암송도 마찬가지입니다. 100구절 200구절 암송을 하고 혹은 옛날 서당에서 천자문 암송하듯이 성경 한 권 전체를 암송한다 해도, 그러나 그것도 어느 정도 되면 그때부터는 아무리 암송해도 성경 지식이 늘어나지는 않습니다.
어떤 말씀이 어디에 있고 비슷한 말씀이 어디에 있고 성경의 인물들과 사건들이 무엇이고 ... 이런 것을 많이 알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곧 성경을 잘 아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런 모든 것은 성경을 단편적으로 파편적으로 아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잘 안다는 것은 성경 말씀을 쭉 읽을 수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 구절에서 시작하여 흐름이 끊기지 않고, 문맥이 끊기지 않고... 그렇게 말씀을 쭉 읽으며 내용을 이해하고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을 때, 그것이 성경을 잘 아는 것입니다.
박경리 작가의 토지라는 소설이 아주 유명한 대하소설이죠. 토지라는 소설을 잘 안다는 것은 단순히 그 소설을 여러 번 읽어서 몇 권에 어떤 이야기가 나오고 어떤 인물이 무슨 일을 했고... 그런 내용들을 단편적으로 잘 아는 것이 아니라, 전체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고 그래서 작가가 결국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그것을 아는 것이 바로 그 소설을 잘 아는 것입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몇 장 몇 절 말씀 ...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죠. 본래 성경은 장 절 구분이 없었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장 절 구분은 중세 때 편의상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므로 몇 장 몇 절 말씀에 단순히 은혜를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경을 쭉 읽으면서 지금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말씀하고 어떤 의미로 말씀하고 그래서 어떻게 진행되고 그래서 전체적으로 어떤 메시지를 우리에게 주시는지... 거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이렇게 성경 말씀의 나무를 지나 숲 전체를 볼 수 있을 때, 그런 분이 성경을 잘 알고 성경에 밝은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설교를 시작하면서 이와 같은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바로 오늘 본문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요한일서는 한 절 한 절은 그리 어렵지 않은 말씀이지만, 문맥이나 흐름은 어려운 말씀입니다. 지금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이 말씀을 지금 여기서 왜 하는지... 이런 내용은 언뜻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우선 우리가 잘 아는 말씀에 눈이 갑니다. 17~18절 말씀에 눈이 가고, 22절 말씀에 눈이 갑니다. 그래서 대략 오늘 본문의 의미를 ‘진실한 참된 사랑을 하도록 하라... 그러면 우리는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받는 귀한 복을 받게 된다...’ 이렇게 생각하는 분도 계실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전체적인 의미와 초점은 ‘사랑’에 있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의 의미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확신’입니다. 그 이유는 사도 요한이 이와 같은 말씀을 계속 거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9절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21~22절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받나니...” 24절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이 말씀들은 모두, 공동체 안에 남아있는 신자들을 향한 확신의 메시지입니다.

그러면, 사도 요한은 왜 지금 이 확신의 메시지를 말씀할까요?
사도 요한은 앞서 본론 1부에서 확신의 메시지를 한 차례 말씀한 바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기름부음’이었습니다. 공동체를 나간 자들이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영적인 지식’에 대항하여, 우리는 ‘주님의 기름부음’을 소유하고 있다고 확신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그와 같은 확신의 메시지를 본론 2부에서 한 번 더 말씀해야겠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공동체를 나간 자들이 교회와 신자들을 미혹하고 어지럽혔던 가르침들은 ‘그노시스’라고 하는 ‘영적인 지식’ 외에도 많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구체적인 내용을 정확히 알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거울로 삼아 그들의 주장을 대략 추정해 보면, 다음과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우리는 영적인 지식을 소유하고 있고, 따라서 우리는 진리에 속해 있다.”
“우리의 영은 우리의 몸과 구별되어 온전히 하나님께 속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겐 사실상 죄가 없고 자책할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거룩한 영적인 지식을 통해,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거하신다.”
분명히 그들은 이와 같은 많은 혼란스러운 가르침을 말했을 것입니다. 영과 몸, 영적인 지식, 진리, 하나님과의 교제... 그들은 서슴없이 이와 같은 영적인 단어들을 사용하며 자신들의 신앙을 포장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만일 이와 같은 그들의 주장에 교회가 제대로 대항하지 못하면, 공동체 안에 있는 연약한 많은 사람들이 크게 미혹 당할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사도 요한이 이렇게 그들이 주장하는 내용으로 그들을 반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영적인 지식을 말하며 진리에 속해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러나 한 사람이 진리에 속해 있다는 확실한 증거는 이론적인 영적인 지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사랑의 삶에 있다”
“신자에게 자책이나 죄책감은 없는 것이 정상이 아니라 있을 수 있는 것이 정상인데,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과 허물 하나하나를 문제 삼고 지적하시는 분이 아니라, 부모가 사랑하는 자녀를 대하는 것과 같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 마음과 삶과 상황 전체를 보시고 이해해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비밀스런 영적인 지식으로 그렇게 이론적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그분을 사랑하고 믿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삶으로 오직 가능하다. 우리가 그렇게 살면 삼위일체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는 주 안에 주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참된 역사가 일어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우리 안에 계신 성령으로 분명히 알게 된다.”
우리는 이와 같이 사도 요한이 그들의 잘못된 주장에 맞서, 우리의 구원과 신자로서의 정체성과 믿음의 확신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는 내용을 잘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이 내용은 말하자면, 사도가 직접 말씀하는 신자의 확신이자 구원의 확신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구원의 확신은 오늘날 우리 교회들이 신자들에게 매우 중요하게 가르치는 가르침 중 하나입니다. 한국교회는 대략 1970~80년대부터 복음주의 선교단체를 통해 구원의 확신 개념을 접하고 그때부터 강조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교회사 전체로 보면, 중세 이후 구원론이 체계적으로 생기면서 구원의 확신 개념도 생기게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와 같은 구원의 확신은 우리 교회 안에서 매우 일반화된 내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일반적으로 접하고 있는 구원의 확신이 과연 성경적인가... 그런 의문과 회의가 있습니다. 비록 성경의 여러 말씀을 통해 나름의 체계적인 구원의 확신 가르침을 만들었지만, 그러나 한편으로 그것은 신자에게 구원의 확신을 주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편으로 도움도 되고 유익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부작용이 있습니다.
성경적인 올바른 구원의 확신과 믿음의 확신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이론적인 구원의 확신 혹은 주관적인 자기 확신에 가까운 구원의 확신을 만드는 부작용이 많습니다. 그래서인지 전혀 신자로서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이 구원의 확신만 배워서 구원의 확신만 매우 강하게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전한 자기중심과 선한 열매의 부재 속에 구원을 걱정해야 할 사람이 정작 구원을 걱정하지 않는 그런 부작용을 낳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을 이론으로 배울 수 없는 것처럼, 신앙과 구원을 그렇게 논리와 이론과 신학으로만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 사도 요한의 말씀을 통해 그런 잘못된 구원의 확신이 아니라 올바른 구원의 확신을 어떻게 가져야 하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 요한의 말씀을 다음 3가지 내용으로 다시 정리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구원의 확신과 진리에 속한 확신은 분명히 우리의 삶과 실천으로부터 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18~19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사랑의 실천과 사랑의 진실함... 우리에게 그와 같은 참된 모습이 있을 때 그것이 우리가 어떤 사람이며 어디에 속해 있는지를 최종적으로 말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요한은 여기서 사랑 하나만 말씀하지만, 좀 더 확장하여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선하고 의로운 사랑의 삶... 우리에게 그와 같은 삶이 이루어질 때 우리는 구원의 확신과 믿음의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힘과 행위로 구원을 도모한다는 행위 구원의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은 그런 선하고 의로운 사랑의 삶을 통해 확인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변화된 마음과 의지를 가지고 그렇게 삶의 길을 걷고 있다면, 우리는 언제나 구원의 확신과 믿음의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에 반해, 이단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잘못된 구원의 확신은 이론적이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실제 신자의 삶을 말하지 않고, 영적인 지식이나 특정 신학이나 성경 해석이나 성경 구절을 말하며 그것을 믿고 구원의 확신을 가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구절이라 할지라도, 나에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과 의지와 생각과 실천이 없다면, 아무리 그것을 믿어도 그것은 자기 확신과 자기 신념밖에 되지 못합니다.
그러면, 이와 같은 이론적인 잘못된 구원의 확신은 왜 초대교회부터 지금까지 계속 나오고 있을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람은 그런 쉬운 구원과 쉬운 구원의 확신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마음으로 믿기만 하면, 특정 신학이나 성경 해석을 믿기만 하면, 영적인 지식을 알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하니, 너무 쉽고 좋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한결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그리고 예수님은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하는 빌립과 왜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지 않으시냐고 묻는 유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자신을 사랑하고 말씀을 지키는 사람에게, 삼위일체 하나님은 임재하시고 함께 하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언제나 신앙의 방점은 삶과 실천에 찍혀야 합니다. 신앙과 믿음은 행함으로 완성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비록 부족하지만 그렇게 살고 있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믿음의 확신과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고, 그것이 성경적인 올바른 확신입니다. 

사도 요한이 말씀하는 두 번째 내용은, 20절과 21절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신자의 죄와 자책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원을 받고 구원의 길을 걷고 있지만, 여전히 실수도 하고 잘못도 하고 죄를 짓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아직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가 아무리 홀로 사막과 동굴에서 영성을 추구해도, 완전한 성화는 그날에 이루어지고 지금 우리는 구원받은 죄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한편으론 의롭게 살아가고, 한편으로 죄와 허물을 고백하고... 그렇게 균형있게 살아가야 합니다. 과도한 경건주의도 안 되고, 완전히 세속주의도 안 됩니다. 우리는 믿음과 현실 사이에서 최선을 다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와 잘못에 빠지고 스스로 자책할 것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런 죄 문제는 특히 믿음이 순수하고 좋은 분들 중에 나타날 수 있고, 그래서 자신을 자책하고 자기 정죄와 자기 비하에 빠지는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생기면, 악한 사탄이 그것을 알고 그런 순수한 신자에게 찾아와 역사하고 괴롭힙니다. 죄책감과 자책감과 자기 정죄의 마음을 더욱 불러일으키고 증폭시킵니다. 사도 요한의 교회 공동체 안에는 그렇게 힘들었던 순수한 신자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 사도 요한은 그런 분들을 위해 이 21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신다... 이 말씀은 굉장히 은혜로운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비록 우리가 범죄하여 스스로 정죄하고 자책하고 힘들어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정죄와 자책의 마음과 생각을 넘어 우리의 삶과 마음 중심과 상황 전체를 보시고 판단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아직 영적으로 미숙하고,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의 모습을 마치 사랑하는 부모님처럼 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잘못을 단편적으로 보시지 않고, 전체를 보시고 전부를 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렇게 크고 섬세하신 분이심을 예수님을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 온 안타까운 한 여인이 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 여자를 예수님 앞에 세우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만약 예수님이 그들의 말대로, 좁게 율법으로만 보셨다면, 율법대로 처리하라고 말씀하실 수밖에 없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여인을 고소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도도 보시고, 잡혀 온 안타까운 여인의 마음 중심도 보시고, 그 일이 일어난 상황도 보시고, 율법도 보시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모든 것을 보시고 아시는 가운데 최종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모든 것을 보시고 전체를 보시는 그와 같은 예수님의 모습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을 잘 반영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잘못하고 실수할 때마다, 기다렸다는 듯이 문제 삼고 책망하고 벌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 전체를 보시고 우리 마음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와 같은 하나님의 시각과 사랑과 자비를 알아서, 죄를 고백하고 죄책감과 자책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영적으로 눌리지 말고, 사탄이 그것을 이용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영적인 생활을 잘 하면, 우리는 신자로서 믿음의 확신과 구원의 확신을 잘 지켜나갈 수 있습니다. 

믿는 자의 확신에 대한 사도 요한의 세 번째 말씀은‘성령님’입니다.
24절 후반절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심을 우리가 알면, 그것은 우리 신자의 확신에 가장 큰 확신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영이신 성령님의 임재를 눈으로 볼 수 없기에, 그분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알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이시고,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입니다. 우리의 지각을 초월하시고, 우리가 느낄 수 없고 볼 수 없는 분이십니다.
방언을 한다든지, 몸이 뜨거워진다든지, 환상을 본다든지... 언제나 그렇게 현상을 동반하고 현상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는 전혀 성령님을 알 수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령님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 안에 그저 가만히 계시는 분이 아니라, 일하시고 역사하시고 행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조명해 주십니다. 조명해 주신다는 말은 말 그대로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비추어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알게 되고 깨닫게 되고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일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조명이 없기 때문에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합니다. 딱딱한 길가 밭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님의 역사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고 알고 싶고 따라가고 싶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지금 여러분들이 여기에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조명과 말씀의 성장을 통해,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님의 또 다른 역사는 죄에 대한 불편함과 거부와 회개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시면 우리는 편안하게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작은 거짓말이라도 하려고 하면, 마음이 무척 불편하고 걸립니다. 때로는 모르고 했던 과거의 잘못이나 행동들이 아프게 생각나기도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시지 않으면, 우리는 죄에 대해 무뎌집니다. 죄가 편안해지고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뻔뻔해지고 거짓말도 쉽게 합니다. 불법을 저질러도, 사람들이 모르면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도 모르는데 무슨 문제가 되나...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타락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시면, 죄와 거짓은 우리 안에 공존할 수 없습니다. 죄를 지을 수 있지만, 가시처럼 반드시 그것을 고백하고 처리하고 토해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에 대한 이와 같은 영적인 생활을 통해,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성령님의 역사는, 하나님의 평강입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시면, 그분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깊은 평안과 위로와 안정감을 만들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편으론 걱정되고 힘들고 어렵지만, 한편으론 그것과 전혀 다른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생기게 됩니다. 우리의 생각과 이해를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평강, 우리의 답답한 현실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계획과 방법... 그런 것을 보게 하시고 듣게 하십니다. 룻기의 나오미와 룻은 그런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이해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평강이 언제나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확신에 대한 말씀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고 천국 길을 걸어가고 있는지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첫째는 우리의 선하고 의로운 사랑의 삶이 있을 때, 둘째는 우리의 잘못과 죄책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할 때, 셋째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의 역사를 경험할 때... 우리의 믿음은 견고한 믿음이 될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최선 속에, 이렇게 확신의 신앙으로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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