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

믿음찬교회 0 95 2023.04.02 12:05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
요일 3:1~10
2023.04.02.

오늘 본문은 요한일서 전반부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요한일서는 지금까지 이런 주제를 가지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 예수님, 사랑, 이 세상, 공동체...
하나님은 이런 분이신데 너는 그런 하나님 믿을 수 있는가?,
예수님은 이런 분이신데 너는 그런 그분의 계명 지킬 수 있는가?,
그분의 계명 중에서 가장 큰 계명은 사랑이고 형제 사랑인데 너는 할 수 있는가?,
너는 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가?,
너는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그의 기름부음과 가르침 안에 거할 수 있는가?
이렇게 요한일서는 우리를 초청하며 말씀했습니다. 이제 요한일서는 전반부를 마무리하면서 마지막 주제를 말씀하고자 합니다. 그 마지막 주제는 바로 우리의 죄입니다.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는 죄를 짓지 않는데, 너는 그런 생활을 할 수 있는가?
오늘 설교는 이 내용을 살펴보고, 은혜와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사도 요한의 이 말씀은 오늘 종려주일과 고난주간을 맞은 우리에게 참 시의적절한 말씀이라고 생각됩니다.
2,000년 전 오늘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습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했죠.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은 마냥 기쁘고 좋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그때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3가지 사역을 남겨두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아무도 모르는 예수님만의 사역이었습니다.
첫째는, 예루살렘 성전 당국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나아가 마침내 성전의 문을 닫고 성전시대를 끝내는 사역을 하셔야 했습니다. 둘째는, 성전을 대체하는 새로운 믿음의 역사와 공동체를 시작하셔야 했습니다. 셋째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의 구주가 되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이런 계획과 마음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은 다 예수님의 죽음과 피를 요구했습니다.
성전 당국을 성전에서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것도 죽음으로 귀결되고, 그분의 새로운 공동체도 그분의 죽음과 피로 세워지고, 우리의 구원도 그분의 죽음과 대속의 피로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종려주일과 고난주간에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자신의 아들의 죽음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기꺼이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그 크신 사랑과 은혜를 항상 기억하고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 크신 사랑과 은혜를 잊지 않는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우리가 매번 고난주간을 단지 십자가를 묵상하며 마음 아파하며 동참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고난주간을 감사와 애도와 경건의 시간으로 보낼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통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그 뜻을 다시 한번 되새기고 결단하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주님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는 뜻 깊은 일이라 믿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크신 사랑과 은혜로 우리를 그분의 자녀 삼아주신 것을 말씀하며, 한 가지 새로운 생활을 말씀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죄에 대한 새로운 생활입니다.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미래의 소망을 가진 우리가 죄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고, 어떤 생활을 해야 하는지... 사도 요한은 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너무나 당연한 말씀이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지어선 안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죄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우리 주님의 그 귀하신 죽음을 통해 죄가 무엇인지 압니다. 다른 종교에도 죄가 있고 일반 사람들도 죄를 알지만,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우리 인간의 문제인지... 얼마나 우리를 지배하는지... 얼마나 우리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지... 우리 그리스도인들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는 죄악으로 무너진 이스라엘의 가련한 영적인 모습을 이렇게 말씀한 바 있습니다.
“주께서 기쁘게 공의를 행하는 자와 주의 길에서 주를 기억하는 자를 선대하시거늘, 우리가 범죄하므로 주께서 진노하셨사오며 이 현상이 이미 오래되었사오니, 우리가 어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사64:5~6)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이 말씀은 죄를 지은 인간의 영적인 모습을 단적으로 묘사하는 말씀입니다. 죄를 짓지 않은 의인은 하나님을 의뢰하며 영원히 요동치 않지만, 죄를 지은 악인은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존재가 됩니다. 아무리 큰 힘과 재물이 있어도 악인의 길은 망하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죄가 무엇인지, 말씀을 통해 경험을 통해 성령의 가르치심을 통해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도 하나님을 모르고 구원받지 못했을 때에는 죄를 잘 몰랐습니다. 죄가 죄인 줄 모르고, 죄의 심각성도 모르고, 죄와 함께 아무렇지 않게 같이 살았습니다.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숲속을 걸어가는데 비가 많이 내리고 날씨는 추웠습니다. 그 사람은 마침 큰 나무의 밑둥을 발견하고 거기 들어갔습니다. 캄캄하고 어두웠지만 아늑하고 비를 피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한참을 쉬는데 아무래도 이상한 것 같아 라이터를 켜봤습니다. 그리고 깜짝 놀랐습니다. 조금 떨어진 곳에 뱀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비록 아직 밖에 비가 내리고 춥지만, 주저 없이 그곳을 나와 다시 길을 걸어갔습니다.
이 짧은 예화에서 뱀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네, 죄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처음에 그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고 죄를 모르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그 사람은 하나님을 믿고 빛을 보고 죄를 알게 된 사람을 의미합니다. 모를 때에는 죄와 함께 아무렇지 않게 살았지만, 이제는 더이상 그렇게 살 수 없죠. 비록 밖에 여전히 비가 내리고 추워도, 우리는 그 사람처럼 죄와 결별하고 길을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예화는 죄에 대한 새로운 생활을 가르쳐주는 예화입니다. 이렇게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죄에 대한 새로운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전에는 죄를 잘 몰랐지만, 이제는 죄를 알고 죄와 결별하고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비록 조금도 실수하지 않거나 하나도 죄를 짓지 않을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자녀라는 우리의 신분을 인식하고 죄를 짓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교회와 신자들의 모습을 보면, 많은 교회와 신자들이 오늘 하나님 말씀의 철저함과 달리 죄를 쉽게 생각하는 모습이 많습니다. 죄를 지어도 쉽게 용서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이미 우리의 죄는 모두 용서받았다고 생각하고, 또 심지어 요한일서의 이 이단자들처럼 죄를 짓지만 죄가 없다고 하고 죄가 아니라고 하고 그렇게 스스로 합리화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죄를 쉽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여기서 불법은 좀 더 정확히 번역하면, 법이 없다는 의미의 무법입니다. 헬라어로는 ‘아노미아’이고, 영어로는 ‘lawlessness’입니다. 이 말에서 사회학적 용어인 ‘아노미 현상’ 혹은 ‘아노미 상태’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법이 없는 무질서하고 혼란스런 인간의 모습과 상태... 네, 그것이 죄입니다. 그렇습니다. 죄는 하나의 상태와 상황을 말하는 의미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복이 하나의 상태와 상황인 것처럼, 죄도 하나의 상태와 상황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이 말씀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복이 있고,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는 의미로 들립니다. 우리는 복을 전통적으로 이와 같은 개념으로 이해하여 새해가 되면 복을 주고 받습니다.
그러나 보다 정확한 번역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되도다 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의 복된 상태에 있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당장 돈이 생기고, 당장 문제가 해결되고, 당장 좋아지는 것 아니지만, 마치 아기가 어머니 품에 안겨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평안과 은총 가운데 있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복되도다’라는 말씀은 그런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 4절에서 죄를 가리켜, 무법을 행하는 것이고 무법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반대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없고 하나님의 법이 없는 무질서하고 어둡고 혼란한 상태... 사람이 그런 상태에 있게 되면 거기서 수많은 구체적인 죄들이 생기게 됩니다. 거짓말, 탐욕, 교만, 이기심, 무절제, 음행, 미움과 정죄... 그러므로 여러분과 저는 이런 죄된 상태에 빠지지 말고, 하나님이 있고 하나님의 법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죄를 이렇게 우리가 이해하면, 5절 말씀도 잘 이해됩니다.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이 말씀은 단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대속하셨다는 것만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을 말씀합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법이 없는 그와 같은 무질서하고 어둡고 혼란스러운 죄된 상태에서 벗어나고 해방되어, 이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 안에서 살도록 하기 위해 오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십자가의 의미는 단순한 용서와 대속이 아닙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찬양하며 우리 죄가 용서받고 대속 받은 것을 감사하지만, 그러나 많은 신자들은 거기에서 멈추고 하나님께로 가지 않고 여전히 자기 삶을 삽니다. 이것은 우리가 오늘 본문을 포함하여 이 5절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예수님의 뜻은 단순히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대속하시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우리 삶의 본질과 상태를 바꾸시어, 우리가 하나님이 있고 하나님의 법이 있는 상태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런 영적인 상태에 있게 되면, 6절 말씀이 이루어집니다.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9절 말씀도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네, 물론 이 말씀은 우리가 전혀 죄를 짓지 않는다거나 전혀 실수하지 않는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구원받고, 하나님으로 거듭나고, 이제 그분 안에 거하고,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하는 사람이 되면... 계속 죄를 짓거나 고의로 죄를 짓거나 계속 죄된 상태에 거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오래된 교회의 해석입니다. 대표적으로 요한 웨슬레도 이렇게 해석했죠. 그래서 이 말씀은 표현 그대로 이해해서, 한번이라도 죄를 짓는 자는 무조건 마귀에게 속하거나,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전혀 죄를 짓지 않는다는 그런 의미로 해석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이 말씀은 우리 삶의 현실이나 다른 성경 말씀과 조화가 되지 않고, 요한일서 안에서도 1:8,9,10 그리고 2:1과 조화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사도 요한은 누가 보아도 모순되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을까요?
많은 학자들은 사도 요한이 이렇게 말씀한 이유와 배경에 그 사람들, 즉 공동체를 나간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을 염두에 두고 이와 같이 두렵고 강경하게 말씀하는 것이고, 또 무엇보다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그들의 잘못된 주장을 가져와서 그들의 주장과 그들의 삶이 얼마나 차이를 보이고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말씀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 말씀의 숨겨진 배경을 그렇게 이해하면서, 이 말씀과 1:8~2:1 말씀을 조화시키고 다른 성경 말씀과도 조화시키고 우리 실제 삶과도 조화시키는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않는다’는 이 말씀을 ‘계속해서 죄를 짓지 않는다’는 일반적인 의미로, 또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지금 하나님 안에 거하고 있다면, 그런 전제조건 아래에서는 당연히 죄를 지을 수 없다’는 근본적인 의미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다시 말씀드려,, 하나님 안에 거하는 신자는 계속 죄를 짓거나 고의로 죄를 짓거나 계속 죄된 상태에 거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혹 잘 모르고 죄를 짓거나 혹 실수로 죄를 지을 수 있지만, 나중에 알게 되고 깨닫게 되면 반드시 죄를 고백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혹 알면서도 고의로 죄를 짓거나 혹 알면서도 연약함으로 죄를 지었을 때에는, 그것이 상한 음식처럼 가시처럼 걸려서 나중에라도 반드시 토해내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씨가 거하는 사람은 죄를 결코 소화할 수 없습니다. 동물 중에는 썩은 고기를 먹고도 아무렇지 않은 동물이 있긴 하지만, 사람은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참된 신자라면, 죄를 그렇게 편안하고 아무렇지 않게 소화할 수 없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 사람은 무언가 영적으로 크게 잘못되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사실... 사도 요한은 그런 사람을 이렇게 두렵게 말씀합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나의 행동이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에 위배되고, 나로 인해 누군가 눈물 흘리고, 나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이 욕되고, 나로 인해 공동체가 어려움을 겪고, 나로 인해 잘못된 결과가 너무나 뚜렷한데... 그것이 자기 속에서 합리화되고 무마되고 간과되고 아무렇지 않고 죄를 지었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는 마귀에게 속한 사람이 되고, 그 중간은 없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에게 속하든지, 마귀에게 속하든지 둘 중 하나가 됩니다. 현대인들은 사람이 스스로 자기의 영적인 위치를 선택할 수 있다고 믿고 싶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능가할 수도 없고 마귀도 능가할 수 없습니다. 성령 충만 아니면 귀신 충만이고,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면 마귀의 자녀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같은 두려운 영적인 세계를 이해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따라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 이 말씀의 의미는 분명합니다. 영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는 분명히 구분됩니다. 양은 양이 되고 염소는 염소가 됩니다. 알곡은 알곡이 되고, 가라지는 가라지가 됩니다. 이 마지막 때에 그와 같은 영적인 구별은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죄에 대한 경각심과 분별력을 다시 한번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사람이 조금 거짓말 할 수도 있고, 조금 죄를 지을 수도 있지...’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것은 세상의 소리입니다. 잘못된 상한 것인 줄 알면서, 땅에 떨어진 더러운 것인 줄 알면서, 그것 조금 먹을 수도 있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죄는 우리가 먹을 수 없고 소화할 수 없는 음식입니다. 우리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사람이 되어선 안 됩니다. 데살로니가전서는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은 죄를 알고 죄에 대해 새로운 생활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쪼록 우리 성도님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적인 정결함 속에, 마귀의 일을 멸하러 오신 주님의 뜻을 따라, 선하고 아름답고 경건하게 살아가시는 귀한 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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