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봉하지 말라 (1)
계 22:10
2023.02.10.
우리는 지금 요한계시록 결론 말씀을 계속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요한계시록 결론의 세 번째 내용입니다.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인봉하지 말라는 말씀은 요한계시록을 믿는 자 누구나 볼 수 있는 열린 책으로 삼으라는 의미입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 여기에 대해 요한계시록은 짧게 말씀합니다. ‘때가 가까우니라.’
그래서 오늘 설교는 인봉하지 말라는 말씀의 이와 같은 이유와 의미에 대해 살펴보고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와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먼저 이 말씀을 하신 이유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이유는 ‘때가 가깝다’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때란 주님의 재림과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입니다. 이 두루마리의 말씀은 그 때를 예언한 말씀인데 그 때가 지금 가깝기 때문에 이 말씀은 인봉되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네, 이건 누구나 쉽게 이해되는 내용입니다. 때가 가까우니 봉하면 안 되겠죠.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사실 다른 데에 있습니다. 그것은 ‘때가 가깝다’고 했지만, 아직도 때는 오지 않은 것입니다. 이 말씀이 쓰인 2,000년 전에 가까웠다면, 2,000년 후인 지금은 벌써 종말이 오고도 남고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고도 남아야 하는 것이죠. 이런 의문은 상식적이고 정당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종말의 지연 문제는 오늘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1세기 당시에도 종말의 지연은 당시 교회와 신자들을 힘들게 했습니다.
1세기 중반 비교적 이른 시기에 기록된 마가복음은 ‘임박한 종말론’을 말하고 있죠.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막4:29) 그와 같은 임박한 종말론 신앙은 당시의 일반적인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재림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AD 70년 마침내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성전이 유린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종말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역사는 무심히 계속 진행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교회와 신자들은 임박한 종말론 신앙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예수님의 말씀을 잘못 이해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지연된 종말론’을 말하게 됩니다. “그런즉 가라지를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마13:40),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눅19:12)
그리고 더 뒤에 나온 요한복음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실현된 종말론’을 말하게 됩니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3:18)
이와 같은 요한복음의 실현된 종말론의 의미는 이제 종말의 시기는 그것이 언제이든 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말에 대한 이와 같은 성경 말씀을 통해, 그 때와 시기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상식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여기에 우리의 상식을 넘은 내용이 있지 않은가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곧 온다고 하셨고 때가 가깝다고 하셨으니 종말이 금방 올 것이라 믿는 것이 상식이겠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계산은 우리와 차이가 있음을 인정하여서 그 시기를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아 이 말씀을 기록하고 그날을 바라보았죠. 요한의 눈에 그날은 매우 가깝게 보였을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날을 요한에게 분명히 매우 가깝게 보여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이유는 그런 임박한 종말론적 신앙이 당시 신자들에게 매우 필요했고, 또 이후 종말을 사는 모든 신자들에게도 역시 필요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이 요한을 일부러 오해하게 하셨거나, 혹은 요한이 계시를 잘못 오해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요한은 예언자로서 때와 시기에 대한 이와 같은 계시의 영적인 특성과 이중 삼중적 의미를 잘 이해했을 것입니다.
비록 먼 훗날의 일도 영적인 차원에서는 바로 내일의 일로 말할 수 있죠. 비탈을 굴러 내려가는 돌은 반드시 산 아래에 도달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확실성의 차원에서 그것을 내일의 일로 가깝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계시는 어느 하나의 사건으로 성취되기보다는, 예비적 성취가 있고 또 예비적 성취가 있고 그리고 마침내 온전히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AD 70년 예루살렘 멸망과 성전 몰락은 온 세상 종말의 예비적 성취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계시의 영적인 특성과 이중 삼중적 특성을 이해해서, 때가 가깝다는 이 말씀을 우리의 상식의 차원이 아니라 믿음과 영적인 차원에서 잘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지금도 그렇습니다. 종말은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세상 끝날은 오지 않았습니다. 아직 우리는 그날과 그때를 모릅니다.
그러나 비록 세상 끝날과 최후의 종말과 그날과 그때는 모르지만, 지금 우리 모두에게 그때는 항상 가깝습니다. 1세기 신자들에게도 그때는 가깝고, 오늘 신자들에게도 그때는 가깝습니다. 그날이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종말을 가리키는 소위 ‘종말 지수’는 언제나 꽉 차 있습니다. 세상의 어둠은 언제나 마지막 그날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밤에 오셔도 이상하지 않고, 내일 오셔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이번 주 내내 50억 퇴직금과 600만원 장학금에 대한 판결로 소란스러웠습니다. 하나는 무죄가 되고, 하나는 정죄가 되었습니다. 이것만이 아니죠. 한쪽은 작은 죄도 큰 죄로 정죄하고, 한쪽은 태산 같은 분명한 죄도 못 본 척 합니다. 이것은 내가 어느 정당을 지지하느냐 하는 문제와 관련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정의를 구하는 믿는 자로서 바르게 생각해야 할 우리의 현실들입니다.
한편, 어두운 세상만큼이나 우리 교회 현실도 매우 어둡습니다. 어떤 교회는 남의 땅 밑을 파 예배당을 만들고 거기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교단 헌법을 어겨 세습을 했는데, 결국 교단 재판국이 그것을 승인했습니다. 세습을 하길 원하면 차라리 교단을 탈퇴하든지 아니면 교단 법을 고치든지... 그러나 그 교회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결국 세습을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세상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이런 말기적이고 종말론적 현상이 매우 만연해 있습니다. 오늘 밤 주님이 오셔도 이상하지 않은 시간입니다.
여러분, 세상의 종말은 의인이 소멸하고 교회의 빛이 꺼지면 세상의 종말이 오게 됩니다. 소돔은 그 거민들이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타락했기 때문에 종말을 맞았습니다. 성전의 몰락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올바른 말씀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타락했기 때문에 결국 무너졌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오늘날이 그와 같기 때문에, 이 예언의 말씀은 인봉되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인봉하지 말아야 할 둘째 이유는, 이 말씀이 이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이 다니엘서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잘 아는 사실입니다. 다니엘서는 신자들의 최후의 환난과 사탄의 최후의 패배와 하나님 나라의 최종적인 완성을 예언하고 있는 예언서입니다. 이 내용은 모두 요한계시록에 그대로 인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때 다니엘에게 말씀하시기를 ‘그 예언을 인봉하라’ 하셨습니다.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단12:4), “그가 이르되 다니엘아 갈지어다 이 말은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할 것임이니라”(단12:9)
그러면 하나님은 동일한 예언인데, 왜 다니엘에게는 인봉하라 하시고, 약 700여년 뒤 요한에게는 왜 인봉하지 말라 하신 걸까요?
네, 그것은 이제 이 예언이 성취되기 시작했고 이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다니엘과 요한 시대 사이에 무슨 결정적인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네,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역사의 분기점이기도 하시지만, 구원 역사의 분기점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구원 계획은 완성되고 종말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님 이후 이 예언은 이해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나라가 어떻게 완성되는지 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세상 끝과 마지막에 대한 이 예언의 말씀은 모두에게 열린 책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상으로 우리는 오늘 말씀이 왜 이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고 하시는지... 그 이유를 살펴보았습니다. 다음 주에는 이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