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자세히 보는 신앙

믿음찬교회 0 30 2023.01.31 16:34
자세히 보는 신앙
요일 1:1
2023.01.29.

우리는 지금 사도요한의 신앙고백을 계속 살펴보고 있습니다.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고백은 사도요한의 개인적인 체험적 고백이면서, 동시에 우리 기독교 신앙의 성장을 말씀하는 귀한 내용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어떻게 자라는가? 네,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들어야 하고, 또 그로 인해 보아야 합니다. 말씀을 잘 듣는 사람은 그분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시19:7~8)
또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도 그분을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와 같은 팔복은 영적인 구원의 복이면서 동시에 그분을 우리 삶에서 체험하는 은혜로운 복입니다.
네, 그분을 체험한다는 것은 그분을 영적으로 보는 것이죠. 우리는 문제가 해결되고, 기도 응답을 받고, 성령의 은사나 역사를 경험하고, 때로는 꿈을 꾸고 환상을 보면서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 신앙은 들음에서 봄으로 한 단계 올라서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 신앙이 이렇게 보는 신앙이 되면 다 된 것인가? ... 말씀의 은혜를 받고, 기도 응답을 받고, 신비 체험도 하고, 성령의 은사를 경험하고, 성령의 능력도 나타나고... 그러면 이제 내 신앙은 충분히 된 것인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때에 자기 신앙을 그만 잘못 이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성경 안에서는 대표적으로 방언의 은사를 지나치게 생각한 고린도교회의 일부 신자들이 있었고, 오늘날에도 그런 일부 지도자나 신자들이 있어서... 자신의 체험이나 은사나 능력으로 교만해지고 높아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은 이제부터 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듣는 신앙에서 보는 신앙으로 성장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신자에게 허락하신 보편적인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안 읽어서 그렇지... 말씀을 읽으면, 우리는 다 은혜를 받습니다. 기도를 안 해서 그렇지... 기도를 하면, 우리는 다 힘을 얻고 기도 응답을 받습니다. 성령의 은사나 체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내가 잘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교회의 유익을 위해 주권적으로 나누어주시는 보편적인 역사입니다.
그래서 대체로 대부분의 신자는 듣는 신앙에서 보는 신앙으로 순적하게 자랄 수 있습니다. 길가와 같은 밭이 아니라면, 돌밭이든 가시밭이든 싹은 자라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고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 진정한 신앙은 이제부터 이루어집니다. 여러분, 신앙이란 말의 뜻이 무엇입니까? 믿을 신, 우러러볼 앙... 하나님을 믿고 간절히 우러러보는 것이 신앙이죠.
그런데 듣는 신앙에서 어렴풋이 보는 신앙이 되기까지, 이 과정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간절히 우러러본 것이 얼마나 될까요? 얼마 되지 않습니다. 다 하나님의 은혜이고 선물입니다.
기도를 조금 열심히 하다 보니 방언의 은사를 받고, 신앙생활을 조금 열심히 하다 보니 사업이 잘 되고, 헌신을 조금 열심히 하다 보니 목사가 되고, 사명을 조금 열심히 감당하다 보니 큰 교회가 되고... 그런 것이죠. 내가 한 것은 많지 않습니다.
이 신앙의 세계에서 우리는 조금 길을 걸어왔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듣는 신앙에서 보는 신앙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간절히 바라는 진정한 신앙은 이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앙의 세 번째 단계는 무엇인가?
네, 그것은 우리 신앙이 자세히 주목하여 보는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보는 신앙이 되었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우리가 의지와 힘을 드려 그분을 간절히 바라보고 나아가는 신앙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믿으십니까?
일찍이 구약 신명기 말씀은 오래전부터 우리에게 그와 같은 신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4~5)
여기서 말씀하는 마음과 뜻과 힘은 각각 따로가 아니라, 서로 잘 연결된 내용입니다. 그런데 원어를 참고해서 두 번째 말씀인 뜻을 조금 바르게 번역해야, 그 연결이 보입니다. 네페쉬... 이것은 뜻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 혹은 우리의 존재 전체로 번역해야 하죠. 영어성경들도 그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과 뜻과 힘은 마음과 영혼과 힘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습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마음이라는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서 시작하여, 우리 영혼과 존재 전체, 즉 우리 마음과 생각과 말과 감정과 몸이라고 하는 우리의 존재 전체로 통일성있게 확대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내면이 하나가 되지 못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생각이나 감정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해야지’ 생각하고 느끼지만,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런 결정과 의지를 내리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입으로는 ‘오늘 말씀에 은혜를 받았습니다’라고 말하지만, 돌아서면 우리는 그 말씀을 우리 마음에 담지 못하고 잊어버리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마음에서 시작하여 우리 생각과 감정과 말과 몸과 영혼 전체로 온전히 확대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영혼과 존재 전체로 성숙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그다음에는 우리의 정신적 힘과 물리적 힘을 다하여 실천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 신명기 말씀은 한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과 방향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서 밖으로, 우리 마음에서 삶 전체로 ... 이것이 네 마음을 다하고 네 영혼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신명기 말씀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듣고 보는 신앙이 되었다면, 이제부터는 이와 같은 신명기 말씀을 따라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고 힘을 다하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신앙 생활하면, 우리는 그분을 자세히 주목하여 보는 신앙으로 올라설 줄 믿습니다. 
신명기의 이와 같은 말씀은 계속 이어집니다.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긴다든지 자녀들에게 가르친다든지 손목에 맨다든지 미간에 붙인다든지 문에 기록한다든지... 그런데 이것을 오늘날 우리가 그대로 실천하기는 어렵죠. 그렇다고 이 말씀이 버려도 되는 오래된 낡은 말씀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 말씀의 의미를 오늘날에 맞게 되살려야 합니다. 그래서 그 구체적인 방법이야 그때와 지금이 다를 수 있지만, 이 말씀의 의미는 오직 너와 너의 자녀의 신앙을 위해 너의 생활 속에서 힘과 노력을 기울이라는 의미입니다.
힘과 노력 없이 내 신앙이 잘되고, 내 자녀가 잘될 수 없습니다. 욥기의 욥은 자녀들을 위해 아침에 일어나면 늘 그들의 수대로 번제를 드렸습니다.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욥1:5) 이렇게 욥은 자신의 신앙과 자녀들의 신앙을 늘 돌아보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믿음과 신앙은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에만 머물러선 안 됩니다. 어떤 분은 신앙을 말하면서, 시종일관 하나님의 은혜 하나만 금과옥조처럼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은혜 하나로 신앙을 다 설명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사람의 간절한 행위와 모습을 뭔가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그것은 복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런 분들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지금 이 시간 길게 설명 드리긴 어렵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그런 분들은 성경과 신학을 좀 더 새롭게 보지 못하고 아마도 과거 16세기 종교개혁 시대의 성경과 신학에 머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의 유산들은 귀한 것들이지만, 50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그 모든 내용을 토시 하나 바꾸지 않고 그대로 답습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마치 유생들이 공자 왈 맹자 왈 하면서 공맹의 유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의 기준은 16세기가 아니라 1세기가 되어야 하고, 그런 점에서 우리는 계속 성경을 연구하고 신학을 발전시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힘을 다하라는 구약 말씀은 모르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신약 말씀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우리는 신약의 은혜만 아는 ‘은혜 만능주의자’가 되지 않아야 하고, 신약의 은혜만 이용하려고 하는 ‘은혜 이용주의자가’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
용서를 받았으면 새 삶을 살고, 은혜를 받았으면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사는 것이 마땅합니다. 또 그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은혜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구보다 많이 말씀한 사도바울은 누구보다 자신의 삶과 신앙에 최선을 다한 분입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사도바울은 여기서 3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은혜, 수고, 은혜... ‘하나님의 은혜로 나는 새 삶을 시작하였고, 그래서 나는 더 많이 수고하였는데, 결국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렇게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은혜 속에 자신의 수고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의 신앙에 열과 성의를 더하시길 바랍니다. 수고와 노력을 더하시길 바랍니다. 간절함과 진지함을 더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단순히 보는 신앙이 아니라 어렴풋이 보는 신앙이 아니라, 자세히 주목하여 보는 확신의 신앙이 되실 수 있습니다.

제 기억에 아마도 80년대까지 우리 대부분의 교회와 신자들은 간절하고 진지한 신앙을 많이 가졌습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교회가 90년대에 들어서면서 많이 변하게 되는데, 서울에서부터 큰 대형교회들이 나타나면서 그런 대형교회들이 신앙의 표준처럼 영향을 끼치기 시작하였습니다.
말씀들이 좀 많이 달라졌죠. 성장과 비전과 성공... 그런 말씀들이 많이 나오고 교회 사역과 훈련과 방법들이 다양해지고 그러면서 그런 말씀과 방법들이 대부분의 교회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들도 다 그런 새로운 방법론과 사역 프로그램을 배우고 적용하는데 정신이 없었습니다. 제자훈련 중보기도훈련 전도세미나 새신자교육... 그런 것을 안 하면 뒤처지는 것 같고... 또 신자들은 그런 교회에 몰리고...
그런데 그러면서 우리 교회들이 발전하고 성장하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많은 교회들이 성장을 위해 말씀을 타협하고 복음을 왜곡하고 교인만 만들고 신자를 만들지 못하고 많이 어려워진 것 같습니다.
교회는 쉬운 복음으로 교회만 성장시키고, 신자들을 성장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신자들은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믿는 자기 신앙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세상은 급속도로 바뀌었죠. 세상은 생활적으로 모든 것이 편리하고 풍족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편리한 세상에서 어려운 신앙이란 인기가 없죠. 그래서 쉬운 신앙이 유행하고... 그러다보니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데 신앙생활에 열과 성의를 다할 필요도 없어졌습니다. 모든 것이 풍족하니 하나님을 간절히 찾을 필요도 없어졌습니다.
아울러 세상에는 하나님과 성경이 필요 없는 사상과 지식이 속속 나오게 되었습니다. 신은 만들어졌다라는 말을 서슴없이 하고 있습니다. 평행우주론과 같은 과학이론은 우리 기독교의 최후 심판과 직선적인 역사관을 부정하는 지식이 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 사람들은 이제 새로운 생각 속에 하나님을 점점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세상 속에 있는 우리 신자들도 믿음이 잘 성장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많은 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겨우 듣고 보는 정도에 머물러 있고,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깊은 신앙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세상의 변화와 교회의 어려움 속에서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간절한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신앙은 오랜 세월을 견디며 수많은 시대를 거쳐 온 신앙입니다. 이 신앙은 또 앞으로 많은 시간을 거치며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까지 나아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신앙을 붙들고 끝까지 견디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우리는 세상과 맞서며 견디는 신앙이 될 뿐만 아니라, 날마다 성령 안에서 깊어지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이란 깊어야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독실해야 신앙이고 간절해야 신앙입니다. 독실하지 않은 것은 신앙이 아니고 간절하지 않은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은 언제나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는 진행형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마치 제단 위의 불이 항상 타오르는 것처럼, 성전의 등잔불이 항상 켜있는 것처럼 우리 신앙의 불은 계속 타올라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듣고 기도를 하고 예배를 드리고 선하고 의로운 삶을 살면서, 어제보다 나은 오늘의 신앙으로 오늘보다 나은 내일의 신앙으로 늘 나아가야 합니다.

어릴 적 저의 어머니는 어린 저를 데리고, 한동안 밤마다 교회에 기도를 하러 다니셨습니다. 그때 제가 지금 생각해보니, 어머니에게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혼자서 삶을 꾸려나가는 것도 어렵고, 아이들 앞길도 걱정되고, 특히 그때 제가 눈 수술을 여러 번 받아서 제 눈을 위해서도 기도를 많이 하셨던 것 같습니다.
아무도 없는 깜깜한 교회에서 어머니가 기도를 하면 저는 옆에서 조금 놀다가 자고, 어머니가 무슨 기도를 하는지 잘 몰랐습니다. 제가 아는 건 다만 어머니가 그런 어려운 시간을 기도하면서 보내셨다는 것뿐입니다.
그래도 한번은 제가 의지가 된다고 이야기해주셨습니다. 어린 저라도 옆에 있으면, 기도하는데 힘이 되고 덜 무서웠다고 하셨습니다. 그때는 흔히 기도하는 중에 무슨 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뭐가 보이기도 하던 그런 때였죠. 갑자기 강대상 옆의 문이 열리고 발자국 소리가 저벅저벅 가까워지기도 하고, 아무도 없는데 누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고 기도를 멈추기도 했죠.
나중에 저도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던 시기에 낯선 곳에서 저를 누르는 암흑 같은 얼굴을 본 적도 있습니다. 그때는 악한 영들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기도를 하는 신자들을 그렇게 많이 두렵게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아무튼 어머니는 그런 모습을 제게 보여주셨습니다. 어려울 때 하나님을 의지하고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 하나님께로 힘을 다하여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요즘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나도 이런 모습을 우주나 주해에게 보여주고 있을까... 우주나 주해도 나중에 어려운 일을 만나면 하나님께로 간절히 나아가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곤 합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하루종일 일을 하고 월화수는 밤 11시 넘어까지 또다른 일을 하는데, 그럼에도 매일 새벽기도를 다닙니다. 목사인 제가 봐도 힘든 것 같아서 너무 무리한 것 아니냐고 말하면, 그냥 말없이 웃습니다. 마치 이백의 시의 한 줄처럼, ‘소이부답심자한’ 웃으며 대답하지 않지만 그 마음 평화로운 것 같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네, 본인은 그렇게 하나님께 나아가는 생활을 하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본인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자신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분이 다니는 교회 홈페이지에 들어가 봤습니다. 평범한 교회이고, 목사님의 설교도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평범한 설교였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런 자신의 삶과 교회 가운데에서 자신의 방법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세상이 어떻든 시대가 어떻든 교회가 어떻든 내 삶이 어떻든, 하나님께로 늘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조금 더 힘을 더하시길 바랍니다. 조금 더 시간을 드리고, 조금 더 마음을 드리고, 조금 더 기도를 하고, 조금 더 실천을 하고... 그렇게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여러분만의 믿음의 비밀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더 자세히 바라보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여러분의 힘과 신실함을 더하는 신앙... 그것이 바로 자세히 주목하여 보는 신앙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들에핀믿음찬교회 성도님들은 이렇게 아름다운 깊은 믿음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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