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성육신의 신앙

믿음찬교회 0 139 2023.01.08 11:51
성육신의 신앙
요일 1:1~4
2023.01.08.

오늘 본문 말씀은 지난 주일과 동일합니다. 지난 주일에 오늘 본문에 대한 설명이 있었지만 많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은 오늘 본문을 설명하고 이로부터 은혜와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신약성경은 모두 27권인데, 이중 복음서가 큰 부분을 차지하고, 그다음으로 바울서신이 큰 부분을 차지하죠. 그리고 그다음으로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소위 요한문서라고 하는 요한복음, 요한일이삼서, 요한계시록입니다. 신약 27권 중 총 5권인데, 분량으로 보아도 신약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중요성으로 보아도 역시 신약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5권을 사도 요한이 직접 다 썼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사도 요한을 중심으로 그분의 동역자들, 제자들, 그리고 그분의 교회 공동체가 이 5권의 말씀을 함께 기록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갈릴리 어부 출신의 요한 한 사람이 다 썼다고 보기가 어려울 만큼, 이 내용들은 매우 전문적이고 구조적이고 신구약에 정통한 매우 수준 높은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들은 분명 사도 요한의 말씀과 가르침을 바탕으로 기록된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말씀들을 일반적으로 사도 요한이 기록했다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요한일서는 요한복음을 바탕으로, 요한복음 이후에 나온 문서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는 요한복음을 읽고 이해한 후에 읽어야 잘 이해가 되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이 말씀을 보다가 ‘요한일서가 왜 이런 모호한 말을 이렇게 하지? ...’ 이런 의문이 들면, 요한복음을 찾아보면 이해가 됩니다. 
예를 들어, 오늘 말씀에서 요한일서는 예수님의 성육신을 매우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보았다, 만졌다... 이 생명이 우리에게 나타났다...’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이유는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요한복음 말씀을 잘못 오해한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의 예수님은 마가복음에서 시작한 예수님의 모습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거쳐, 가장 높으신 신성으로 표현된 예수님입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인간적인 모습이나 감정도 기록했지만, 요한복음은 그런 모습을 거의 배제하고 영광의 주님으로 기록했습니다.
그러자 오직 그런 신성을 가진 영광의 예수님만을 신봉하는 이단자들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1세기 중후반이 되면 교회 안팎으로 엄청난 이단들이 쏟아져 나오게 됩니다. 이상하게도 그렇습니다. 정말 진짜가 나오면, 정말 그 진짜를 알고 따르는 좋은 사람도 있지만, 동시에 그 진짜와 비슷한 가짜들이 많이 생기고 그리고 그것을 따르는 사람도 많아지게 됩니다.
네, 이것이 엄연한 교회사이고, 또한 빛과 어둠의 영적인 역사입니다.
예수님이 빛으로 오셔서 이 땅에 빛을 비추셨지만, 동시에 어둠도 만들어지고, 그리고 그 어둠을 따르는 사람도 많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사람은 죄인이기 때문에 빛으로 나아오기보다는 어둠으로 가서 거기에 집을 짓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세기 중후반이 되면 대표적으로 초기 영지주의 이단이 나와서, 굉장한 영적인 옷을 입고 많은 사람을 미혹했습니다. 그 영지주의 이단은 그노시스라고 하는 영적인 지식만 있으면, 우리가 어떤 죄로도 오염되지 않고 우리 영혼은 깨끗하고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쳤습니다. 네, 얼마나 영적으로 그럴듯한 달콤한 말씀입니까?
‘육은 영에게 영향을 끼질 수 없다...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보호하신다...’ 이와 같은 말은 멋진 영적인 말처럼 들리기도 하고, 또 그 가르침을 따르면 내 삶이 얼마나 편해지고 자유로워지는지 모릅니다. 내가 어떻게 살아도 나의 영은 오직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이단들이 당시 교회 안에 많이 발생해서, 사도바울도 고린도교회의 그런 거짓 선생들과 어렵게 싸웠고, 또 요한계시록을 보면 소아시아 여러 교회에 니골라당이나 발람의 교훈이나 이세벨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어지럽게 생겨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이단의 발흥 가운데 하나가 바로 요한 교회공동체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이 이단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영광의 주님만을 추구하는 이단입니다. 실제 우리 몸으로 이 땅에 오신 그분을 축소하고 그분의 삶과 피와 땀과 초라함을 부정하고, 오직 영광의 주님만을 자신들의 주님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이 땅의 죄악과 삶과 현실을 외면하고 자신의 죄인됨을 부정하고 신실한 삶과 사랑에 대한 사도적 가르침과 계명을 거부하고, 하늘의 구원과 축복과 영광만을 추구하는 믿음이 되었습니다. 요한일서 안에는 이와 같은 그들에 대한 경계의 말씀이 많습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1:8),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2:9),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5:3)
그래서 이 사람들은 어떻게 보면 굉장히 위험한 이단입니다. 이들은 이상한 우상을 믿는 확연한 이단이 아니라 다만 자신들이 해석하고 추구하는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이 내용을 분별하지 못하는 신자들은 미혹되기 쉬웠습니다. 게다가 이런 이단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교회 지도자들 가운데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더 위험했습니다.
과거 사도 바울의 고린도교회의 경우는 그런 거짓된 선생들이 교회 밖에서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그나마 덜 위험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 사람들은 같은 공동체에 속해있던, 같이 있던 지도자 중에 나왔기 때문에 매우 위험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를 시작하면서 이렇게 예수님의 성육신과 성육신 하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매우 강하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의 배경에 있는 이와 같은 그때의 사정과 어려움을 잘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안타깝게도 역사는 반복되고, 그때의 문제는 오늘의 문제가 됩니다. 그때 그들이 예수님을 잘못 믿던 이유는 사라지지 않고 되살아나,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잘못 믿는 이유가 됩니다. 그래서 그런 이단이 또 출현하고, 그런 신앙이 또 교회 안에 나타나곤 합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에도 우리 교회 가운데에는 이렇게 예수님의 성육신을 버리고 우리의 분투하는 삶과 어려운 현실 속에서의 참된 믿음을 버리고, 쉽게 얻은 용서에 쉽게 얻은 구원에 축복과 승리와 위로만을 바라보며 오직 영광과 구원과 부활의 주님만 믿는 신앙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조심스럽지만, 우리 정통 교단 안에서는 순복음교회가 그런 경계선에 있는 모습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리고 교단 외에 그런 개별 교회들도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영화배우 중에 안성기씨를 잘 아시죠? 최근 그분이 건강이 많이 나빠져서 투병 중이신데, 많이 알려지지 않은 영화이지만 그분이 주연한 ‘아들의 이름으로’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2021년에 개봉한 영화로,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영화입니다.
안성기 씨는 극 중에서 5.18 광주 사태에 투입된 공수부대 장교로 나옵니다. 이후 그는 그 과거를 잊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과거를 알게 되고 그 계기로 죽게 된 아들과의 약속을 지키고자, 그 사건의 책임자들을 단죄하려는 결심을 합니다. 그래서 그는 대리운전기사를 하면서, 그때의 책임자 중 한 사람인 박 장군이라는 사람을 만납니다. 박근형 배우가 연기한 그 박 장군은 5.18 광주 사건의 책임자 중 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잘 살고있는 인물로 나오죠. 군에서 퇴역을 하고 여전히 영향력 있는 인물로 살면서, 그때의 사람들과 정기적인 만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영화의 내용 중에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그 박 장군은 대리기사로 어렵게 살아가고 또 자신의 과거를 힘들어하는 안성기를 안타까워하면서, 자신처럼 교회를 다녀보라고 권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에 가면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시고 그런 과거 따위는 싹 잊고 얼마나 마음이 평안한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영화를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그 장면을 보면서 다시 한번 지금 우리 교회와 신앙의 잘못된 모습에 안타깝고 부끄러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과거에도 이런 우리 교회의 부끄러운 민낯을 고발한 영화가 있었죠. 네, 전도연 씨가 주연한 ‘밀양’이라는 영화입니다. 그 영화에서도 동일하게, 그 살인자는 박 장군처럼 이미 하나님께 용서를 받고 평안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전도연 씨가 예수를 믿고 자기 딸을 죽인 그 사람을 용서하러 어렵게 감옥에 찾아갔는데, 그는 감옥에서 전도하는 분을 통해 예수를 믿고 이미 용서를 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영화가 말하는 이와 같은 우리 교회와 신앙의 현실은 비록 일부이긴 하지만, 사실입니다. 우리 교회 중 일부는 그런 쉬운 용서와 쉬운 구원을 무분별하게 가르쳐왔습니다. 하나님이 다 용서해주시고 다 받아주신다고 가르치며, 많은 사람들을 교회로 모으는데에 집중했습니다. 그래서 부동산 투기하는 아무개도 권사가 되고, 세금 떼어먹는 아무개도 장로가 되고, 전직 조폭도 목사가 되고 전직 고문기술자도 목사가 되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할까요? 네, 이것은 우리 신앙에 있어서 중간에 어떤 것을 결정적으로 건너뛰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 이 땅에 사셨던 예수님,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빼먹었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 태어나시고, 예루살렘이 아니라 갈릴리에서 복음을 시작하시고, 세상의 정치 사회 종교 현실 가운데에서 잘못된 것과 싸우시고, 어리석은 제자들을 이끌어주시고, 아버지의 뜻에 어린양처럼 순종하시어 친히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그런 예수님을 신앙의 요체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예수님은 배제하고, 다만 나를 무한한 능력으로 구원해주실 수 있는 신적인 예수님만 생각하고 그런 신적인 예수님으로부터 구원과 축복과 은혜만 바랄 뿐, 이 땅에 오셔서 제자들과 대화하시고 그 생각을 바꾸시고 마음을 바꾸시는 예수님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변화 없이 천국만 가겠다... 나는 그렇게 나를 천국에 보내주는 예수님을 믿겠다...’ 그래서 많은 신자들이 예수님을 믿어도 변화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이 땅에 오셔서 돈을 바꾸고 양을 팔고 장사하는 성전에서 그 상을 둘러 엎으시고 채찍을 드신 예수님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개혁이 되어야 신앙이 시작되고 구원도 이루어져 가는데, 내 삶과 영혼의 개혁을 생각하지 않고 구원만 바랍니다. 이런 모습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천국으로 점프하는 신앙...’ 한 걸음 한 걸음 그분 앞으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나아가는 신앙이 아니라, 그저 예수님을 이용해 천국으로 점프해서 들어가려는 신앙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예수님을 모르니까 지금 우리 교회와 신자들은 스스로를 개혁 교회라고 하지만 사실은 개혁과 거리가 먼 보수적인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많은 교회들은 복음서를 제대로 보지 않고 사도바울의 로마서만 신봉합니다. 구약의 슬픈 죄와 거역의 역사도 다 빼먹고, 아브라함의 축복이나 출애굽의 기적이나 가나안 땅의 젖과 꿀이나 그런 내용만 압니다. 이사야서도 이스라엘의 죄와 반역을 통열하게 지적하는 앞부분은 다 빼먹고,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는 뒷부분의 축복과 승리만 읽습니다.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이런 말씀만 사랑합니다.
이렇게 성경을 취사 선택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취사 선택하고, 하나님의 모습도 취사 선택하고, 예수님도 내가 원하는 예수님만 취사 선택하고... 이렇게 엉망진창된 신앙이해와 믿음을 가지고 지금 우리는 교회를 더 크게 건축하고 회복을 기도하고 부흥을 원하고 예수님을 믿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 슬픈 마음이 듭니다. 제일 안타까운 것이 교회당은 멋진데, 그 흘러나오는 강단의 설교가 마치 장사꾼과 같은 상업적인 설교일 때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달콤한 설교에 무조건 ‘아멘’하는 성도가 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 안에 영적인 것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고 은사를 받고 현실과 다른 뭔가를 보고 방언이나 예언을 하고... 서울의 한 큰 교회 어떤 목사님은 영적이라는 말을 무척 즐겨 사용한다고 합니다. 영적 건강, 영적 성공, 영적 근육, 영적 DNA ... 심지어 영적 팀워크, 영적 백신, 영적 콜레스테롤, 영적 미세먼지... 이런 말까지 자주 사용한다고 합니다.
물론 영적이라는 말은 좋은 말이죠. 저도 영적인 것을 좋아합니다. 저도 영적인 목사가 되면 좋겠고, 기도를 많이 하기를 원하고, 참된 여러 은사를 받기를 원합니다. 신앙에는 색깔이라는 것이 있고, 어떤 분들은 그런 영적인 은사나 체험을 통해 신앙이 자라고 힘을 얻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이 말씀하는 ‘영적인 것’에 대해 바른 이해를 해야 합니다. 우선 성경은 ‘영적’이라는 말을 무분별하게 사용하지 않습니다. 신약성경 전체에서 영적이라는 말은 불과 3번 나올 뿐입니다.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신약성경은 ‘영적’이라는 말보다는, ‘성령으로’ 혹은 ‘성령 안에서’ 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성경이 말씀하는 영적이라는 말은 우리 삶이나 현실과 분리된 말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영적인 것’만을 좋다고 하지 않고, 영적인 것을 말할 때 항상 삶과 실제를 말합니다. 대표적으로 사도바울은 그 누구보다 성령의 은사와 성령의 역사를 말씀했지만, 항상 그것을 말할 때 사랑을 말하고 교회의 유익과 덕을 말하고 질서를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적인 영적인 것이란 항상 삶과 실제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영적인 것이 진정한 영적인 것이 되려면, 그는 반드시 삶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사랑이 더 커지고 인격이 더 커지고 삶이 더 아름다워지고 경건이 더 높아지고... 그런데 기도를 많이 하지만 그런 진전이 없고 여러 은사를 행하지만 삶이나 언어나 표정이나 가치관이나 인격이나 내 마음의 평안이나 교만이 그대로라면 그것은 진정한 영적인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삶이 없는 영적인 것은 기독교적인 영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전통적으로 아는 영적인 것과 성경이 말씀하는 영적인 것을 구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민족의 의식이나 생각 속에 어쩔 수 없이 전해 내려오는 미신이나 무당 같은 그런 영적인 것은 삶이 중요치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사도들이 가르쳐주신 영적인 것은 삶이 있는 영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 신앙은 그동안 우리의 삶이나 실제로부터 분리된 영적인 것을 자꾸 추구해왔을까요? 왜 우리는 그런 세상적인 영적인 것을 추구했을까요?
이것 역시 예수님의 성육신의 부재를 그 근본적인 이유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영광의 주님, 부활하신 예수님만 알고, 실제 이 땅에서 삶을 사셨던 예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 신앙의 모든 것은 삶으로 열매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진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성육신이 없는 신앙은 잘못된 신앙이고, 언제든 잘못될 수 있는 위험한 신앙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분의 그 치열했던 삶을 알아야 합니다. 그분의 삶을 알면 내 삶도 알고 내 신앙도 알 수 있죠. 내가 지금 참된 천국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지, 아니면 예수님을 겉으로만 알고 내 길을 걸어가고 있는지...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는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 첫머리에 예수님의 성육신을 강조하는 이유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우리 기독교 신앙이 그만큼 확실한 신앙이라는 것을 말하고, 동시에 예수님을 오해한 잘못된 신앙을 경계하기 위해서입니다.
부활의 예수님과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만 바라보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이 땅의 현실과 고난의 삶을 사셨던 예수님 역시 우리 신앙의 대상입니다.
그러면 우리 신앙은 삶과 실제가 있는 신앙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부터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죽어서 천국간다... 하루아침에 천국에 간다... 한번에 천국에 간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지금 여기서 천국의 삶을 살아가고, 마침내 그날에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을 말씀하는 베드로후서 말씀을 마지막으로 인용하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아무쪼록 우리 들에핀믿음찬 교회 성도님들은 예수님의 성육신을 알아서, 오늘의 믿음의 삶을 살고 그 믿음으로 마침내 하나님의 나라에 넉넉히 들어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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