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경배와 의심

믿음찬교회 0 98 2022.12.04 11:55
경배와 의심
마 28:16~17
2022.12.04.

갈릴리로 간 제자들은 드디어 예수님을 만납니다. 16절이 그것을 말씀하죠. 그런데 17절 말씀이 조금 특별합니다.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경배하나 의심하더라... 오늘 설교는 이 미묘한 17절 말씀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 17절 말씀은 다른 복음서엔 없는 말씀인데, 크게 2가지 점에서 특이합니다.
첫째는 ‘제자들이 예수님께 경배했다’는 말씀입니다. 둘째는 ‘제자들 중에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다’라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왜 예수님께 경배하고, 왜 아직도 의심하는 걸까요? ... 우리는 18절부터 있는 아주 중요한 말씀을 앞두고, 이 17절 말씀을 가볍게 지나갈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의 마태복음 이해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17절 말씀은 성경을 꼼꼼히 보는 분이라면, 조금 마음에 걸릴만한 내용입니다. 예수님께 경배를 하지만 의심한다... 경배와 의심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데 이건 무슨 상황일까요? 그리고 의심한다면 무엇을 의심한다는 걸까요?
그리고 가장 궁금한 점은 이것입니다. 왜 마태는 굳이 이 말씀을 하는 걸까요? 그것도 마태복음의 마지막 중요한 말씀을 앞두고 왜 이 말씀을 기록하고 있을까요?’
제 생각엔 차라리 이 말씀을 빼면 더 자연스러울 것 같습니다.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니.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여러분, 어떻습니까? 이렇게 마무리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요? 제가 만약 감히 마태라면, 이렇게 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네, 그런데 이렇게 하지 않는 데에는 이유가 있겠죠. 마태가 이 내용을 부자연스러움을 무릅쓰고, 또 저 같은 소인의 생각과 불평을 무릅쓰고, 기록한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 이 내용을 알아보고 은혜와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우선 이 17절 말씀을 원어로 한번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그들은 그분을 보고 경배했다. 그러나 그들은 의심했다” 현재 우리말 성경에 있는 ‘아직도’ 라는 말은 없고, 그냥 간단히 “그러나 그들은 의심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학자들은 이 말씀을 알기 위해, 여기서 두 가지를 중점적으로 해석합니다. 하나는 그들이라는 주어이고, 다른 하나는 의심했다는 동사입니다. 그런데 대체로 ‘그들은’ 열한 제자로 보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그래서 ‘의심했다는 동사만’ 살펴보면 될 것 같습니다.
의심했다는 동사는 ‘에디스타산(디스타조)’인데, 이 단어는 ‘의심했다’는 뜻도 있고, ‘주저했다’는 뜻도 있습니다.
의심했다는 것은 ‘불신’을 의미하고, 주저했다는 것은 ‘불확신’을 의미하죠. 그런데 ‘불신’과 ‘불확신’은 조금 다릅니다. ‘불신’은 믿지 않는 것을 의미하고, ‘불확신’은 제대로 믿지 못하는 것을 의미하죠.
그러면 이 단어의 의미는 최종적으로 ‘불신’일까요? ‘불확신’일까요? 네, ‘불확신’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해석할 수 있는 이유는 이 단어가 나오는 다른 유일한 본문을 살펴볼 때, 그렇게 해석되기 때문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이곳과 마 14:31 단 두 군데에만 나옵니다.
마 14:31은 이렇습니다.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여러분, 여기서 예수님이 즉시 손을 잡아주신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네,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지금 물 위를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걷다가 물에 빠져버렸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베드로에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베드로가 의심했다는 것은 ‘불신’일까요? ‘불확신’일까요?
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믿음이 작다고 말씀하셨죠. 그러면 베드로는 예수님을 믿고 물 위를 걸었지만 믿음이 부족하여 물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베드로의 의심은 ‘불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도 동일하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이 의심했다는 것은 말 자체는 의심했다는 말이지만, 그 의미는 제대로 믿지 못하고 주저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석하면, 이어지는 마지막 말씀과도 연결이 잘 됩니다. 제자들은 지금 예수님께 경배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18절 이후 매우 강한 확신을 주시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우리는 17절의 ‘제자들이 의심했다’는 말씀의 의미를 불확신과 주저함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그러나 그들은 확신을 가지고 못하고 주저하더라”

그러면 제자들은 무엇을 확신하지 못하고 주저한 걸까요? 18절 이후 이어지는 문맥을 고려하면, 그것은 앞으로의 하나님 나라 사역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손으로 새롭게 시작하는 하나님의 나라... 이제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상황에서 자신들이 잘 할 수 있을까? 그런 미래를 믿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이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주저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또 자신들에 대한 예수님의 용서를 믿지 못하고 주저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문제들은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보여주듯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이미 몇 번 만난 만남에서 해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말씀도 듣고, 대화도 하고, 식사도 같이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지금 예수님의 부활이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지 못하거나, 예수님의 용서를 믿지 못하고 주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믿지 못하고 주저하는 것은 앞으로의 미래입니다. 자신들의 손에 맡겨진 하나님 나라의 미래가 과연 잘 될 수 있을까... 그것을 확신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이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우리도 이 말씀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믿고, 하나님 나라의 성장과 완성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초라해지고 있고 그것이 현실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자초한 면도 있고 하나님의 계획인 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는 성장하고 완성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성장과 완성이 우리 생각과 같지는 않을 것입니다. 겨자씨는 크게 자라도 2미터 정도의 작은 나무가 될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눈에 보기에 은행나무나 느티나무나 메타세쿼이아처럼 그렇게 크게 자라는 나라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의미는 크기에 있지 않고, 영적인 생명력과 진실함에 있습니다. 얼마나 진실하고 생명력이 있느냐... 하나님은 그것을 귀한 하나님의 나라로 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과 다른 이런 이해를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계속 힘있게 이루어 나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 안타깝게도 한국의 큰 교회들이 생명력과 진실성을 잃고 있습니다. 크기는 크지만, 어떤 교회는 세습을 하고, 어떤 교회는 정치에 빠지고, 어떤 교회는 탐욕에 빠지고, 어떤 교회는 성공과 번영에 빠지고...
우리는 이런 어려움 속에 제대로 된 참된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만들 수 있을까요?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며 사는 것은 힘든데 적당히 사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지금 우리 세상과 교회의 현실을 생각하면, 그런 생각이 어쩔 수 없이 듭니다. 우리 안에 그런 참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수 있을까요?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약하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십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비록 우리는 작고 약해도 바른 마음과 뜻을 가진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주님의 권세와 함께하심으로 성취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품은 우리 교회도 새로운 가지가 계속 자라고 새로운 뿌리가 계속 만들어질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님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의심하거나 주저하지 마시고, 기쁘고 즐겁게 동참하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주목할 두 번째 내용은 ‘제자들이 경배했다’는 내용입니다.
누구를 경배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네, 경배라는 것은 사람이 사람에게 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사람이 오직 신에게, 오직 하나님에게 절하는 것이 경배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드리는 예배도 그 본질은 경배입니다. 예배는 경배이죠. 우리가 하나님께 엎드려 절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예배의 본질을 생각하면, 오늘날 우리 예배를 생각할 때 반성할 점이 많이 있습니다. 예배에 참석하지만 경배하지 않는 모습과 마음들 ... 그것은 참된 예배가 되지 못합니다. 찬송할 때, 기도할 때,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경배하고 있는가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왜 제자들은 갑자기 예수님께 경배를 할까요? 우리는 예수님께 경배를 하는 제자들을 보면서, 예수님을 다시 만난 이 짧은 시간 동안 예수님도 그렇고 제자들도 그렇고 굉장히 많은 변화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선 제자들은 기본적으로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만 경배하는 것을 배운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이렇게 예수님께 경배한다는 것은, 단지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만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에 현격한 변화가 발생했다는 의미입니다. 감히 함부로 다가갈 수 없는 신비와 권세가 흐르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 예수님께 저절로 무릎을 꿇고 경배하고 있습니다.

경배라는 단어를 마태복음에서 찾아보면, 모두 8번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탄생한 2장에 3번, 마귀의 시험이 나오는 4장에서 2번, 예수님이 구약을 인용하시는 15장에서 1번,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28장에서 2번.
이 8번 중에서 마귀가 자기에게 경배하라는 한번과 예수님이 구약을 인용하시는 두 번을 제외하면... 실제로 경배하는 것은 오직 2장과 28장에서만 나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안에서 경배는 이스라엘의 왕으로 태어나신 그분께 드린 경배가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께 드리는 경배로 그렇게 연결되는 것입니다.
임마누엘도 마찬가지입니다. 마태복음 1장에서 임마누엘로 태어나신 예수님은, 마태복음 28장에서 임마누엘의 주님으로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십니다.
이렇게 마태복음은 경배와 임마누엘로 시작하여, 경배와 임마누엘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경배를 받으시는 예수님은 이제 완전히 신성을 가지신 분이 되셨습니다. 제자들이 이전에 알던 예수님이 아니라, 그분 앞에 절로 무릎을 꿇게 되는 그런 주님이 되셨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분이나 다니지 않는 분이나...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예수님을 성탄절의 아기 예수로만 알고 있는 분이 있습니다. 유독 아기 예수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의 온전한 실체를 외면합니다.
어떤 분은 예수님을 고난의 십자가 예수님으로만 알고 있는 분이 있습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의 모진 고통을 당하신 예수님... 그래서 예수님의 형상도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의 형상을 어떤 표준적인 예수상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가톨릭교회에서 주로 그런 예수님의 십자가 상을 많이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어떻게 그런 고난의 예수님의 모습이 우리 주님의 표준적인 모습이 될 수 있겠습니까? 피 흘리시고 고개 떨구시고 초라하고 비참하신 모습...
저는 그런 생각도 해봅니다. 십자가의 예수를 강조하는 것에는 혹시 우리의 잘못된 종교적 이기심이 있는 것이 아닌가?... 날 위해 우리 위해 고난받으셨기 때문에 그런 예수님을 높이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도 해봅니다.
어떤 분은 예수님을 복음서의 예수님이 아닌 역사적 예수로만 알고 싶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성경 말씀을 불신하고 역사적 자료만 탐구하여 자신들의 생각으로 예수님의 삶과 모습을 재구성하곤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신앙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성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예수님을 우리 예수님의 표준적인 모습으로 마음에 담아야 할까요? 네,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우리의 경배를 받으시는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으로 믿고 경배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곧 성탄절이 다가오고, 교회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도 예수님의 탄생 속에 그날을 보내게 됩니다.
그러나 이 땅 가운데 진정으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경배하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모두들 자기 삶에 바쁘고 자기 일에 바쁘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지 않습니다. 심지어 오늘날은 교회 안에서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지 않는 안타까운 일도 일어나고 있는 현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마태복음의 마지막 페이지 마지막 말씀에 이르면서, 이 한 가지를 분명히 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진정 내 주님이신가?... 예수님은 진정 내가 경배드리는 주님이신가?... 여기에 대해 우리는 진정성 있는 대답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마태복음을 다 보고, 그저 이 책을 덮을 수 없습니다. 책 한 권 읽고, 시 한 편 읽고, 소설 한 권 보고... 잠시 생각하다가 책을 덮고 결국 책장에 넣어두는 그런 일이 되어선 안 됩니다.
나는 예수님을 내 주님으로 섬기고 경배할 것인가? ... 우리는 이 결단 앞에 서야 합니다.

물론 이 결단은 한 번의 결단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고비마다, 갈림길마다, 우리는 이 결단 앞에 늘 서야 합니다. 좋을 때도 예수님이 내 주님이 되시고, 힘들 때도 예수님이 내 주님이 되시고... 그래서 우리는 다른 것은 모르는 사람처럼... 모든 상황 속에서 우리의 믿음의 고백은 ‘내 주님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라는 고백이 되어 우리 입에서 흘러나와야 될 줄 믿습니다.
모든 상황 속에서 그와 같은 우리의 변함없는 고백은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살아 역사하실 때,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능히 고백할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아멘.
그러므로 여러분, 성령의 역사를 힘입어 지금 이렇게 다시 한번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세상 앞에, 돈 앞에, 두려움 앞에, 걱정 앞에... ‘내 주님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신앙고백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하겠다’하신 우리 주님의 사랑과 은혜와 약속은 우리에게 현실이 될 줄 믿습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제자들의 의심과 불확신과 주저함을 아시는 우리 주님은 우리의 의심과 불확신과 주저함도 아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우리에게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하겠다고 말씀하시는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그런 부활하신 주님을 온전히 경배하며 항상 따라가는 참된 제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우리 들에핀믿음찬교회 성도님들은 이와 같은 주님과 함께 영원히 행복한 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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