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부활의 사실성과 증거들

믿음찬교회 0 151 2022.11.22 13:40
부활의 사실성과 증거들
마 27:62~66, 28:11~15
2022.11.20.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장사되셨습니다. 이제 마태복음을 비롯한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부활과 마지막 명령과 승천하시는 내용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남은 내용을 기록하는 방식이 복음서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제1복음서인 마가복음은 그 내용을 가장 간단히 기록합니다. 현재의 마가복음은 16:20까지 있지만, 대체로 원래의 마가복음은 16:8까지인 것으로 여겨집니다.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이렇게 마가복음은 뚝 끝납니다. 마가복음의 긴 말씀은 예수님의 빈무덤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접한 여인들의 충격과 놀라움으로 이렇게 끝납니다. 
그래서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부활 사실만을 간단히 말할 뿐, 부활을 달리 설명하거나 그 이후 사건을 자세히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사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 각각 다른 반응을 나오게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마가복음이 예수님의 부활을 분명하게 말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애초에 부활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결국 마가는 예수의 부활을 그렇게 천사의 말과 여인들의 놀라는 모습으로 간단히 말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후 다른 복음서들이 부활에 대한 마가복음의 그런 불확실한 진술을 보완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복음서를 믿지 않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우리들은 마가복음의 그와 같은 갑작스런 결말과 부활을 달리 설명하지 않는 방식이 오히려 마가가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부활을 최선으로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노자의 말을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지자불언 언자부지...” 아는 자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 알지 못한다... 이와 같은 노자의 말은 사람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초월과 초자연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질 수밖에 없는지 잘 말하고 있습니다. 불교도 동일한 말을 합니다. 그곳은 언어가 멈추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부활은 사람에게 그때나 지금이나 충격 그 자체입니다. 그것은 현실이 아니라 초현실이고, 우리는 그와 같은 초현실과 초자연을 잘 모릅니다.
다만 우리는 그간 과학의 발달로 당시 사람들보다는 초현실과 초자연을 많이 이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주를 알고, 차원을 알고, 빛과 물질을 알고, 힘의 작용을 알고, 시공간의 개념을 압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잘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부활하셨는지, 언제 일어나셨는지, 언제 무덤을 나오셨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천사가 무덤 입구의 돌을 굴려서 무덤 밖으로 나오신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랬다면 천사를 본 경비병들이 무덤 밖으로 나오시는 예수님도 보았겠죠. 그러나 그들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천사가 무덤의 돌을 굴리고 그 위에 앉아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이미 부활하신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상징적인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마가복음도 그렇고 다른 복음서들도 그렇고... 모든 복음서들은 설명할 수 없는 예수님의 부활을 설명하거나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의 모습과 그들의 증언을 간접적으로 말할 뿐입니다.
만약 복음서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적으로 말하거나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설명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네 그러면 성경은 판타지가 되고 소설이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초자연을 말씀하지만, 소설이나 판타지가 아닙니다.
따라서 마가복음은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려고 하지 않고, 오직 그것을 접한 여자들의 충격과 놀라움을 말하며 그냥 거기서 끝내버립니다. 부활은 믿음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마가복음의 의도는 이제 그 말씀을 읽는 우리에게 공을 넘깁니다. 부활은 믿음의 영역이고, 당신은 그것을 믿든지 믿지 않든지 선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의 이와 같은 도전적이고 파격적인 결말을 그래도 마태복음은 조금 완화하고 보완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당시 믿는 성도들은 예수님의 부활과 관련한 좀 더 많은 이야기를 알아야 하고, 또 부활 이후 어떤 일이 펼쳐졌는지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마가복음에 덧붙여 몇 가지 내용을 더 말합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에 대해 말하고, 또 예수님의 부활을 부인하는 거짓 소문에 대해 말합니다.
영상과 기록이 흔한 오늘날에도 거짓은 무척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엄연한 영상과 기록과 증거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부정하고 부인하는 일이 안타깝게도 흔합니다. 대통령부터 길에서 자전거를 타는 평범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이익이 되고 할 수만 있다면, 거짓말을 합니다. 그렇다면 그런 증거들이 부족한 당시에 거짓 소문이란 얼마나 큰 힘이 있었을까요?...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그런 거짓 소문에 맞서 예수님의 부활의 사실성을 말하기 위해, 오늘 본문을 특별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의 사실성을 한번 전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비록 예수님의 부활 자체는 설명하지 못하지만, 그 부활의 사실성에 대해서 성경은 무엇을 말하고 우리 기독교는 무엇을 말하는가... 예수님의 부활을 무조건 믿으라는 것이 아니죠. 그러므로 우리가 이 내용들을 알면, 우리 신앙이 더 굳건해질 줄 믿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임을 말하는 첫번째 증거는 신화적인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간혹 신화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사실이 아니라 신화의 일종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신화일까요? 
고대에는 많은 신화가 있습니다. 그것은 고대의 사람들이 신화를 통해 어떤 중요한 사실을 기억하고 후세에 전했기 때문입니다. 창조 신화, 홍수 신화, 건국 신화, 탄생 신화... 이런 신화들은 가공의 이야기나 소설이 아니라 사실과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화를 연구하면 그 신화의 바탕이 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체로 신화들은 어떤 사실과 사건이 시간이 흐르면서 신화로 형성됩니다. 큰 홍수가 있고 홍수 신화가 만들어지고, 건국이 있고 건국 신화가 만들어지고, 중요 인물이 탄생하고 탄생 신화가 만들어지죠.
그런데 그렇게 신화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일정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어떤 사실과 사건이 바로 신화가 되는 것이 아니라, 최소 두 세대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 신화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 사실과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이 다 죽은 후, 비로소 그것은 신화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화는 그렇게 만들어져 구전되다가 나중에 문서로 기록되는데, 삼국유사에 기록된 단군 신화는 약 3,600년 후 기록된 신화입니다.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 자라투스트라에 대한 신화도 약 1,500년 후 기록되었습니다. 석가모니의 탄생 신화도 석가모니의 사후 최소 500년 후 기록되었습니다. 불교의 가장 초기 경전들이 석가모니 사후 500년 이후에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신화로 볼 수 있는가? 그렇게 보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인과 증언은 그 사건 즉시 나왔고, 그리고 그 기록도 모두 두 세대 안에 나왔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말하기를, 부활을 목격한 오백여 형제 중에 지금 대다수가 살아있다고 말합니다. 이와 같은 바울서신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 후 한 세대 안에 기록되었고, 마가복음도 그렇고, 나머지 복음서도 모두 두 세대 안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신화에 대해 아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의 부활을 신화라 할 수 없습니다.

둘째는 많은 증인과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가장 큰 증거는 빈 무덤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고,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장사되셨습니다. 그래서 만약 예수님이 당시 실제 부활하지 않았다면, 그런 문제와 소란은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그 무덤과 시신을 확보하고 공개하면 즉시 종결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때 그 간단한 일을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빈 무덤은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이 증언하고,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확인하고, 당시 널리 퍼진 소문에 있던 사실이었고, 그리고 지금도 발견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빈 무덤은 부활의 가장 큰 증거가 됩니다.
한편, 물론 그들의 말대로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쳤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경비병들이 자면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가는 것을 알았다고 하는 것은 무척 이상하지만, 그런데 만약 제자들이 시신을 훔쳤다고 해도 정말 이상합니다. 왜냐하면 이후 시신을 훔친 제자들은 예수가 부활했다고 주장하면서 모두 그것을 위해 박해받고 순교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직접적인 증인들이 하나 둘도 아니고, 열둘도 아니고, 오백여 형제나 됩니다. 현행 재판에서도 증인은 수명으로 충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에 있어서 증인의 수는 지나칠 정도로 많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최초의 증언자가 여자들이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당시는 여자들이 책임있는 증언자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시대였기 때문에, 만약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복음서 저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의 최초 증언자로 여자들을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부활의 사실성을 말하는 증인 문제에 있어서 부활의 직접적인 증인이 많고 또 그 주요 증인이 여자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한데... 그러나 이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어떤 현대의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가 진정 부활했다면, 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보이지 않고 왜 빌라도나 대제사장이나 장로들을 찾아가지 않고 왜 예루살렘에 공개적으로 다시 나타나지 않았나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랬다면 예루살렘은 다 뒤집어지고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인정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네, 순진한 학생의 상상 같은 이런 생각도 물론 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엔 만약 그랬다면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다시 예수님을 체포하고 죽였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 거룩한 일이 너무 장난스럽고 어지러워지겠죠.
그런데 그것을 떠나서 그런 생각은 마치 이런 것과 같습니다. ‘오늘날에 교회가 굳이 예수 믿으라고 전도할 필요 없이, 예수님이 서울 한복판에 나타나 기적과 능력을 행하면 되지 않나... 그러면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믿을 것 아닌가?’
네, 그런데 이와 같이 ‘나는 가만히 있을 테니, 나를 한번 믿게 해보라’는 식의 생각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 앞에 주장할 수 있는 생각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왜 더 많은 사람과 일반 사람에게 나타나시지 않았나 하는 질문은 적절한 질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족과 같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렇게 여기저기 나타나실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특별한 부활의 몸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자신의 머리를 쌌던 수건을 개어놓고 제자들을 만나고 대화하고 같이 음식을 먹고 이렇게 부활 전과 전혀 다를 바 없으셨지만, 그러나 아무도 모르게 무덤을 떠나시고, 제자들과 동행하다가 홀연히 사라지시고, 제자들의 모인 실내에 갑자기 들어오시고 그리고 그런 부활의 몸으로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최근 우리는 발전된 과학 지식으로 그런 현상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합니다. 시공간 3.5차원에 사는 우리는 더 많은 공간 차원과 시간 차원이 있다는 것을 근래에 알게 되었습니다. 또 양자역학의 세계에서는 그런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런 고차원의 몸과 초자연적 몸을 가지셨다면, 그런 몸을 가지고 당시 세계를 활보하시는 것은 난센스입니다. 그것은 원리적으로 그렇게 하시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초자연과 기적을 그렇게 남발하면, 그것은 당시 자연과 현실 세계를 망가뜨리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과 최소한으로 만나시고 이후 하늘로 올라가시게 됩니다.

세 번째는 종교적 증거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이 있기 전까지 오래도록 자신들 고유의 신앙과 종교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유일신 하나님을 믿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고,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안식일을 준수하고, 각종 절기를 지키고, 음식을 가려서 먹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유대인들 중 일부가 하루아침에 완전히 새로운 신앙과 종교를 시작하였습니다. 유일신 하나님만 믿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고, 율법을 넘어 예수의 말씀과 복음을 따르고, 교회로 모이고, 집에서 예배를 드리고, 주일을 지키고 안식일이나 절기들은 버리고, 음식 규례도 다 버렸습니다.
어떻게 하루아침에 이런 종교적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을까요? 일제 강점기 때 일제가 우리 민족을 탄압하면서 갖은 방법으로 설 명절을 폐지하려고 했습니다. 설 명절을 구정이라고 하면서 구정을 없애고 신정을 쉬게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것을 못 바꾸었습니다. 명절 하나 바꾸는 것도 이렇게 어렵죠.
그런 점에서 유대인들이 기독교인이 되고 새로운 종교와 의식과 절기와 말씀의 혁명이 일어난 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아니고서는 설명되지 못합니다.

마지막으로는 도덕적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수많은 사건을 만들었습니다. 어부, 세리, 열심당원... 그런 평범한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 사건 이후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대단히 수준 높은 말씀과 삶을 사는 사도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에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 사건 이후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고 낙타 무릎이 되도록 기도하는 기도의 사람이 되었고 백성들의 편에 서서 성전 권력에 맞서다가 결국 순교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체포하러 가던 율법주의 엘리트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날로 예수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잘못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면 새로운 사람이 됩니다. 도둑질하는 사람은 도둑질을 그만 두고, 악한 사람은 선한 사람이 되고, 자기만 아는 사람은 사랑하고 은혜로운 사람이 됩니다.
물론 예수 믿어도 변화가 없고 더 잘못되는 사람도 많습니다. 더 돈을 추구하고, 더 권력과 힘을 추구하고, 더 거짓된 삶을 사는 사람이 있죠.
아마도 그것은 그 사람이 예수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 기독교라는 껍데기를 만났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오직 혁명적인 결과만 일어납니다. 예수님이 죽든지, 자기가 죽든지... 중간은 없습니다.
비록 우리 삶은 더디게 변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났다면 우리 안에는 새로운 생명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도덕적 영적 변화와 예수님의 부활의 새 생명이 여러분 모두에게 풍성하시길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와 신앙은 무척 어려운 길을 걷고 있습니다. 밖으로 세상은 지금 만연한 무신론적인 시대가 되었고, 동시에 안으로 우리 교회와 믿는 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다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안팎의 어려움 속에 외롭게 신앙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세상 속에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우리 신앙은 진실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언자로 살아야 합니다. 얼마 전까지는 그저 복음을 전하고 전도를 하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 신앙을 삶으로 보여주어야 하고, 또한 우리 신앙을 오늘에 맞게 설명도 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설교는 예수님의 부활의 사실성을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성경은 믿고 아는 것만이 아니라, 알고 믿는 것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베드로전서의 말씀과 같이, 여러분의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항상 거룩하게 하시고, 또한 여러분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항상 풍성히 대답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들에핀믿음찬교회가 그런 귀한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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