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찢어진 성소 휘장

믿음찬교회 0 188 2022.10.23 11:54
찢어진 성소 휘장
마 27:45~54
2022.10.23.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제6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6시는 낮 12시 정오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기 때문에, 지금 3시간 정도 시간이 흘렀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어느 죄수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십자가 처형이었습니다. 격렬했던 시간은 지나고, 관중들도 하나둘 떠나고, 이제 처형자들의 숨이 끊어지는 지루한 시간만 남았습니다. 다 끝난 것입니다.
그런데 정오가 되자,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늘이 갑자기 캄캄해졌습니다. 이 어둠은 오후 3시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오후 3시가 되자,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이 어둠 속에서 갑자기 크게 외치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엘리’라는 말은 ‘나의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지금까지 하나님을 주로 ‘아버지’라고 부르셨죠. 그런데 지금은 ‘나의 하나님’이라고 다르게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에 어떤 영적인 일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아사셀 염소와 같이, 세상 죄를 지고 광야로 향하는 그런 영적인 시간을 지나고 계십니다. 삼위일체의 하나님... 태초로부터 언제나 하나이셨던 하나님의 아들이 지금 하나님과 분리되어 어둠으로 들어가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그토록 기도하신 이유는 이것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예수님의 갑작스런 외침을 들은 군병들은 이 외침을 오해했습니다.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 우리는 지금 십자가 위의 예수님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군병들을 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도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도 그때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어떤 마음으로 그 마지막 시간을 보내셨는지 잘 모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는 우리 생각과 다른 의미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그 말씀은 시편 22편의 첫 구절이기 때문입니다.
읽어보면, 시편 22편은 놀라운 말씀입니다. 절망과 고뇌로 시작한 그 말씀은 21절에서 극적인 변화가 나타납니다. 야니타니... ‘주께서 내게 응답하셨도다’ 그 한마디로 그 시편의 분위기는 완전히 바뀝니다. 그리고 그 시편은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에 대한 감격과 환희로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을 찬양한 그 말씀을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으로 암송하시려 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소망과 기대와 헌신 속에 마지막 시간을 보내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내용은 우리가 올해 고난주일에 살펴보았기 때문에 이 정도로 살펴보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시편 22편에 이어, 다시 한번 큰 소리를 외치시고 마침내 운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마지막 모습을 마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네, 미묘한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숨지시고 죽으시고 운명하신 것이 아니라, 영혼이 떠나가셨습니다. 이것은 능동적인 의미이죠.
예수님은 인간의 무기력한 마지막과 달리, 마치 예배를 드리듯 기도와 말씀과 소망과 염원 속에 마지막 힘을 다하시고, 스스로 떠나시듯 영혼이 떠나셨습니다. 저는 이것이 단순히 마태가 그렇게 표현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마지막 시간도 스스로 결정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 시간은 더 늦어져서는 안 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 시각 성전에서는 유월절 양을 잡고 있었고, 예수님은 해가 저물기 전에 죽으시고 장례까지 마쳐져 온전한 유월절 양이 되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영혼이 떠나가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운명하시는 바로 그 시각... 유월절 제사로 분주한 성전 안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네, 성전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진 것입니다. 성전의 휘장이 찢어진 사건은 초자연적이고 상징적인 사건이죠. 그래서 마태, 마가, 누가 세 복음서 모두 중요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여기서 이제 진행을 멈추고, 하나님이 행하신 이 초자연적이고 상징적인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본래 성전의 휘장은 2가지가 있습니다. 성전 안에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내부 휘장이 있고, 성전 바깥 나무 문 앞에 외부 휘장이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휘장 자체에 대한 성경의 기록이 많지 않습니다. 휘장에 대한 언급은 많지만, 휘장 자체가 어떤 모습인지에 대해선 구약 성막 휘장에 대한 간단한 기록만 있습니다 ‘그것이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만들어졌고 거기에 그룹의 형상이 정교하게 수놓아졌더라’ 그러나 솔로몬 성전의 휘장과 지금 헤롯 성전의 휘장에 대해선 성경 안에서 전혀 기록이 없습니다.
그런데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가 예수님 당시 헤롯 성전 외부 휘장에 대해 묘사한 기록이 있습니다. 요세푸스는. 헤롯 성전 입구 나무 문 앞에 두꺼운 바깥 휘장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 바깥 휘장은 땅과 바다와 하늘을 상징하는 화려한 색깔로 된 놀라운 작품으로, 높이가 55규빗이나 되고 두께도 1인치나 된다는 것입니다. 대략 환산하면 높이는 25미터(7층 정도) 두께는 2.5cm 정도 되는 거대한 카페트에 가까운 휘장입니다. 
황소가 양쪽에서 잡아당겨도 찢어지지 않고 또 그것을 설치할 때 제사장 수백명이 동원되었다고 합니다. 다만 요세푸스는 성전 안의 휘장에 대해선 아무 말을 안 하는데, 아마 성전 내부 휘장도 외부 휘장에 못지않은 큰 휘장이었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이와 같은 휘장이 찢어진 것입니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말이죠. 유월절로 인해 성전 안에 제사장들과 수많은 사람으로 북적이던 시간에, 성전 휘장이 그들 눈앞에서 공개적으로 찢어진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오늘 말씀은 그것이 성전 내부 휘장인지, 바깥 휘장인지 정확히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어느 것이 찢어졌는지... 둘 다일 수도 있겠죠.
아무튼 중요한 것은 성전을 상징하는 그 크고 두꺼운 휘장이 그렇게 초자연적으로 또 공개적으로 찢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분명 특별한 의미가 담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그 일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그런데 오늘 말씀에 힌트가 보입니다. 예수님이 운명하실 때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지는 지진이 있었다고 하죠. 그렇다면 아마도 휘장은 직접적으로 그 지진으로 찢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지진은 그날의 어둠과 함께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였습니다.
그렇다면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이 사건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여기에 어떤 하나님의 상징적인 의미가 있을까요? 크게 2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이 사건은 성전과 성전제도의 종말을 의미합니다.
네, 성전과 성전제도의 종말, 즉 이제 성전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시대는 끝났다는 의미입니다.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 내용을 인터넷에서 검색해보았습니다. 많은 관련 설교나 자료들을 볼 수 있었는데, 주로 이런 내용이 많았습니다.
  ‘성전 휘장이 찢어진 사건은 죄인인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 가림막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기도하고 예배하면서 이제 하나님 앞으로 마음껏 나아갈 수 있다. 이 얼마나 감사하고 기쁜 일인가... 우리는 이제 그렇게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에 힘써야 한다... ’
고 조용기 목사님도 대표적으로 그렇게 설교를 하고, 많은 목사님들도 그런 방향으로 설교를 많이 해놓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조금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이 사건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은 물론 틀린 말이 아니죠. 그러나 그 의미가 이제까지 하나님께 못 나아갔는데, 이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생각해보면 과거에도 얼마든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제사와 제사장을 통해서 말이죠.
그렇다면 성전의 휘장이 찢어진 본질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네, 그 의미는 성전의 폐지와 종말입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예수님께서 이 의미를 제자들에게 이미 많은 말씀과 비유와 이적으로 사전에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시는 길에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말리신 이적이 있었죠. 그것도 성전의 종말을 의미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의미가 성전의 폐지와 종말이라면, 왜 지금 상당수 설교나 가르침이 성전 휘장이 찢어진 의미를 그렇게 말하지 않고, 우리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되었다는 의미로 말할까요? 왜 1차적 의미를 말하지 않고, 2차나 3차적 의미로 1차적 의미를 어쩐지 가리는 걸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오늘 우리 교회의 모습이 성전 및 성전제도와 가깝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교회는 성전을 어쩐지 버리지 않은 것 같습니다. 몇 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오늘 우리 많은 교회의 모습은 여러 면에서 신약 교회가 아닌 구약 성전과 가깝습니다.
교회를 자꾸 성전이라 부르고, 목회자는 자꾸 제사장이 되려고 하고, 헌금도 조금 의무적인 구약 느낌이 나고, 교회 행정이나 제도도 할 수만 있다면 권위적이고 수직적인 성전제도를 닮으려 합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이 말씀하는 교회의 모습은 그렇지 않습니다. 
신약의 교회는 어디까지나 수평적인 사랑의 공동체이죠. 조직도 있고 질서도 있지만, 그래도 그 본질은 각자의 은사대로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가족 같은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목회자는 목자이지만 교사에 가깝고 사제나 제사장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섬기고 모범을 보이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목사와 신자들이 함께 협력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 가는 곳입니다. 이게 신약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안타깝지만 이런 교회를 현실적으로 이루기 쉽지 않습니다. 목회자와 신자가 서로 성숙해야 하고 또 서로 잘해야 그런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데, 그렇게 잘 안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인지 많은 목회자들은 신약의 이상적인 교회를 버리고 구약의 성전 같은 교회를 만들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을 통솔하려면 그게 좋죠. 조직을 만들고 권위를 만들고 규칙을 만들고 훈련을 만들고 프로그램을 만들고 그런 가르침을 만들고... 그래서 지배하고 감독하는 수직적인 교회를 만듭니다. 그것은 사실 공동체가 아니고 하나의 단체나 조직이지만,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큰 교회이든 작은 교회이든 잘 안 될 때가 많습니다. 서로 여간 성숙하지 않고는, 교회가 중심을 잃고 흩뜨려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실적으로는 목회자들은 강한 리더쉽을 발휘하여 이끌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일부 목회자들은 그렇게 강하게 교회를 이끌어가는 것을 목회 리더쉽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는 구약의 성전을 지향하는 교회가 아닌, 신약의 참된 공동체를 지향하는 좋은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본래 하나님은 다윗이 처음에 성전 건축을 하려고 할 때, 그리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성전이 여러 가지로 잘못될 수 있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다윗에게 성전을 허락하셨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성전이 계시되고 임할 때까지 허락된 한시적인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함께 성전의 휘장을 찟으신  뜻을 바르게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보이는 성전의 시대는 끝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이제 성전은 없습니다. 보이는 성전은 영원히 사라졌습니다. 어떤 분들은 그런 성스러운 장소를 찾고 싶어하고 찾아가기도 하죠. 바티칸에 가보기도 하고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도 하고 저 칠레의 땅끝 등대를 찾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땅에 이제 성전은 없습니다. 보이는 성전은 영원히 사라졌습니다. 

둘째, 이 사건은 우리가 이제 하나님을 만나려면 새로운 성전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래된 뭔가가 폐지되었다면, 그 자리에 새로운 뭔가가 세워져야 하죠. 그래서 하나님은 보이는 성전을 폐지하시고 그것을 대체할 새로운 성전을 세우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성전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왜 보이는 성전을 폐지하셨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전이란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 즉 하나님의 집입니다. 신전에 신이 있듯이 하나님은 성전에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좋은 의미가 되면 더할 수 없는 좋은 의미가 되지만, 만약 나쁜 의미가 되면 더할 수 없는 나쁜 의미도 됩니다. ‘하나님이 이곳에 임재하셔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의미입니까?
그러나 나쁜 의미도 될 수 있는데,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성전에 모셔두고 우리는 성전 밖에서 우리 마음대로 산다면, 그만큼 나쁜 의미도 없습니다. ‘이따금 거기에 가서 절하고 경배하면 우리에게 복을 내려주시고 지켜주시고... 알겠죠? 하나님!’ 이런 식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제한하고 우상처럼 만드는 악한 일입니다. 인간은 이렇게 하나님마저 우상으로 만드는 악한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이런 말을 했죠. ‘인간은 끊임없이 우상을 만들어내는 공장이다.’
그러므로 성전은 하나님을 그런 우상의 하나님으로 만드는 악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엔 반드시 타락한 사제들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부패한 권위를 부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성전 휘장을 찢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제 성전을 폐지하고, 그곳을 떠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의 거룩함은 특별한 장소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으로 확장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신학적으로 말하면, 이것은 거룩함의 퇴보가 아니라 거룩함의 발전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은 성전을 벗어나 우리 일상의 모든 장소와 시간으로 확장되었습니다. 그에 따라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그분을 만날 수 있는 특권도 가지지만, 동시에 우리 삶 전체로 거룩한 일상을 살아야 하는 의무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거룩함은 우리 신약의 신자들에게 더 철저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우리 일상에서 거룩함을 추구할 수 있을까요? 
그 비결은 우리 신약의 신자들에게 주어진 새로운 성전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하고 그분을 섬길 수 있습니다.
그 새로운 성전은 무엇이고 어디에 있을까요? 네, 이것은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내용입니다. 그 성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2:19)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새로운 성전은 바로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키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즉 예수님 그분이 바로 우리의 새로운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계21:22)
한편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해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라고 말씀하기도 했죠. 그러나 그것은 믿는 자들이 성전이란 의미가 아니라, 그들이 예수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성전이라고 말씀한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말씀드려, 새로운 영적인 성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성전이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고, 또 예수님 안에서 모든 일상을 거룩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새로운 신앙에서 교회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교회는 과거 성전과 같은 하나님의 집이 아니라, 내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모임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중요성은 약해지지 않습니다.
교회는 캄캄한 어두운 골짜기의 불 밝힌 작은 오두막처럼, 우리는 이 어두운 세상에서 교회를 통해 양육 받고 보호 받고 하나님의 나라로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를 사랑하고 아끼고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귀한 공동체로 만들어 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새로운 신앙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교회로 모이면서 영적인 성전인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우리 일상 전체로 믿고 섬겨야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우리의 새로운 신앙 방식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는 찢어진 성전 휘장이신 예수님을 통해 새로운 영원한 성소로 들어가 거기서 하나님을 만난다.’ ‘예수님은 이 예루살렘 성전과 도성 밖으로 나가 거기서 고난을 당하셨는데, 우리도 그리로 가자. 이곳은 더이상 영원한 성전과 도성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 새로운 영적인 장소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그곳에서 하나님께 항상 찬송의 제사를 드리고, 선을 행하고, 서로 나누어 주는 제사를 드려야 한다. 하나님은 이같이 우리가 우리 일상 전체로 그분의 뜻을 행하는 제사를 기뻐하신다.’ 
네, 히브리서는 이렇게 우리에게 새로운 신앙을 우리에게 촉구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우리가 잘 보지 않는 소외된 성경입니다. 목회자들이 히브리서를 잘 언급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만약 한 신자가 히브리서를 제대로 읽는다면, 그 사람은 새로운 신앙에 눈을 뜨기 때문입니다. 건물이니 의식이니 목회자니 교회 제도니 직분이니... 이런 것들을 초월하여 자신의 삶과 일상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추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과 저는 찢어진 성소 휘장을 통해, 신약의 새로운 신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교회 안에 갇힌 옛 신앙을 버리고, 우리 삶 전체에서 더 자유롭게 더 철저하게 하나님을 만나고 섬겨야 합니다. 믿으십니까?
이것은 복음서가 말씀하고 히브리서가 말씀하고 또한 로마서가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이렇게 사도바울도 우리 삶 전체로 영적인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한 말씀만 더 드리고자 합니다.
여러분 모두 이런 새로운 신앙 방식을 원하시죠? 네, 그런데 이런 새로운 신앙 방식은 단순히 마음과 생각만으로는 잘 안 됩니다. 중요한 한 가지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네, 그것은 사도바울이 좀 전의 영적 예배를 권면한 그 말씀 바로 다음에 나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네, 여러분이 성전을 벗어나 이 온 세상 속에서 그렇게 온전히 하나님을 믿고 섬길 수 있으려면,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이해와 분별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분별할 때,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과 세상 전체 속에서 사랑과 정의와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며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신자는 그분의 새로운 공동체인 교회를 통해 더욱 그런 삶과 신앙을 살아가는 새로운 신자가 될 것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들에핀믿음찬교회 성도님들은 그런 귀한 분들이 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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