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믿음찬교회 0 124 2022.10.18 15:43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마 27:39~44
2022.10.16.

오늘 말씀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향한 조롱과 모욕의 내용입니다. 예루살렘 백성과 성전권력자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모욕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 내용을 살펴보고, 이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모욕하는지, 그 의미는 무엇인지, 그래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조롱하는 첫 번째 내용은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라는 말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그렇게 말하신 적이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신 적은 있습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이 말씀은 요한복음 2장의 성전 정화 직후 유대인들을 향해 하신 말씀입니다. 두 말은 뉘앙스가 다르지만, 아무튼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그렇게 나쁘게 말했다고 알아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눈에 예수님은 성전을 헐겠다고 한 성전모독자이자, 성전과 성전 제도를 어설프게 개혁하려고 한 개혁자이자 실패자입니다.
함부로 성전을 모독하고, 주제넘게 성전을 개혁하려고 하고, 결국 실패한 사람... 너는 그런 인물이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사람들이 성전과 율법을 개혁하려고 한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당시 잘못된 성전 지도자들과 성전 제도와 율법 해석과 율법 적용에 대해 별다른 의문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들은 그런 근본적인 의문이 없는 채 성전과 율법 안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개혁적인 말씀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들을 향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예수님은 많은 이적과 귀신 축출과 충분한 가르침과 대화에도 불구하고 듣지 않는 그들에게,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다, 내 말을 깨닫지 못한다,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한다...’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예수님은 결국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예수님의 이와 같은 슬픈 결론은 오래전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하신 말씀과 동일합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이렇게 듣지 못하는 그들은 예수님의 새로운 말씀과 개혁적인 말씀이 불편하고 싫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자, 예수님을 실패한 어설픈 개혁가로 생각하고 이렇게 마음껏 조롱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과 같이, 오랜 익숙한 전통 속에 개혁을 거부하는 일은 일반적인 역사이자 영적인 역사입니다. 사람들은 의미 있는 변화와 개혁을 좋아할 것 같지만, 그러나 의외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눅5:39)
그러므로 항상 개혁은 어렵습니다. 일반적인 개혁도 그렇고 영적인 개혁도 그렇습니다. 전통을 바꾸고 관념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고 생활을 바꾸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죄에 물든 내 생각과 생활을 바꾸고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영적인 개혁도 쉽지 않습니다.
개혁이 왜 쉽지 않을까요? 개혁을 하려면 우선 잘못된 것을 알아야 하고, 잘못된 것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하고, 그리고 새로운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천로역정의 미스터 크리스천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어느날 그는 결단을 하고 장망성과 같은 자신의 마을을 떠나 순례의 길을 나섭니다.
우리가 복음서 말씀을 잘 읽어보면, 예수님은 어떻게 보아도 단순한 구원자나 메시아가 아니라, 개혁가이셨습니다. 우리는 복음서를 통해 그런 예수님을 잘 발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단순한 구원자가 아니라, 성전과 율법을 개혁하고 그 시대의 그릇된 생각과 관념을 관통하고, 그래서 우리에게 영적인 구원과 새로운 삶을 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묵은 밭을 기경하는 개혁과 변화 없이 하나님의 구원은 오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개혁가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분을 믿고 배우고 따르면, 우리도 깨우치고 개혁적인 삶을 살고 우리 시대와 사회와 전통과 관념을 넘어서는 사람이 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우리는 사도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이 성전과 율법을 떠나 새로운 교회와 신앙을 만든 역사를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이 아닌 주일에 모였고, 성전이 아닌 집에서 모였고, 제사가 아닌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낯선 일일까요?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의 새로운 말씀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감독과 장로들이 세워지고 집사들이 세워지고 그렇게 교회는 성장해 갔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성장하면서 로마 교회가 점점 커지고 교황이 나오고 교회는 힘을 잃고 중세 천년의 암흑기로 들어갔습니다. 비록 그 시간은 길었지만 그 시대를 뛰어넘는 많은 개혁가들이 나왔고 마침내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또다시 개혁되고, 새로운 개혁교회가 나왔습니다. 지금 우리도 그런 개혁교회의 일원이고, 하나님은 이렇게 계속 개혁의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그러면 당시 종교개혁가들은 어떻게 종교개혁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들이 종교개혁을 할 수 있었던 비결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재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루터나 칼빈이나 쯔빙글리나 모두 말씀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말씀에서 그 시대와 교회의 문제점을 발견하고, 그 힘으로 중세 천년의 껍질을 깨고 나올 수 있었습니다.
눈을 돌려 우리나라를 보면, 복음이 들어오기 전 우리 민족은 민간신앙과 유교와 불교가 어지럽게 자리잡고 있던 세계였습니다. 부패한 양반사대부들이 변화를 요구하는 백성들을 지배하고, 나라는 정체되고 발전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민족은 그런 막다른 길에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들어오고 복음이 들어오면서, 비록 일제강점기를 거쳤지만, 우리 민족은 오랜 전통과 관념을 벗고 개혁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 민족이 새로운 하나님의 말씀을 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예수님의 개혁과 교회의 개혁과 우리 민족의 개혁 속에, 이렇게 개혁에서 개혁으로 이어지는 연장선에 서 있습니다. 세상은 악하고 부패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나 새로운 사람을 만들고 새로운 가지를 내고 새로운 개혁을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본질이라 할까 정체성이라 할까... 그것은 개혁입니다. 영적 원리도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의 역사는 늘 우리를 새롭게 하고 개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이런 우리 신자의 본질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침륜에 빠진다는 말이 좀 어려운 표현이죠. 이것은 뒤로 물러가 부패하고 망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성장이 멈추고 생각이 굳어지고 그래서 세상 속에 같이 부패하고 휩쓸린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 삶과 영혼을 날마다 새롭게 구원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삶이 개혁이고 성경 말씀이 개혁이고 기독교의 역사가 개혁이고 문명사의 발전도 개혁이고 우리 민족의 역사도 개혁인데...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 우리 교회와 신앙은 개혁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보수화되고 있다...’ 그렇게 평가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도 신자들도 보수화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새롭게 들어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교회는 정치적으로도 보수화가 되고 있습니다.
늘 드리는 말씀이지만 정치이든 우리 삶이든 무엇이든 보수와 진보가 있기 마련입니다. 보수는 좋은 것을 지키자는 것이고, 진보는 좋은 쪽으로 나아가자는 것입니다. 정치든 우리 삶이든 그것은 다 필요합니다. 지킬 것은 지키고 바꿀 것은 바꾸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는 정체되고 하나님의 말씀은 새롭게 선포되지 않고 설교는 늘 듣던 말씀의 반복입니다. 저도 목사이지만, 저는 목사님들이 좀 새로운 말씀을 하는 것을 잘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저는 새로운 말을 하는 목사인 것 같습니까? 이렇게 목사님들이 정체되니, 신자들도 정체되고 성장하지 못하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새롭게 선포되고 성령의 역사가 활발할 때, 교회는 세상을 이끌고 늘 새로운 길을 열었습니다. 교회는 세상의 대안이 되고 늘 새로운 길로 나아갔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교회 이름 앞에 ‘들에핀’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장소를 의미하는 말이죠. 본래 광야와 들은 성전보다 오래된, 하나님을 만나는 원시적인 장소입니다. 아브라함도 모세도 이스라엘 백성도 예수님도 거기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저는 처음에 교회 이름을 ‘들에핀’이라고 지었습니다. 기성에 오염되지 않은, 형식화되지 않고 제도화되지 않은, 본질적이고 자유롭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그런 새로운 교회가 되자는 의미로 이름을 그렇게 지었습니다.
물론 무조건 새로운 것으로 나아가자는 것은 아닙니다. 기존 것은 다 버리고 새로운 것만 찾자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역사를 알면, 정말 그것을 제대로 알면 우리는 시대와 현실에 갇히지 않고 새로운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들에핀믿음찬교회 성도님들은 개혁적인 신앙과 삶이 되시길 바랍니다. 개혁은 하나님의 역사이고 우리의 정체성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생각과 생활도 늘 새로워지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어두운 세상 속에 묻히지 않고 그렇게 새롭게 사는 사람을 귀하게 보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새로운 삶을 살고 개혁적인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개혁의 가장 중요하고 강력한 수단입니다. 예수님 당시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새롭게 하셨기 때문에 개혁이 일어난 것이고, 종교개혁도 종교개혁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새롭게 발견하였기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스위스의 종교개혁가 쯔빙글리는 교회 청년들과 원어로 성경공부 모임을 만들었는데, 몇 년 후 하나님의 말씀을 새롭게 발견한 그 청년들은 쯔빙글리보다 더 열성적인 종교개혁가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말씀이 있어야 개혁도 일어나고 성령의 역사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말씀이 없으면, 개혁은 일어날 수 없고 성령의 역사도 지속되지 못하고 단기간에 그칩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과거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을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 한국교회는 2007년에 평양대부흥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많은 행사와 집회를 개최하였습니다.
그러나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은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이지만, 그것을 좀 차분히 비판적으로 생각해보면 아쉬웠던 점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 영향력과 파장은 그 명성에 비해 그리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그 운동의 범위도 교회 안에서 주로 이루어졌고, 당시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습니다. 물론 그때가 우리 민족의 불행한 역사가 진행되던 시기이기도 하였지만, 무엇보다 당시 교회가 아직 하나님의 말씀을 충분히 몰랐기 때문에 그 부흥 운동과 회개 운동을 좀 더 오래 깊이 간직할 수 없었습니다.
이후 한국교회는 일제강점기로 들어가고, 일제의 탄압으로 대부분의 교회는 신사참배와 같은 잘못된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평양대부흥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던 길선주 장로도 이후 목사가 되었지만, 말씀을 잘 몰랐기 때문에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신비주의 성령 운동으로 치우치고 말았습니다.
한국교회 성령 운동은 90년대 이후에 다시 한번 열풍처럼 일어났습니다. 그때 한국교회는 성장이 정체되고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표출되던 시기였습니다. 그때 해외로부터 유입된, 방언과 예언과 여러 현상을 강조한 그 성령 운동은 한국교회의 돌파구가 되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돌아보건대 그 성령 운동은 성경 말씀에 근거한 올바른 성령 운동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그 성령 운동의 자취는 거의 사라졌고, 한국교회는 오히려 더 약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운동은 말씀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가 말씀과 함께 가듯이, 성령 운동도 말씀과 함께 가야 합니다. 말씀이 없는 성령 운동은 위험합니다. 성령님은 말씀의 영이시고, 그분은 말씀으로 우리 개인과 교회를 새롭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평소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시고 잘 배우시길 바랍니다. 이 가을에 부지런한 다람쥐가 열심히 양식을 모으는 것같이, 하나님 말씀을 늘 부지런히 모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 충분히 모이면, 성령님은 여러분의 삶에 역사하시고 개혁은 일어납니다.

예수님을 배반한 가룟 유다나 지금 예수님을 조롱하는 사람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을 배반하고 조롱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고 들을 줄 모르면, 성전은 인간의 성전이 되고 율법도 인간의 율법이 되고 예배도 인간의 예배가 됩니다. 하나님과 무관한 종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단순히 종교를 갖자고 여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단순히 종교를 가지고 위로를 받자고 여기 있는 것이 아니라, 새 생명을 얻고 새 삶을 살기 위해 여기 있습니다.
아무쪼록 하나님의 말씀을 늘 들으심으로, 여러분의 삶과 신앙을 늘 개혁하시고 새롭게 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조롱하는 두 번째 내용은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는 말입니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그들은 그렇게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이 내용은 그들이 어떤 메시아를 원하는지... 그들 안에 있는 잘못된 생각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한마디로 능력의 메시아를 원하고 있습니다. 메시아가 누구인지 몰라도 그가 능력만 있다면, 그들은 그 앞에 엎드려 메시아로 모실 것입니다.
갈멜산에서 하늘의 불을 내린 엘리야 선지자와 같은 그런 메시아라면, 그들은 아무 의심 없이 그를 메시아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이 세상은 그런 지도자를 선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능력의 주님이시지만, 그런 능력의 주님은 아니십니다. 자기의 능력을 자기를 위해 사용하지 않는 주님... 오직 하나님의 뜻을 위해 자기의 능력을 제한하시는 주님... 예수님은 바로 그런 메시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돌을 명하여 떡으로 만들라는 마귀의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시험에 두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자기의 능력을 자기를 위해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은 떡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 대답하시며 마귀를 물리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런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우리의 힘과 능력을 우리를 위해 사용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사용해야 합니다. 내가 힘이 있다고 마음대로 하는 것, 내가 능력이 있다고 함부로 하는 것... 그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조금 더 나를 낮추고 절제하는 것, 나를 위해 내 힘과 권한을 사용하지 않는 것... 그런 모습이 합당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지 않죠. 자기에게 있는 힘과 능력과 권리를 100% 200% 사용하는 것이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이 어떤 메시아이고 어떤 하나님의 아들인지 알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도 어떤 십자가인지 알아야 하겠습니다. 십자가는 승리의 상징이 아니라 패배의 상징입니다. 죽음과 패배와 실패의 상징이죠. 그러나 하나님은 오히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놀라운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십자가를 사모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그런 주님을 바라보고 그렇게 주님을 따라가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십자가 위에서 조롱받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실패한 어설픈 개혁가로, 능력이 없는 가짜 메시아로 조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진정한 개혁가이시고, 진정한 능력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아무쪼록 우리 들에핀믿음찬교회 성도님들은 그런 예수님의 진정한 모습을 본받으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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