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깨끗한 세마포 옷

믿음찬교회 0 91 2022.10.11 15:29
깨끗한 세마포 옷
계19:1~9
2022.10.07.

오늘 본문은 17장과 18장의 바벨론 패망에 이은 장면으로, 하늘에서의 큰 찬송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찬송의 첫 번째 이유는 바벨론이 드디어 패망했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이 패망해야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실현될 수 되죠. 그래서 이런 이유에서 하늘에서 큰 찬송이 울려 퍼집니다.
찬송의 두 번째 이유는 어린 양의 혼인 잔치가 곧 열리기 때문입니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가 이제 열리고 신부가 준비됩니다. 신부는 다름 아닌 짐승과 바벨론을 이긴 교회와 참된 신자들입니다. 그들은 세마포 옷을 입었는데, 그 옷은 그들의 옳은 행실을 상징합니다. 참으로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속한 모든 거룩한 존재들이 바벨론의 패망과 어린 양의 혼인 잔치, 즉 세상 나라의 몰락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기쁘게 찬송합니다.

찬송에 이어 요한의 곁에 있는 천사가 “복이 있도다”라는 특별한 말씀을 합니다. “복이 있도다”라는 말은 원어 그대로 말하면 “복되도다”라는 말입니다. 영어로는 “blessed are those”, 헬라어로는 “마카리오이 호이”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의 복된 상태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마치 아기가 엄마 품에 고이 안겨있는 모습과 같습니다.
복되다는 말씀이 요한계시록에는 모두 7번이 나옵니다. 첫 번째는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1장)가 복되죠, 두 번째는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은 자들’(14장)이 복되죠, 세 번째는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16장)가 복되죠. 네 번째는 오늘 본문에서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19장)이 복되죠. 다섯 번째는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20장)이 복되죠, 여섯 번째는 ‘이 두루마리의 예언을 지키는 자들’(22장)이 복되죠, 마지막 일곱 번째는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22장)이 복됩니다. 이 일곱 가지의 복은 모두 우리의 구원과 관련이 있는 구원의 복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요한계시록이나 신약성경이나 구약성경이나 성경이 말씀하는 궁극적인 복이 하나님 나라의 복이고 구원의 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구약성경이 때로 현세적인 복을 말하기도 하죠. 생육하고 번성하는 복과,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과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의 복과, 젖 먹이는 복과 태의 복과, 들어가도 받고 나가도 받는 복이 있죠. 그러나 그런 현세적인 복은 신약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습니다.
신약의 복의 가장 절정인 예수님의 팔복이나 요한계시록의 칠복은 모두 하나님 나라 와 구원의 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같은 말씀을 따라 성경이 말씀하는 복의 의미를 잘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집을 사고 차를 사고 승진하고 성공하고...’ 그런 것이 복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 아무개 성도가 이번에 국회의원에 당선이 되었습니다, 혹은 우리 교회 아무개 학생이 이번에 좋은 대학에 합격했습니다...’ 그런 것이 복이 아니죠.
국회의원 되었는데 몇 년 후에 교도소에 들어가고, 좋은 대학에 들어갔는데 몇 년 후에 신앙을 잃어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어디까지나 성경이 말씀하는 복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사느냐, 우리의 구원이 얼마나 깊어지느냐, 우리의 믿음과 사랑이 얼마나 온전해지느냐... 이와 같은 하나님 나라와 구원의 복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다시 9절 말씀으로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천사가 말하는 복이 얼마나 고귀한 복인지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최종 구원의 복입니다.
우리는 세마포 옷을 입은 신부이고, 동시에 그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고 참석한 하객이자 주인공입니다. 아무쪼록 어린 양이 베푸시는 이 영광스런 만찬에 모두 다 참석하시는 복된 여러분들 되시길 빕니다.

한편, 오늘 본문의 세마포 옷과 관련해서는 오랜 해묵은 구원론 문제가 있습니다. ‘칭의냐 성화냐’ 하는 문제이죠. 즉, 구원에 있어서 ‘믿음과 칭의로 충분하다’는 주장과 ‘아니다, 올바른 선한 행실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늘 대립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7~8절은 우리 구원에 있어 올바른 행실의 중요성을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7~8절을 원어 그대로 살펴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원어는 “어린 양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주셨다”라고 되어있습니다. 신부가 자신을 깨끗하게 준비하였기 때문에 곧 하나님이 그에게 세마포 옷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말 번역은 이 의미를 조금 약화시켜서 “어린 양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허락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신부가 자신을 준비하는 것과 함께 하나님의 허락과 용인을 추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원문의 의미를 조금 약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준비하면 하나님은 곧 세마포 옷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삶에서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잘 준비해야 합니다.

여러분, 구원론에 있어서 ‘칭의냐 성화냐’하는 문제는 간단히 정리될 수 있습니다.
정답은 칭의와 성화 어느 한쪽이 아닙니다. 둘 다가 정답입니다. 그리고 둘 다가 사실은 같은 한 의미입니다. 흔히 칭의와 중생을 일회적인 것으로 많이 이해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계속되는 칭의와 계속되는 중생이 성경이 말씀하는 구원입니다.
우리는 그 예를 아브라함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칭의가 그날 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을 보여주시면서 약속하실 때 그것을 믿은 한 번의 사건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때만이 아니라, 이삭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실 때도 그것을 믿어 칭의를 받았습니다. 또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을 때에도 그것을 믿음으로 행하여 칭의를 인정받았습니다.
의롭다는 의미 자체를 살펴보아도, 거기에는 일회적인 법정적 의미만이 아니라 계속적인 관계적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분과의 언약 관계에 충실할 때 ‘우리는 의롭다’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구원론 문제는 제가 여러 차례 말씀을 드렸기 때문에 잘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러므로 한 마디로 말씀드리면, 우리의 구원은 행함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행함이 있어야 올바른 구원이 됩니다. 그것이 부인할 수 없는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이 점을 지나치게 염려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날에 우리는 우리의 행위 일거수일투족으로 평가받는 것이 아니라 선악간의 전체적인 차원에서 평가를 받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5:10 말씀이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네, 한 사람의 삶이 선이었느냐 악이었냐 그렇게 전체적인 차원에서 판단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도 죄에서 완전히 자유롭거나 죄에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늘 회개하는 삶을 산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은 선한 삶을 살고 다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만하지도 말고 그렇다고 염려하지도 말고, 오직 구원의 확신과 긴장 속에 우리의 구원을 성실히 이루어가야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잘 준비하시길 바랍니다.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작은 죄도 멀리하고, 욕심내지 말고, 되도록 용서하고 사랑하고, 점점 의로워지고, 하나님과 가까워지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세마포 옷이 준비됩니다. 우리는 그 옷을 입고 주님을 만나러 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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