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빌라도의 재판

믿음찬교회 0 120 2022.10.02 12:01
빌라도의 재판
마 27:11~26
2022.10.02.

우리는 지난번에 산헤드린 공회의 재판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재판은 죄 없는 예수님을 정죄한 악한 재판이었습니다. 거짓 증인을 세우고 유도 심문을 하고 신성 모독으로 정죄하고...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정죄를 개의치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을 심판하셨습니다. “이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예수님의 이 심판의 말씀은 오래지 않아 예루살렘에 비극적으로 임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정죄한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이제 예수님을 빌라도 재판에 회부시키려고 의논합니다. 27:1~2절 말씀이 그 내용을 말합니다.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여기서 무엇을 의논하는가?... 네, 그들은 현재 로마의 지배하에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처형할 권한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빌라도의 손으로 예수를 처형해야 하죠. 그런데 신성모독 죄로는 빌라도의 사형을 받아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빌라도가 사형을 내릴 수 있도록 예수님의 죄목을 추가하고 조정하는 의논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최종적으로 예수님의 죄목을 3가지로 만들었습니다.
이 내용은 누가복음이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고발하여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첫째)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둘째)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셋째)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
이 3가지 예수님의 죄목은 다 사실이 아니지만, 그러나 그들은 빌라도가 사형 판결을 쉽게 내릴 수 있도록 이렇게 예수님의 죄목을 많이 준비했습니다.
네, 이와 같은 모습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에도 정치적인 잘못된 재판은 죄를 만들고 나열하고 부풀립니다. 반대로 죄를 감추고 불기소하고 무혐의 처분하는 재판도 있습니다. 불의한 재판의 문제는 모든 시대마다 존재하고 오늘날에도 여전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예수님이 인간의 불의한 재판을 통해 정죄 되셨음을 기억하고, 이런 불의한 재판에 반대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예수님의 죄목을 준비하고 자기 사람들을 많이 동원해서... 새벽에 빌라도에게로 갔습니다. 빌라도는 당시 성전 옆에 지어진 안토니우스 요새에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이때 그들은 빌라도 총독이 있는 그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예수님만 안으로 들여보내 그 관정에 있게 하고, 자신들은 입구에서 빌라도를 만납니다. 그것은 그들이 그날 더럽힘을 받지 않고 유월절 음식을 먹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의 말을 들은 빌라도는 다시 안으로 들어와서 예수님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네, 이것은 빌라도가 이 죄목에 가장 큰 관심을 보였다는 의미입니다. 백성을 미혹했다든지 세금을 금했다든지 하는 것은 실제로 그런 일이 중대하게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빌라도의 관심사가 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는 빌라도의 질문에 대답하셨습니다. “네 말이 옳도다” 예수님은 이 말씀 한마디를 하고 이후 어떤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산헤드린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생사가 결정되는 그 시간에 예수님은 오직 침묵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네, 지금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이와 같은 예수님의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게 됩니다.
여기까지가 14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이후 오늘 말씀은 빌라도가 예수님의 죄를 확정하지 못했지만, 결국 대제사장과 장로들과 군중들의 압박으로 십자가 처형을 허락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말씀은 이 빌라도 재판에 있어서, 누가 과연 예수님의 죽음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재판에는 3부류의 사람이 관여합니다. 빌라도, 예루살렘 군중들, 대제사장과 장로들... 여기에서 누가 예수님의 죽음에 가장 큰 책임이 있을까요? 오늘 설교는 이 내용을 살펴보면서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먼저 빌라도를 살펴보길 원합니다.
사도신경에 예수님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사도신경을 표준적인 신앙고백으로 암송하고 있죠. 그래서 우리는 은연중 예수님의 죽음에 가장 큰 책임이 빌라도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사도신경 자체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사도신경은 오래된 좋은 신앙고백이긴 하지만 나름의 한계와 시대적인 오류를 가지고 있습니다. 번역도 좀 미흡합니다. 여러 작은 부분은 그렇다 하더라도... 무엇보다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는다는 내용엔 분명한 문제가 있습니다.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 대개 많은 분들은 이것을 성도가 서로 교제하는 것을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왜 그것을 믿어야 할까요? 성도들은 서로 아름답게 교제하면 되는데, 왜 그것을 믿는다고 고백해야 할까요?
네, 사실 이것은 성인들의 통공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가톨릭교회 사도신경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개신교회에서는 그대로 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 내용을 수정하였습니다.
그러면 본래 표현인 성인들의 통공을 믿는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우선 여기서 말하는 성인들은 성도가 아니라, 가톨릭교회가 성인으로 추대한 죽은 성인들입니다. 가톨릭 교회는 그 죽은 성인들이 통공, 즉 공로를 나누어 주는 것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죽은 성인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들의 역할을 높이는 내용입니다. 죽은 성인들을 가톨릭교회가 그렇게 높이는 이유는 사도신경이 만들어질 당시 즉 5세기경에 사람들의 믿음이 그런 시대적 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으로선 맞지 않고, 무엇보다 성경에 없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우리 개신교회는 받아들일 수 없고... 그래서 그 문구를 수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수정해놓고 보니 성도들의 교제를 믿는다는 이상한 내용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신경을 사도들이 만든 표준 신앙고백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역사적인 신앙고백의 하나로 이해하고 참고하는 선에서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그래서 본디오 빌라도에 대한 사도신경의 언급도 이 의미를 너무 크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 번역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정확히 번역하면 ‘본디오 빌라도 아래에서 고난을 받으사’입니다. 즉 그의 치하에서 십자가 고난을 받았다는 역사적인 내용을 말하는 것이지, 예수님의 죽음의 책임이 직접적으로 본디오 빌라도에게 있다는 내용은 아닙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을 읽어보면, 빌라도는 자신의 사전 정보와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고발과 예수님에 대한 심문을 통해 예수님에게 죄가 없음을 나름의 판단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빌라도가 정치적인 인물이고 잔인한 인물이고 하나님을 모르는 인물이긴 하지만, 예수님의 재판에 있어서 판단 자체를 잘못한 것은 아닙니다.
빌라도는 예수가 누구이며 왜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그를 죽이려고 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부르죠. 17절에 빌라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라 하는 예수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네, 사실 바라바의 이름도 예수입니다. 그런데 이 이름이 예수님의 이름과 혼동이 되기 때문에, 후대 사본으로 가면서 바라바 예수를 그냥 바라바라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빌라도는 예수가 왕이라는 말이 일반적인 왕이라는 말이 아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반역죄가 아니며, 십자가형을 선고할 이유도 없습니다.

무엇보다 빌라도는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왜 그를 죽이려고 하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18절을 보면 “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더라”
여기서 ‘시기’라는 말이 좀 이상하죠? 네, 당시 의미는 오늘날의 의미와 달랐습니다. 이것은 그 사람을 미워하고 적대시한다는 사회정치적인 의미입니다. 그래서 그런 뜻을 살려서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이는 그가 그들의 미움과 적대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더라”
따라서 빌라도는 재판 과정에서 예수님의 죄를 찾지 못하고 여러 차례 죄가 없다는 발언을 합니다. 그렇지만 빌라도는 대제사장과 장로들과 군중들의 강경한 요구를 무시할 수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빌라도는 군인이자 정치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처음엔 재판을 회피하였고 나중엔 타협하려고 시도하였습니다. 처음엔 예수의 출신지가 갈릴리임을 알고, 마침 예루살렘에 와 있던 헤롯에게 보내죠. 그러나 헤롯도 이런 일을 떠안을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희롱하기만 하고 돌려보내죠.
그래서 빌라도는 이후 재판을 타협하려고 시도합니다. 바라바냐 예수냐 사면을 제안하기도 하고, 때려서 놓겠다고 제안하기도 하고... 나름 이 불길한 재판을 피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런 말이 없고 군중들은 소란을 일으키고... 그러는 가운데 결정적으로 군중 속에서 이런 외침이 터져나왔습니다.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네, 이것은 아무리 총독 빌라도라도 무시할 수 없는 말이죠. 그래서 결국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허락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에 있어서 빌라도에게 어떤 책임이 있는지 바르게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의 잘못은 그가 정치적인 최종 판결을 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악한 것이고 잘못된 것이죠.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고 정치인이고 정치적인 인물이기 때문에, 그렇게 판결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있어서 최종적인 책임이 빌라도에게 있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그는 그런 사람이기에 그런 판결을 내렸다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어떤 문제를 생각해야 할까요? 네, 바로 빌라도의 정치적인 행위입니다. 그것은 옳고 그름을 생각하지 않는 불의한 타협적인 행위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현실을 보면 이런 빌라도 같은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옳고 그름을 넘어 항상 정치적인 판단과 선택을 합니다. 옳고 그름을 보려는 마음도 없고 의지도 없습니다. 모든 것을 자신에게 유리한 대로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여러분, 한 사람이 그런 생활을 계속하면 어떻게 될까요? 옳고 그름에서 멀어지겠죠. 계속 멀어지겠죠. 그러면 그 사람의 영혼은 옳고 그름이 아무 의미가 없는 자리로 멀리 가게 될 것입니다. 옳고 그름이 의미가 없고 사실과 진실이 의미가 없는 자리... 그곳은 어디일까요? 네, 그곳은 하나님이 없는 곳입니다.
지난 주 우리는 가룟 유다를 보면서 너무 멀리 가지 말아야 한다는 진리를 배웠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너무 멀리 가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옳고 그름이 살아있고 사실과 진실이 살아있는 곳에 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거기가 하나님이 계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주 내내 윤석열 대통령의 바이든 발언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저도 윤 대통령이 바이든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들었습니다. 물론 그 말이 바이든인지 잘 모르겠다는 분도 계시죠. 잘 들리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러나 바이든이라고 들었지만, 정치적인 판단으로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은 안 되는 일입니다.
이 마지막 때에 정치인이든 일반인이든 사실을 부인하고 매사에 정치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그것은 종말의 뚜렷한 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깨어 있는다는 것은 세상이 그럴 때에 그렇지 않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제자의 언어생활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그러므로 여러분, 빌라도와 같은 정치적인 모습이 되면 안 됩니다. 그런 사람이 되어 너무 멀리 가면, 회개할 수 없고 돌아올 수 없습니다. 우리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분명하고 옳고 그름이 분명하고, 그리고 그 위에 사랑과 이해와 용서를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쪼록 빌라도의 정치적인 모습을 본받지 마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가 살펴볼 두 번째 사람은 예루살렘 군중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처음에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열렬히 환영한 군중과 좀 다른 군중입니다. 그때 거기엔 갈릴리 사람들이 많이 있었죠. 그런데 이 사람들은 성전당국에 적극 동조하는 예루살렘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사주를 받고 적극적으로 빌라도를 압박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음의 책임에 있어서 이 사람들의 죄가 빌라도의 죄보다 더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빌라도에게 소리치고, 그를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다’라고 결정적으로 빌라도를 압박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사람들을 보면서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할까요?
네, 여러분과 저는 사람들 속에 있을 때 이 사람들과 똑같은 군중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도 살아가는 동안 이런 순간이 올지 모릅니다. 누군가 그때의 대제사장과 장로들처럼 우리를 선동하여 잘못된 것을 하라고 할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한 사람의 군중이지만 선동을 당하는 군중이 되면 안 됩니다. 악한 자들은 항상 사람을 속이고 선동합니다. 사탄은 그런 짓을 에덴동산에서부터 시작했고, 악한 권력자들과 위정자들도 사탄을 따라 항상 그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누군가의 잘못된 사주를 받고 선동되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시지, 우리를 세뇌하고 선동하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 삶에서 일반적으로 선동이 자주 일어나는 분야는 정치와 선거입니다. 선거 때마다 정치인들은 표를 얻기 위해 많은 선거운동을 하는데, 그런 정당한 선거운동 뒤에 많은 사실과 다른 선동이 있습니다. 선거 때마다 그런 선동이 갈수록 난무합니다. 이전 선거에서 한 사람이 문재인 대통령 후보자를 향해 공산주의자라고 말한 일이 있었습니다. 법원의 판결도 난 내용이지만, 그것이 선동입니다. 그 이전에는 미국산 수입 쇠고기 관련 광우병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광우병에 대한 공포로 그 사태가 일어났지만, 그러나 그것도 사실과 다른 선동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이 지지하는 정치인과 정당을 무분별하게 지지하지 마시고, 잘 분별하시길 바랍니다. 잘 분별하기 위해서는 작은 것보다는 전체를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분별하는 한 사람이 될 때 휩쓸리거나 선동을 당하지 않게 됩니다. 오늘 말씀에 선동을 당한 예루살렘 군중들은 급기야 이런 말을 했습니다.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그대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AD 70년 로마군에 포위된 예루살렘에서 그들은 한 사람도 도망가지 못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여러분, 성경 말씀은 우리 믿는 자들에게 군중의 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깨어있는 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백성 단위로 말씀하시는 것은 구약시대입니다. 신약에 오면 하나님은 보다 더 믿는 자 한 사람 한 사람을 대상으로 권면하시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우리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또 “하나님께서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셨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무분별한 군중이 되지 마시고 깨어있는 한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교회 안에서뿐만 아니라 세상 속에서 그렇게 사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렇게 인도하고 계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이와 같은 권면을 드리는 이유는 지금 우리 교회 안에는 분별하는 한 사람의 신자보다 분별하지 못하는 군중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열심히 전도하고 교회를 세웠지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성숙한 신자들을 만들지 못하고 그저 교회 안에 하나님을 믿는 군중들을 만든 것이 아닌가... 그래서 선거라든지 사회 현안이라든지...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많이 우왕좌왕하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우리 성도님들은 오늘 말씀의 이 예루살렘 군중들을 반면교사 삼으심으로, 깨어있는 한 사람의 신자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빌라도 재판에 있어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가장 큰 책임은 바로 대제사장과 장로들에 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지만, 사실은 자신의 권력과 부와 지위를 위해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입니다. 이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문제인 근본적인 불신앙에 대해서는 여러분들이 각자 생각해 보시길 부탁드립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빌라도 재판은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결정했습니다. 우리는 이 불의한 재판을 보면서 여기에 관여한 빌라도와 군중들과 대제사장과 장로들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빌라도의 정치적인 행동을 기억하고, 군중들의 무분별한 선동을 기억하고,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근본적인 불신앙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 삶에서 진실을 따르는 힘과 동시에 진실을 분별할 수 있는 힘을 주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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