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신앙이란 무엇인가 ?

믿음찬교회 0 136 2022.09.18 11:56
신앙이란 무엇인가 ?
마 26:69~75
2022.09.18.

오늘 본문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3번 부인하는 내용입니다. 이 베드로의 일화를 놀랍게도 4복음서가 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베드로의 이 부끄러운 모습을 4복음서가 다 기록하고 있을까요?
우리가 생각하기에 지금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죠. 그런데 4복음서는 이상하게도 예수님의 재판과 십자가의 길 도중에 모두 다 이 베드로 일화를 빠뜨리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직접적인 이유 하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할 것을 예언하셨기 때문입니다. “네가 닭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네,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베드로는 이렇게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이 내용은 간단히 말하고 넘어가도 될 것 같은데... “한편, 뜰에 있던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니,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졌더라...” 그런데 굳이 이렇게 한 문단을 할애해서 자세히 말할 필요가 있을까 의아합니다.
왜 이렇게 4복음서는 베드로의 부인을 자세히 말하는 걸까요? 여기에 우리의 궁금증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것이 그렇게 중요한 일일까요?

네, 그런 것 같습니다. 베드로의 부인은 중요한 내용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진행에 있어 중요하다기보다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는 별개로,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따라가는 우리에게 중요하기 때문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베드로 사건은 우리에게 중요한 내용이 있습니다. 어떤 중요한 내용을 말씀하는가... 바로 베드로의 통곡과 눈물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바로 이와 같은 베드로의 눈물에 집중하도록 점진적으로 글을 씁니다.
베드로는 처음에 대제사장의 집 바깥 뜰에서 예수님을 가볍게 부인합니다.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노라”
두 번째는 앞문으로 이동해서 거기서 맹세하며 강하게 부인합니다.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세 번째는 예수님을 저주로 맹세하며 부인하고는, 마침내 밖으로 나갑니다.
밖으로 나온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심히 통곡하게 됩니다.
이렇게 오늘 본문은 베드로를 점진적으로 보여주면서, 마침내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완전히 무너지고 통곡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이 보여주는 베드로의 통곡과 눈물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할까요?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은 여기엔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의 의미가 담겨있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의 통곡과 눈물은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신앙이란 무엇인가?... 사전을 찾아보면 이렇게 설명합니다. 믿음의 대상을 굳게 믿고 가르침을 지키고 그것을 따르는 일... 믿을 신, 우러러볼 앙... 믿고 우러러보며 따르는 것... 네, 이것이 일반적인 신앙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전적인 의미를 넘어서, 우리는 신앙을 이해하는 어떤 정서와 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앙을 이해하는 데에는 사전적 설명보다 이와 같은 정서와 관념이 더 중요합니다.
그러면 우리 민족은 전통적으로 신앙을 어떤 정서와 관념으로 이해했을까요?
네, 우리 민족은 신앙을 비는 것과 지성을 드리는 것으로 많이 이해했습니다. 신은 잘 모르지만, 그 신이 무엇이든 우리는 거기에 빌고 간절히 지성을 드렸습니다. 천지신명께도 빌고, 신령님께도 빌고, 조상님께도 빌고, 마을 어귀 큰 나무에도 빌고, 바닷가에서 용왕님께도 빌고... 그것이 우리의 전통적인 신앙이었습니다. 우리 민족은 신앙을 그렇게 신을 향해 빌고 기원하고 염원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우리 민족의 이와 같은 정서적이고 관념적인 신앙 이해 그리고 여기에 덧붙여진 미신적인 신앙 이해... 이런 것들이 지금 우리의 기독교 신앙 안에 일정 부분 들어와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에 영향을 끼치는 또 다른 중요한 것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입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앙을 어떻게 이해했는가?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의 중심은 2가지였습니다. 율법과 성전이죠. 그런데 이 율법과 성전은 서로 다른 신앙의 방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전은 눈에 보이는 제사와 예배와 형식을 중요시하는 방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면에 율법은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우리 마음과 생각에 새기고 따르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신앙의 방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율법과 성전은 이렇게 하나는 보이는 것을 다른 하나는 보이지 않는 것을 지향하며, 신앙의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눈에 보이는 성전 신앙이 중요해졌습니다. 반면에 눈에 보이지 않는, 율법을 준수하는 신앙과 삶은 약해지고 율법 신앙도 보이는 신앙으로 바뀌어졌습니다. 율법을 눈에 보이게 지키는 형식적인 율법 신앙이 커지고, 율법을 마음 중심으로 지키고 따르는 보이지 않는 율법 신앙은 작아졌습니다. 
그래서 한 마디로 구약 신앙은 성전이라든지 제사라든지 눈에 보이는 율법 준수라든지... 이렇게 눈에 보이는 신앙을 중요하게 여기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약 신앙을 벗어나지 못하면 신앙을 보는 것으로 이해하는 옛 신앙에 머물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마음 중심과 선하고 의로운 삶과 우리의 성숙과 변화보다, 눈에 보이는 예배와 예배 장소와 신앙의 결과와 기도 응답과 물질 축복과 성장 등을 중요시 여기게 됩니다. 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보다, 보이는 천국을 좋아하는 신앙이 됩니다.
이 모든 것들은 신앙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잘못된 정서와 관념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단지 비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단지 예배를 잘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눈에 보이는 좋은 결과를 얻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그 이상입니다. 신앙이 그 이상이라는 것을 오늘 베드로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눈물을 흘리고 심히 통곡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왜 갑자기 울게 되었을까요? 네, 그것은 자신이 사랑하는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배반한 것을 불현듯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상황에 몰려서 정신없이 주님을 모른다고 하고 밖으로 도망쳤는데, 불현듯 그것이 얼마나 주님을 배반한 일인지, 얼마나 주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일인지 깨달았던 것입니다.
비는 것이 신앙이고, 예배 잘 드리는 것이 신앙이고, 믿어서 좋은 것 얻는 것이 신앙이라면, 이렇게 울 일이 없습니다.
못 받으면 그만이죠. 안 주시면 할 수 없죠. 울 일은 없습니다.
예배드리면 기쁘죠. 찬송하면 은혜가 되죠. 울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 신앙은 빌고 엎드리고 어떤 장소에서 예배를 잘 드리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처럼 주님을 따르는 일입니다. 빌고 절하고 기도하고 예배하는 것이 주된 신앙생활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키고... 그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그런데 그 관계가 손상되고 문제가 생기고 주님을 부인하고 은혜를 저버리면, 그것이 마음에 걸리고 아프고 죄송하고 눈물이 나고 견딜 수 없고 또 견딜 수 없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예수님을 부인한 이 베드로의 눈물과 통곡을 통해 신앙이 무엇인지 새롭게 배우게 됩니다.
 
신앙이란 한마디로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는 그 말씀을 듣고, 우리도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하고 하나님은 복 주시고 응답하시고, 하나님은 우리를 믿고 우리도 하나님을 믿고... 우리 삶이 이렇게 하나님을 인격과 인격으로 만나고 관계를 맺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맺는 분은 신앙생활을 잘하는 분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맺지 못하고 단지 열심만 있는 분은 신앙생활을 잘 못하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는 우리 신앙의 본질로서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하시는 것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됩니다. 신학자들은 성경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하시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연구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도 여전히 죄를 짓고 의롭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의롭다 하십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연구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것은 그분과의 지속적인 관계에서 비롯되는 의라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아브라함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고향을 떠나 가나안 땅에 정착한 아브람에게 하늘의 별처럼 많은 후손을 약속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에 온 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 아브람은 자신을 이끌어 하늘의 별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아브라함을 의롭게 여기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의롭게 여기신 것은 그때 한 번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아들 이삭을 얻을 때 또 하나님을 굳게 믿었습니다. 로마서 4장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약속하신 그것을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네, 하나님은 그때 아브라함을 또 의롭게 여기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롭게 여기신 사건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사흘 길을 가서 이삭을 바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는 마지막 순간에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그래서 야고보서는 이 사건을 가리켜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이에 성경이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이렇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일찍히 의롭게 여기셨지만, 아브라함의 의는 이삭을 바칠 때 마침내 완성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한 번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하나님을 믿으며 계속해서 의롭다 여기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칭의는 한 번의 역사가 아닙니다. 대체로 우리는 칭의가 법정에서 재판장이 선언하는 그런 일회적인 것으로 많이 알고 있습니다. 이른바 법정적 칭의이죠. 한국교회는 칭의를 그렇게 많이 가르쳤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런 칭의가 쉽고 좋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칭의는 아브라함의 생애를 볼 때,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신실하고 의롭다 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이와 같은 칭의를 관계적 칭의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와 관계를 맺으시고 계속해서 우리를 의롭다 하시며 우리를 이끌어 가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고 그들에게 그 언약적 관계에 신실할 것을 늘 요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에 신실한 것이 이스라엘의 신앙이었고 동시에 오늘날 우리의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과의 관계를 잘 지켜나가는 일입니다.

저는 한 때 생각했던 주제 중 하나가 ‘왜 한국교회가 이렇게 되었나?’, ‘왜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지도자들이 이렇게 되었나?’ 였습니다. 저 같은 무명의 목사가 함부로 생각할 주제도 아니고 자격도 없지만, 그저 한 사람의 신자로 한 사람의 신학생으로 그 주제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저만의 것은 아니고, 고 옥한흠 목사님도 2007년 평양대부흥 100주년 기념대회에서 공개적으로 이 주제를 설교한 바 있습니다.
그분은 그때 폐암 수술을 받고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에서, 작정하고 한국기독교를 비판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거짓 믿음이라고 한국기독교의 자성을 촉구했습니다. 설교의 한 대목을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청중은 원래 귀에 듣기 좋은 말씀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하면 모두가 "아멘" 합니다. 믿음만 있으면 하늘의 복과 땅의 복을 받는다고 하면 "할렐루야" 하고 열광합니다. 그러나 행함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거짓 믿음이요 구원도 확신할 수 없다고 하면 얼굴이 금방 굳어져 버립니다.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죄를 지적하거나 책망하면 예배 분위기가 금방 싸늘해져버립니다. ... 그 결과 저도 모르는 사이에 복음을 조금씩 변질시켜가는 설교자가 되고 있었습니다. 교회가 커지면 커질수록 말씀대로 순종하는 행위에는 관심이 없고, 믿음만 가지고 떠드는 값싼 은혜에 안주하는 무리들이 늘어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옥한흠 목사는 그 설교 후 많은 비난을 받고 곤혹을 치렀습니다. 평양대부흥 100주년에 어울리지 않는 설교였다고 말이 많았습니다. 그분은 그 설교를 하고 3년 뒤 돌아가시게 됩니다.

잘못된 교회와 잘못된 지도자가 있다면, 그 교회는 처음부터 잘못되었을까요? 도중에 잘못되었을까요? 그 목사님은 처음부터 잘못되었을까요? 도중에 잘못되었을까요?
처음부터 잘못된 경우도 있고, 도중에 잘못된 경우도 있겠죠. 그것은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도중에 잘못되었습니다.
사울 왕도 처음엔 신실했는데 도중에 불순종의 길로 갔고, 가룟 유다도 처음엔 예수님께서 기도하시고 제자로 부르셨는데 어느 순간 돈 궤에 손을 대고 예수님을 배반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데마도 처음엔 사도바울의 신실한 동역자였는데, 마지막에 감옥에 갇힌 사도바울을 버리고 세상을 사랑하여 데살로니가로 떠났습니다.
그런 점에서 많은 교회와 목회자들도 하나님과 관계를 유지하는 도중에 잘못된 경우가 많습니다. 처음엔 순수하고 뜨겁고 신실했는데, 하나님을 따르는 도중에 교회가 성장하는 도중에 세월히 흐르고 역사가 흘러가는 도중에,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방향으로 간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교회와 목회자들이 도중에 잘못된다면, 일반 신자들도 동일할 것입니다. 처음에 하나님을 만나고 순수하게 믿고 자라다가, 어느 순간 세상이 들어오고 내가 살아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약해집니다. 
말씀이 약해지고 기도가 약해집니다. 신앙이 메마르고 신앙과 삶이 분리됩니다. 하나님을 잘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보다 돈을 더 바라봅니다. 하나님보다 내 이익이 더 중요합니다. 힘들면 하나님을 저버리고 손해가 되면 하나님을 저버립니다. 죄가 쉬워지고 세상과 더 가까워집니다. 하나님 믿는 것이 힘들고 교회도 겨우 나옵니다.
급기야 이런 생활이 굳어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거의 없는 사람이 됩니다. 지금 한국기독교는 이렇게 약해지고 많은 사람이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그 중요성을 안다면,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지켜나가는 우리의 구체적인 생활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기도하는 생활, 꾸준한 성경 읽기, 예배와 모임 참석, 하나님을 의지하는 습관, 회개하고 돌이키는 습관, 정직하고 깨끗한 생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는 생활... 우리는 이런 구체적인 생활 속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잃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베드로의 눈물과 통곡을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주님과의 관계가 깨진 것을 깨닫고 그렇게 아파하고 눈물 흘렸습니다.
우리도 어쩌다 불가피하게 주님을 부인하면 그렇게 눈물 흘리고 아파할 수 있을까요? 우리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면 그런 나 자신을 발견하고 통곡할 수 있을까요?
신앙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엎드리고 빌고 염원하고 받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고 신실한 관계를 맺는 것이 신앙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그런 관계를 늘 맺으면,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이 항상 있는 복된 사람이 됩니다. 나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지금 어떤가... 냉정한 평가를 내리시길 바랍니다.

아무쪼록 우리 들에핀믿음찬교회 성도님들은 모두 다 하나님과 신실한 관계 안에 거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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