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제자들의 최선과 실패

믿음찬교회 0 120 2022.09.04 12:10
제자들의 최선과 실패
마 26:44~56
2022.09.04.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안타깝게도 그런 예수님 곁에서 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자고 쉬라...”
이 말씀은 헬라어 문법상 3가지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이제는 자고 쉬라...” 명령문도 될 수 있고, “지금도 자고 쉬느냐?...” 의문문도 될 수 있고, “지금도 자고 쉬고 있구나...” 평서문도 될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말 번역은 명령문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예수님의 뉘앙스는 평서문이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너희가 지금도 자고 쉬고 있구나...” 네, 우리는 이 말씀이 우리를 향한 말씀이 되지 않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때가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이 예수님의 말씀이 끝나기 무섭게, 그들이 왔습니다. 큰 무리였는데, 가룟 유다가 그 무리 맨 앞에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께 다가와 입 맞추고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라고 말했습니다.
네, 유다는 지금 예수님을 ‘랍비’라고 부릅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주님’도 아니고 ‘선생님’도 아니고 그저 ‘랍비’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안녕하십니까?”라고 대담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헬라어 ‘카이레’인데, 실제로 한 말은 ‘샬롬’이었을 것입니다. 유다는 무리 뒤에서 떨리는 손으로 예수님을 지목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앞장서서 맨 앞에서 예수님을 팔고 있습니다.
여러분, 유다는 지금 자기가 하는 일을 모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배반하는 것이 어떤 일인지 깨닫지 못하고, 세상 권력을 등에 업고 자기 주도적으로 예수님을 배반하고 있습니다.
이 힘이 어디서 왔을까요? 유다는 지금 사탄과 세상 권력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사탄과 세상 힘에 사로잡히면, 죄를 짓는데 두려움이 없고 담대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내일 아침, 유다는 그것이 자기 힘이 아니라 세상의 힘이고 사단의 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이용당했고, 자신의 손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팔았다는 두려운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안타까운 가룟 유다를 보면서 교훈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진리와 진실은 바뀌지 않는 법입니다. 자신에게 힘이 있다고 승리자가 되고 예수님은 패배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힘이 있는 사람은 그런 착각을 하게 되죠. 그러나 지금 자신의 진짜 모습은 하나님의 아들을 배반하는 배반자이자 악에게 이용당하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힘의 환상에 속지 마시길 바랍니다. 아무리 힘이 있어도, 진실은 진실이고 거짓은 거짓입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잘한 것은 잘한 것이고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입니다. 사단이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로 하와를 속인 것처럼, 사단은 지금도 돈과 힘으로 우리를 속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는 그런 사단의 역사로 눈이 가리어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무쪼록 이 안타까운 가룟 유다를 보시고, 세상과 사단에 이용당하지 않고 속지 않으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샬롬, 랍비” 가룟 유다는 이렇게 부드럽게 인사하고 예수님께 입 맞춥니다. 예수님은 그런 유다에게 동일하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친구여, 네가 온 바를 위하여” 네가 온 목적을 위해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에 무리는 그분이 예수라는 것을 알고 예수님을 잡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 돌발 사건이 일어납니다. 바로 예수님의 곁에 있던 베드로가 갑자기 칼을 빼어, 한 대제사장의 수하를 친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그 사람의 이름을 ‘말고’라고 말합니다. 그 사람의 이름이 ‘말고’이고 대제사장의 종이라고 하니까, 그 이름의 어감도 그렇고 종이라는 신분도 그렇고, 우리 생각에 베드로가 그저 거기 가까이 있던 종 한 사람을 공격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이름을 원어로 발음하면 ‘말코스’ 혹은 ‘마르쿠스’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에게는 특이하게도 정관사가 붙어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대제사장의 한 종’이 아니라, ‘대제사장의 그 종’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이 사람은 그 무리 가운데 그저 한 종이 아니라 그 무리의 중요한 인물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그 무리의 중요한 인물을 향해 공격한 것입니다. 아울러 베드로가 그 사람의 귀를 잘랐죠.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에 따르면 그 사람의 오른쪽 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네, 이것은 베드로가 오른손으로 칼을 휘둘러 그 사람의 머리를 공격하였는데, 아마도 그는 왼쪽으로 피하면서 오른쪽 귀를 베인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네, 베드로는 지금 정말로 예수님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은 것입니다. 그저 예수님을 지키기 위해 그들을 위협만 한 것이 아니라, 그 무리의 중요한 인물을 베고 끝까지 싸우려고 한 것이죠. 베드로는 조금 전에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베드로는 지금 그 말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베드로를 쉽게 생각하거나 무시하면 안 됩니다. 무식한 어부 출신에 실수하고 엉뚱한 질문을 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로막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졸고... 베드로를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부족한 베드로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되어 사도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는 사실 처음에 예수님을 만나 그분을 따라나설 때부터 그 시대 속에 깨어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형제 안드레가 세례요한의 제자였고 세례요한의 개혁적인 메시지에 빠져 그분을 따라다녔죠. 그런데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가리켜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말하자, 안드레는 그때부터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안드레는 예수님을 먼저 만난 후 베드로에게 와서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라고 소개합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베드로는 그 즉시 안드레와 함께 예수님을 만나러 갔습니다.
베드로나 안드레나 단순한 어부였다면, 세례요한을 따라다니고 예수님에게 관심을 갖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즉시 길을 나서고... 그렇게 했을까요?
예수님을 만난 시몬은 그때 게바, 즉 베드로라는 이름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후 어느 날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찾아오시죠. 예수님은 열심히 고기를 잡고 있던 베드로와 안드레에게 거부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십니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예수님은 어느 날 바닷가를 둘러보시다가 즉흥적으로 베드로와 안드레를 선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와 안드레도 단순한 어부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홀로 역사하실 때도 있지만, 사람을 보고 사람을 통해 역사하실 때가 더 많습니다. 바울도 그런 준비된 사람이었기에 하나님께서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베드로를 낮추어 보지 않아야 합니다. 지금 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베드로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예수님을 지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무리들은 조용히 예수를 체포하려고 했는데, 중요 인물인 말코스가 공격을 받고 그의  귀가 잘리고 피가 쏟아졌습니다. 이 사태가 이제 어떻게 되겠습니까? 네, 그들은 칼과 몽치를 가지고 있었고, 무자비한 진압이 시작될 찰라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예수님께서 개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마음을 아셨지만, 베드로를 책망하셨습니다. “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지금 열두 군단도 더 되는 천사를 아버지께 구하여 보내게 할 수 없는 줄 아느냐?...” 그리고 이때 누가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 말코스의 귀를 기적적으로 다시 고쳐주시는 일을 행하셨습니다.
네, 그래서 그 위험했던 상황이 놀랍게 진정되었습니다. 이후 예수님은 그들의 체포에 순순히 응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함이니라”,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면서 체포를 받아들이셨기 때문에, 이제 제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눈물을 머금고 도망치게 됩니다.
네, 이상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와 같은 오늘 말씀에서 어떤 교훈을 받을 수 있을까요?
먼저 우리는 베드로와 제자들이 자신들의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을 발견해야 합니다.
비록 제자들은 겟세마네에서 잠이 들었지만, 그들은 3년의 기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이제 정말로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분의 신성을 발견했고,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것을 믿었고, 그분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체포되실 위기에 처하자, 자기 목숨을 걸고 저항했습니다. 베드로는 그 일에 가장 앞장섰고, 아마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제자들을 혹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3년이나 따라다녔지만, 겟세마네 동산에서 졸고 자다가, 무리들이 들이닥치자 베드로가 잠시 무의미한 저항을 하고, 그리고 무책임하게 예수님을 버려두고 자기들 살겠다고 도망간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진심이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적인 최선을 다했습니다. 가룟 유다를 제외한 열 한 제자는 그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을 사랑했고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 자신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거기 있었다면,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성전 당국을 거스른다는 것, 대제사장에게 맞선다는 것, 성전과 율법을 비판한다는 것, 자신을 메시아로 말한다는 것, 예루살렘에 대중 소요 사태가 일어난다는 것, 로마 총독은 이런 사태를 극히 경계하고 있다는 것... 네, 보통 큰 일이 아니죠.
아마 보통 사람은 예수님을 따라 예루살렘에 올라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고, 체포와 처형은 얼마든지 예상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말씀을 보면서 제자들을 폄하할 것이 아니라, ‘나는 그 자리까지 따라갈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걸 수 있을까?’ 질문해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오늘 말씀을 통해 지금 우리를 보면, 오늘날 우리 교회와 신자들은 쉬운 신앙에 빠져 있는 것 같습니다. 구원받는 것이 어렵습니까? 교회 나오는 것이 어렵습니까? 신앙생활 하는 것이 어렵습니까? 다 쉽습니다.
예수님을 그렇게 간절하게 믿지 않아도, 예수님을 그렇게 힘들게 따르지 않아도, 얼마든지 좋은 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는 항상 은혜를 강조하고, 우리의 최선보다는 처음부터 은혜를 말합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 교회와 신앙에는 인간적인 최선이 거의 사라졌습니다.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것이 없어졌습니다. 그렇게 간절히 주님을 따르지 않습니다. 이 말은 교회 생활을 포함해서 믿는 자로서 세상 속에서 그렇게 치열하게 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세상 속에서 분명한 삶을 살지 않습니다. 돈을 최고로 삼고 적당히 타협하고 적당히 거짓말하고 그렇게 세상 속에서 삽니다. 그리고 우리는 교회에 와서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말씀을 보면서, 나는 지금 예수님을 믿고 따름에 있어 인간적인 최선을 다하는가 질문해야 하겠습니다.
신앙생활의 시작도 은혜이고, 과정도 은혜이고, 마지막도 은혜이고, 그렇게 은혜만 알고 은혜만 말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도 아니고 건전한 철학도 아니고 건전한 종교도 아닙니다. 그것은 그저 복 받기를 바라는 우리의 마음과 미신종교와 삼류 종교에서 나온 것입니다. 돌아보면 오래전 우리나라에는 미신과 무속과 삼류 종교가 많았습니다. 나라가 망하고 일제강점기를 거칠 때 각종 무당과 미신과 사교가 많았습니다. 백도교, 백백교, 인천교...
그런데 이상하게도 기독교가 들어온 이후 그런 미신과 무속과 삼류 종교가 많이 사라졌습니다. 어디로 갔을까요?
슬프게도 그 많은 것들이 한편으론 기독교 안으로 들어오고, 한편으론 기독교 밖에서 기독교 이단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우리나라에 이단이 많죠. 네, 그것은 우리나라 안에 그런 어지러운 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밖에서 이단이 어지럽게 일어난 것은 그렇다 쳐도, 문제는 그런 잘못된 것들이 우리 신앙과 교회 안에 많이 들어왔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 한국기독교는 소원성취의 종교라는 색깔을 많이 가지게 되었습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지만 성경의 기도가 아니고, 축복을 바라지만 성경의 축복이 아니고, 구원을 원하지만 성경의 구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그저 이 세상 나라에서 승리하고 잘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비성경적이고 비기독교적인 것들이 우리 안에 남아있지 않도록 늘 우리 신앙을 새롭게 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연약함을 돕지만, 인간의 최선을 배제하지 않고,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변화를 목적으로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우리가 새롭게 되기를 원하고 기다리시죠.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만 받고, 찬양하고, 그러면서 우리의 최선을 인간의 공로라고 나쁘게 폄하하고 배제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누구보다 많이 말한 분이지만, 그러나 자신의 삶과 사역에서 누구보다 최선의 삶을 살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수고마저 하나님의 은혜로 고백하는 분이지, 아무 수고 없이 하나님의 은혜만 말하는 분이 아닙니다.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어떻게 하나님을 믿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을 열심히 믿으시길 바랍니다. 믿는 자로서 최선의 삶과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아직 우리가 생각할 한 가지 말씀이 더 있습니다.
최선을 다하는 베드로를 향해 예수님은 그 마음은 받으셨지만 그 행동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여기서 예수님은 베드로가 생각하지 못한 새로운 말씀을 하십니다.
베드로는 최선을 다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최선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최선은 자기 아들이 온 세상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열두 군단도 더 되는 천사를 동원할 수 있지만, 초라하게 그들에게 끌려가는 것입니다. 아직 베드로와 제자들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과 삶에 최선을 다하지만, 그러나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마지막 길은 우리의 인간적 최선을 넘어서야 합니다. 우리의 인간적 최선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 마지막 길은 하나님의 방법과 하나님의 힘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여러분, 인디애나 존스라는 영화를 아시죠? 1989년 그 영화의 세 번째 시리즈는 예수님의 잃어버린 성배를 찾는 내용입니다. 그 영화의 마지막 부분이 인상적인데, 배경은 에돔의 페트라 사원입니다. 거기서 주인공은 성배를 찾기 위해 3가지 관문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첫 번째 관문은 회개하는 자만이 통과할 수 있고, 두 번째 관문은 하나님의 이름을 따르는 자만이 통과할 수 있죠. 주인공은 어렵게 마지막 세 번째 관문에 도착합니다. 그런데 이 세 번째는 이쪽 절벽에서 저쪽 절벽으로 허공을 건너는 시험이었습니다. 주인공에게 주어진 말씀은 이러했습니다. “하나님의 길... 사자의 머리에서 뛰어내릴 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리라” 네, 이 세 번째 관문은 믿음을 시험하는 관문이었습니다. 주인공은 결국 허공에 한 발을 내디디죠. 그 순간 그는 거기에 보이지 않던 다리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네, 우리가 하나님께로 가는 마지막 길은 우리의 힘과 방법으로 가지 못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방법과 힘으로... 그래서 그 지점은 하늘의 차원의 땅의 차원이 나뉘는 지점입니다.
베드로는 아마도 나중에 이 겟세마네 사건을 되돌아보면서, 그런 영적인 가르침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하지만, 마지막은 오직 하나님의 방법과 힘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교훈을 얻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나중에 그런 귀한 사도가 됩니다. 주님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신실한 사도가 되고, 동시에 자신의 최선의 마지막은 언제나 하나님이 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만 바라는 사람이 되어선 안 됩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주님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최선의 마지막은 하나님의 방법과 힘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신앙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만 바라보는 신앙입니까? 인간적인 최선을 다하고 거기에 머무르는 신앙입니까? 아니면, 최선을 다하지만 언제나 마지막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온전한 신앙입니까?
아무쪼록 사랑하는 예수님을 홀로 두고 도망가는 베드로와 제자들을 통해, 사람의 최선을 다하지만 그런 가운데 그것을 넘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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