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최후의 만찬, 주의 만찬, 우리의 성찬

믿음찬교회 0 327 2022.08.16 14:34
최후의 만찬, 주의 만찬, 우리의 성찬
마 26:26~30
2022.08.14.

이탈리아 밀라노에 가면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라는 수도원과 성당이 있습니다. 요즘엔 직접 가보지 않아도 많은 분이 좋은 영상과 사진을 올려놓아서 참 좋습니다. 물론 가보면 제일 좋지만, 그래도 영상과 사진만 보아도 가본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그 성당 왼쪽에 노란 수도원 식당 건물이 붙어 있는데, 여기에 그 유명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 최후의 만찬이 있습니다. 가로 약 9미터 세로 약 4.6미터 정도 되는 이 벽화는 수많은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 그림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예수님께서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말씀하신 직후의 모습을 모티브로 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중앙에 3개의 창문을 배경으로 예수님이 조금 크게 그려져 있고, 동요하는 제자들이 3명씩 4개의 그룹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생생한 인물과 동작, 뛰어난 색과 조화, 치밀한 구도와 원근법, 풍부한 상징성과 주제 등 대작으로서의 모든 면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 예수님을 제외하고 가장 중요한 인물은 예수님 왼편에 있는 3명의 제자입니다. 예수님 왼편에 맨 먼저 요한이 있죠. 여성스럽게 그려진 요한은 한때 소설 ‘다빈치코드’가 이 요한을 막달라 마리아라고 음모론을 펼치기도 했었죠. 요한은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는데, 요한 옆에는 그런 요한에게 질문하는 사나운 얼굴의 베드로가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 옆에는 문제적 인물인 가룟 유다가 그려져 있는데, 검은 얼굴의 가룟 유다는 오른손으로 돈주머니를 쥐고 왼손으로 빵을 집으려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았는데, 많은 전문가와 평론가들이 이 작품에 대해 다양한 해설과 뒷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미와 이야기를 잘 알지만, 의외로 성경이 말씀하는 주의 만찬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 제가 방금 다빈치의 작품은 ‘최후의 만찬’이라고 하고, 성경이 말씀하는 만찬은 ‘주의 만찬’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다르게 말한 이유는 성경은 이 만찬을 ‘최후의 만찬’ 혹은 ‘마지막 만찬’이라고 결코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최후다, 마지막이다, 작별이다...” 이런 의미가 성경에는 없습니다.
그저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에 이 식사가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 제자들과의 마지막 식사이니까 ‘최후의 만찬’이다, ‘마지막 만찬’이다... 이렇게 말하지만, 그러나 마가복음이건 마태복음이건 누가복음이건 요한복음이건... 복음서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이 식사의 의미는 ‘마지막’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인 ‘새로운 시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 유월절 식사는 내용과 형식에서 기존 전통적인 유월절 식사와 많이 달랐습니다.
미쉬나에 따르면, 전통적인 유월절 식사는 대개 다음과 같은 순서로 진행되었습니다.
1) 가장이 유월절과 포도주에 대해 축복을 선포하며 첫 번째 포도주(축복) 마십니다.
2) 유월절 음식을 차립니다.
3) 아이들이 유월절에 대해 질문하면 가장이 유월절의 유래를 말하고 찬양을 합니다.
4) 두 번째 포도주(구원)를 마십니다.
5) 누룩 없는 빵을 축복하고 쪼개어 나누어주고 채소 및 과일과 함께 먹습니다.
6) 구운 양고기로 본 식사를 합니다.
7) 식사가 끝나면 세 번째 포도주(축복)를 마시고 찬양을 합니다.
8) 마지막으로 네 번째 포도주(소망)를 마시고 모든 순서를 마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께서 이와 같은 전통적인 유월절 식사 순서를 따르시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런데 몇 가지 점에서 확연히 다른 모습이 있습니다. 특히 음식이 많이 다릅니다.
첫째, 양고기가 없습니다. 대개 유월절 식사 메인 요리는 양고기이죠. 그런데 이 자리에 양고기가 없고, 그저 빵이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빵을 자신의 몸이라고 말씀하시며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둘째, 피를 마시는 순서가 들어갑니다.
물론 이것은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죠. 그런데 상징이든 뭐든 기존 율법엔 피를 마시는 것이 금지되어 있고, 그래서 유대인들은 피를 마신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이것은 내 피라고 하시면서 포도주를 마시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유월절 음식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의 몸으로 양을 대신하고, 예수님의 피로 포도주를 대신하고...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네, 이것은 이 식사가 기존 유월절을 기념하는 식사가 아니라, 새로운 유월절을 기념하는 식사라는 것입니다. 기존 유월절은 출애굽을 상징하고 어린 양의 살과 피가 있었는데, 이제 새로운 유월절은 새로운 영적 출애굽을 상징하고 예수님의 살과 피가 있습니다. 
이 새로운 유월절은 이제 내일 십자가를 통해 시작되죠. 그러므로 이 예수님의 만찬은 새로운 유월절의 새로운 시작을 상징하는 만찬입니다.
새로운 유월절, 새로운 영적 출애굽,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 새로운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역사의 새로운 시작, ... 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만찬의 성경적인 의미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때 그 자리에 있었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빵과 포도주를 축사하시고 나누어 주실 때 그분의 눈에서 이와 같은 의미를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주님의 만찬을 더 이상 최후의 만찬, 혹은 마지막 만찬이라고 불러선 안 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주의 만찬이라고 부르고, 그 의미는 새로운 시작이라고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새로운 유월절, 새로운 출애굽, 새로운 하나님의 공동체, 새로운 하나님의 공동체의 시작...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꼭 이루시길 원하셨던 사역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의 마지막 일주일 동안 꼭 이루시길 원하셨던 3가지 일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문을 닫는 것입니다. 성전의 문을 닫고 율법의 문을 닫고 옛 시대의 문을 닫고...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시한이 다 되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문을 여는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비판하고 무너뜨리는 것은 쉽죠. 그런데 그렇게 한 후에 새로운 것을 세우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새로운 것을 세우신 분이십니다. 새로운 성전의 문을 열고 새로운 율법의 문을 열고 새로운 시대의 문을 열고 새로운 하나님의 공동체의 문을 여셨습니다. 셋째는 이 두 가지 일을 자신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완성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만찬은 이 3가지 사역의 하나로 매우 중요한 예수님의 사역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이렇게 중요한 의미를 가진 주의 만찬을 정기적으로 행하고 있습니다. 모든 교회는 성찬식을 행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의식을 행할 때, 이와 같은 주의 만찬의 본질적인 의미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대개 우리는 성찬식을 행할 때, 예수님께서 내 죄를 위해 돌아가신 것만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떡을 먹으며 이것은 나를 위해 돌아가신 주님의 몸이고, 포도주를 마시며 이것은 나를 위해 흘린 주님의 피다... 그렇게 묵상합니다.
그러나 성찬의 의미는 그것만이 아닙니다. 성찬의 의미는 과거, 현재, 미래가 다 들어 있습니다.
첫째, 우리의 성찬식에는 과거의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떡과 포도주를 먹으며, 예수님께서 바로 나 자신을 위해 돌아가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찬식을 행합니다.
둘째, 우리의 성찬식에는 현재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 현재의 의미는 제가 앞에서 길게 설명한 바로 그 내용입니다. 새로운 유월절, 새로운 출애굽,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 새로운 공동체의 시작... 우리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살과 피로 이와 같은 새로운 일을 시작하셨음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찬식을 하면서 나 자신과 우리 공동체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님이 원하셨던 그 모습대로 존재하고 있는가? 그 모습을 지켜가고 있는가? ...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그때에 유대인들은 율법 신앙과 성전 신앙에 매여 있었습니다. 모세가 전해 준 율법... 다윗과 솔로몬이 세운 성전... 그것은 처음에 너무도 좋은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랜 세월이 지나고 이스라엘이 부패하면서 율법은 인간의 율법이 되었고, 성전도 인간의 성전이 되었습니다.
율법과 성전의 목적은 율법과 성전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인데, 오히려 율법과 성전이 그 자체로 하나님을 대신하고 하나님을 가리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율법과 성전을 개혁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예수님의 뜻을 잘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이제 율법은 말씀이 되고, 성전은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말씀은 하나님을 만나는 말씀이 되고 있는가? 우리의 교회는 하나님을 만나는 교회가 되고 있는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강조만 할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통해 나의 악이 치유되고 나의 교만이 치유되고 나의 초라함과 부끄러움이 발견되어야 합니다. 말씀이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데려가서 우리가 그분을 만나고 감화되고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말씀이 그저 이 세상 살아가는 나의 만족과 유익과 수단이 된다면, 그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인간의 말입니다.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데려다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안에 말씀이라고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인간의 말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 믿어서 잘 되고 세상 복 받고 성공하는 말씀... 그런 말씀이 우리 교회 안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우리가 그런 말씀에 매여 있다면 율법에 매여 있던 유대인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신성시하고 경외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죠. 마찬가지로 우리도 지금 말씀을 강조하고 거룩하게 여겨도, 그 말씀이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곳이 하나님을 만나는 영적인 장소가 되지 못하면, 아무리 예수님의 피로 세운 교회라 해도 이곳은 그저 인간의 장소일 뿐입니다. 예수님 당시 성전이 그랬습니다. 유월절을 맞아 수 천마리의 양을 성전에서 잡고 그렇게 성대하게 유월절을 준비했지만, 그것은 그저 인간의 행사였고 인간의 장소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성전을 나오셔서 지금 이름 없는 한 집에서 새로운 하나님의 공동체를 시작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교회는 그런 옛 성전의 전철을 밟아선 안 됩니다. 이곳이 그분이 세우신 진정한 교회가 될 수 있도록 믿고 배우고 만들어가야 합니다.
교회가 작다고 좀 커지면 거기에 무슨 인간적인 조직 같은 것이 생깁니다. 정치도 생기고 권력도 생기고... 그런 현상을 너무도 뚜렷이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교회의 연합체인 교단입니다. 거기에 가면 얼마나 많은 정치와 권력과 계급과 돈과 차별이 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뜻과 예수님의 뜻이 여러 가지 이유와 핑계로 얼마나 많이 왜곡되는지 모릅니다.
구약 제사장 가문이 제사장직을 대대로 세습했으니 교회도 목사직을 세습해야 한다고 버젓이 청원하고 안건을 냅니다. 그런 주장은 사실 예수님의 뜻을 떠나서 신약과 구약에 대한 성경 이해가 없는 무분별한 주장이지만,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이 모인 교단 총회에서 그런 주장이 올라옵니다.
한 때는 교단마다 신학교 사유화 문제가 계속 불거졌습니다. 법적인 틈을 이용해 교단 신학교를 사유화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목사들이 있었습니다. 교단 산하 신학교이지만 법적으로는 교단과 별개이므로, 본인이 이사장을 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학교를 운영합니다. 학교 이사진을 자기 사람으로 채우고 교수진을 자기 인맥으로 뽑고 신학교 재정을 낭비하고 교단과 법적으로 다투고... 네, 이런 모습은 예수님이 그날 새롭게 시작하신 교회의 모습이 전혀 아니죠. 예수님의 살과 피로 세우신 그분의 교회가 아니고, 그분의 제자도 아닙니다. 
개별 교회 안에서도 많은 잘못된 모습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뜻은 온데간데없고 서로 다투고 상처 받고 사람이 교회 주인 노릇 하고 교회를 기업체처럼 운영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말씀이 선포되고... 네, 그것은 예수님이 세우시고자 하신 교회가 아닙니다.
우리는 작은 실수나 흠이 있는 교회는 될지언정, 근본적으로 잘못된 교회가 되어선 안 됩니다. 교회는 크든 작든, 길잃은 영혼 누구나 올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편히 있을 수 있는 영적인 보금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때 예수님이 크고 화려한 성전을 나오셔서 몇 명의 제자들과 둘러앉아 말씀과 빵과 포도주를 나누시던 그 소박한 교회의 원형을 잊어선 안 됩니다. 우리 교회도 그런 진정한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기를 원하시죠? 네, 그러면 여러분들이 하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구약의 백성이 되지 마시고 신약의 제자가 되셔야 합니다. 율법과 성전에 매여있는 구약 백성의 모습으로는 예수님의 새로운 교회의 일원이 될 수 없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장이 제사 드릴 때 수동적으로 그저 뒤에 서 있기만 했습니다. 모든 것을 제사장이 다 하고 레위인이 다 했습니다. 백성들은 그저 제물을 가져와서 바치고 뒤에 서 있기만 했죠.
그런데 예수님은 이제 새롭게 시작하는 자신의 공동체에서 자신의 제자들이 더 이상 그런 구약 백성이 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제사장을 통해 수동적으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이 아니라, 마리아처럼 예수님 앞에서 말씀을 듣고 이해하고 그래서 하나님께 스스로 나아오고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제가 그런 의미에서 설교 때 성경을 많이 말씀드립니다. 은혜 위주보다는 이해 위주의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좀 딱딱하고 재미가 없죠.
지난 주일에 저는 부탁을 받아 처제가 출석하는 교회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무슨 설교를 했냐 하면 마태복음 1장 ‘예수님의 계보의 여인들’이라는 설교를 했습니다. 왜 마태가 그 여인들을 특별히 예수님의 계보에 올려놓고 있는지, 그리고 그 여인들과 마리아의 관계는 무엇인지... 그런 설교를 하려다 보니 다말과 라합과 룻과 밧세바에 대해 성경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가는 교회에 가서 그런 설교를 하니 참 힘든 설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비록 설교는 은혜가 안 되었지만, 내용은 남지 않겠나... 그렇게 저 스스로 위안을 했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지금 나누는 이유는 아무쪼록 여러분들은 성경과 하나님의 뜻을 잘 아는 신약의 성도가 되시라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성숙한 자발적인 성도가 되고, 예수님이 세운 진정한 새로운 교회가 되고... 이런 모습을 잘 지켜나가는 것이 바로 우리의 성찬식의 현재적 의미입니다. ‘새로운 성도가 되겠다, 새로운 교회가 되겠다...’ 이런 마음 없이 성찬 의식만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유월절을 유독 강조하며 열심히 지키는 이단이 있죠. 그러나 유월절 의식만 열심히 지킨다고 사람이 구원을 받거나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런 것은 아주 미신적이고 원시적인 신앙이죠. 취지를 이해하고 목적을 이해하고 그래서 우리가 의식을 행하면서 그 뜻을 새길 때 비로소 우리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주의 만찬과 우리 성찬의 현재적 의미를 잘 지키시는 여러분과 제가 되길 원합니다.

세 번째, 우리의 성찬식에는 미래의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만찬을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네, 우리 믿음은 궁극적으로 미래를 바라봅니다. 우리가 성찬식을 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미래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날에 하나님의 나라에서 주님과 가질 만찬을 기대합니다. 요한계시록의 언어로 말하면 그것은 어린 양의 혼인 잔치입니다.
우리는 다 그분의 신부들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지키고 세상을 이기고 그분을 끝까지 따르는 신부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 하나님이 없는 이 세상 속에 그것은 참 어려운 일이죠. 그러나 우리는 성찬식을 하며 그날을 바라봅니다. 여러분들이 먹는 떡과 포도주를 그날에 우리 주님과 함께 다시 먹게 될 것입니다. 그런 큰 은혜와 영광이 우리 모두에게 이루어지길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먹은 그날의 만찬은 얼핏 보기엔 최후의 만찬이었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날의 주의 만찬은 새로운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찬식을 하면서 그 의미를 잘 지켜가야 하겠습니다.
우리를 위해 고난받으신 주님의 몸과 피를 생각하고, 새로운 공동체를 시작하신 주님의 뜻을 지키고, 주님과 다시 만날 그날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그런 귀한 교회로 늘 지켜주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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