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일곱 천사의 하나님의 심판 (2)

믿음찬교회 0 219 2022.07.12 19:34
일곱 천사의 하나님의 심판 (2)
계 14:12~20
2022.07.08.

심판의 말씀이 이어지는 가운데, 믿음을 지킨 성도들에 대한 말씀이 12~13절에 있습니다. 그들은 믿음의 수고를 그치고 영원한 안식에 들어갑니다.
여러분, 믿음의 수고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매일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면서 사는 모든 것이 믿음의 수고입니다. 현실 속에서 자녀들을 키우며 의롭고 정직하게 산 모든 것이 믿음의 수고입니다. 그런 믿음의 수고를 잘한 성도들은 이제 안식에 들어갑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상입니다.
한편 이와 같은 12~13절은 일곱 천사가 보여주는 하나님의 심판을 앞뒤로 나누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앞의 세 천사는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고 뒤의 네 천사는 하나님의 심판을 실행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12~13절은 하나님의 심판의 선포와 실행을 분리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14절부터 둘씩 짝을 이룬 네 천사가 나타납니다. 그 천사들은 처음에 땅의 곡식을 거두고, 다음에는 땅의 포도송이를 거둡니다.
여기서 우선, 땅의 곡식을 거두는 인자 같은 이를 누구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구름 위에 앉으셨고 금 면류관을 쓰고 인자 같은 이로 불리는 것을 감안할 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볼 수도 있고, 혹은 그분을 대리하는 천사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본문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천사가 땅의 곡식을 거두는 이것을 구원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심판으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땅의 곡식과 땅의 포도송이 추수를 각각 구원과 심판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모두 심판으로 볼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대개 우리는 곡식 추수를 구원의 말씀으로 보는데 익숙합니다.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는 것이죠. 그래서 이것을 구원으로 해석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요엘서 3:12~13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민족들은 일어나서 여호사밧 골짜기로 올라올지어다 내가 거기에 앉아서 사면의 민족들을 다 심판하리로다. 너희는 낫을 쓰라 곡식이 익었도다. 와서 밟을지어다 포도주 틀이 가득히 차고 포도주 독이 넘치니 그들의 악이 큼이로다.”
그래서 이와 같은 요엘서 말씀과 오늘 본문의 문맥과 또 예리한 낫이라는 표현을 고려하면 이 둘 모두를 심판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됩니다.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오늘 본문의 일관된 흐름은 일곱 천사가 보여주는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런 점에서 곡식 추수를 신자들의 구원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또 곡식 추수에 예리한 낫이 사용된다는 점에서도 그것을 신자들의 구원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땅의 곡식과 땅의 포도송이에 대한 이 추수는 모두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곡식과 포도송이가 익었다는 것은 심판의 시간과 목적이란 관점에서 익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져집니다. 하나님의 성 밖에 있는 그 틀에서 땅의 포도송이들은 짓밟히게 됩니다.
틀에서 흘러나온 피가 말굴레까지 닿고 천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말이 나오는 것은 이것이 전쟁과 관련되었다는 의미, 즉 사탄과의 영적 전쟁을 통한 최후의 심판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굴레까지 닿았다는 것은 말의 가슴 부근까지 피가 찼다는 것이고 그것이 천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다는 것은 4의 제곱수와 10의 제곱수로 표현된 전세계적인 범위를 의미합니다.
이상으로 우리는 오늘 본문의 내용을 대략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의미는 한 마디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것을 일곱 천사를 통해 말씀합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의 확실성과 철저함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대체로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간과하는 시대 속에 살고 있습니다. 믿는 신자나 믿지 않는 불신자나 하나님의 심판을 의식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시대는 무신론이죠. 무신론적 가치관은 하나님의 심판을 무시하고 거부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의 심판을 인정하지 않죠.
이와 같은 시대적 분위기는 오늘날 우리 믿는 자들에게도 영향을 줍니다.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의 심판을 자꾸 우리 신앙의 바깥으로 밀어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와 축복은 좋아하지만,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와 우리가 그분 앞에 서는 것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예수님의 복음의 본래 요소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구원과 심판이 하나로 결합된 말씀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한편으로 냉정한 것으로 신랑이 오면  그 문은 닫힌다고 말씀합니다. 그날에 세상 모든 사람들은 양과 염소로 구분되고, 충성된 종과 악한 종으로 구별되고, 악한 종은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복음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아름다운 자연과 평화로운 사람들과 밝은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새들은 지저귀고 햇빛은 아름답고 사람들은 웃고 세상은 평화로운데, 그런 이 세상과 사람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것은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일인 것 같습니다. 그것은 기독교의 시대착오적인 낡은 가르침 같습니다.
그러나 과연 세상이 아름답기만 할까요? 한 사람의 삶과 존재도 아름답기만 할까요? 세상의 이면을 들춰보면 온갖 죄와 피와 눈물과 한숨이 들어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일생도 아름다운 좋은 시절보다는 어두운 시간이 더 많습니다.
비록 역사는 발전하고 인류는 좀 더 나아지는 것 같지만, 그러나 보이지 않는 곳엔 악이 존재하고 죄가 자라고 인간의 욕심과 이기심은 더욱 짙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영적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은 불가피합니다. 세상의 겉모습만 보고 하나님의 심판을 부정하는 것은 우리의 무지이자 어리석음입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마지막 날, 나의 일생을 판단하시고 세상을 판단하시고 역사를 판단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모든 죄와 불의와 어그러진 것을 바로 잡으시고 의로운 자들의 눈물을 닦아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없다면 인간과 역사와 우주는 무의미로 떨어집니다. 절대자의 최후 심판이 없다면, 아무렇게나 살다가 아무렇게나 죽어도 됩니다. 의미를 찾으며 살 필요도 없고, 선하고 의롭게 살아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심판을 굳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주고 선포할 뿐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존재를 굳이 설명하거나 증명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다만 그분의 말씀을 선포하며 그분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을 전할 뿐입니다. 그분을 믿고 안 믿고는 우리의 선택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 본문도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줄 뿐입니다. 그것을 믿고 안 믿고는 우리의 선택입니다.
그날에 우리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인생은 결국 두 갈래의 길입니다. 우리 앞에는 두 길이 있고, 제3의 길은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냐 아니냐 하는 두 갈래 길 중 하나를 걸어야 합니다.
하나님이냐 아니냐, 선이냐 악이냐, 정의냐 불의냐, 사랑이냐 이기심이냐, 의미냐 무의미냐 ... 우리는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선택한 그 길 끝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일곱 천사가 전하는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오늘날의 무신론적이고 불신앙적인 시각으로 읽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심판이 무섭고 두려운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은 오히려 소망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역사의 최후 종말에 마침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아름답게 마무리하신다는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그런 믿음과 소망으로 이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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