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성전을 떠나시는 예수님

믿음찬교회 0 13 05.17 19:12
성전을 떠나시는 예수님
마 23:35~24:2
2022.05.12.

35절 말씀은 성경 난제 중 하나로 조금 설명이 필요합니다. 간혹 이런 성경 난제를 가지고 성경을 공격하는 이단이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간단히 알아보고 지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의인의 죽음을 말씀하시면서 아벨부터 사가랴까지 라고 하셨는데, 과연 사가랴가 죽임을 당한 구약의 마지막 의인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성전과 제단 사이 즉 성전 뜰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 혹은 스가랴는 BC 9세기 요아스 왕 때의 인물입니다. 그때가 BC 9세기라면, 사가랴가 죽임을 당한 구약의 마지막 의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아벨부터 사가랴까지 라고 말씀하신 것은 시간적인 기준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기준으로 아벨부터 사가랴까지 라고 말씀하셨을까요?
네, 그것은 히브리 구약 성경의 순서를 기준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히브리 구약 성경은 지금 우리 성경과 순서가 다릅니다. 히브리 구약 성경은 토라, 느비임, 케투빔 순서로 되어있습니다. 토라는 모세오경, 느비임은 예언서, 케투빔은 성문서입니다. 그래서 케투빔의 맨 마지막 성경이 역대기인데, 그 역대하 24장에 사가랴의 죽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창세기의 아벨부터 역대기의 사가랴까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둘째는 사가랴의 아버지가 이상하다는 문제입니다.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아버지는 역대하 24장을 보면, 제사장 여호야다로 나옵니다. 제사장 여호야다는 7살에 왕이 된 요아스를 아들처럼 키우고 그가 하나님 앞에 정직한 왕이 되도록 도운 훌륭한 제사장입니다. 그런데 여호야다가 죽은 후 요아스 왕은 하나님을 떠나 각종 우상을 섬기는 왕이 되었습니다. 이에 여호야다의 아들 사가랴는 하나님의 영에 감동되어 요아스 왕에게 경고하였는데, 요아스 왕은 그를 성전에서 죽이는 악행을 저지르게 됩니다.
그래서 사가랴의 아버지는 제사장 여호야다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사가랴의 아버지로 언급되는 바라갸는 누구인가... 네, 이 바라갸 혹은 베레갸는 스가랴서 말씀을 선포한 스가랴 선지자의 아버지입니다.
왜 이런 혼란이 있는가? 네, 구약 성경에는 사가랴 혹은 스가랴라는 이름이 약 30명 정도 되고,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도 여러모로 혼란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성경학자들은 사가랴의 아버지를 여호야다로 말하지 않고 바라갸로 말하는 것에 대해서, 이것을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했다기보다는 마태가 그렇게 기록했다고 봅니다. 그러면 마태가 이 내용을 잘못 알고 실수로 그렇게 기록한 것인가?
그런데 마태가 우리가 알 정도의 이런 초보적인 실수를 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많은 성경학자들은 이것을 마태의 의도적인 실수로 보고 있습니다. 즉 마태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여호야다의 아들 사가랴에 의도적으로 선지자 스가랴를 오버랩한 것입니다.
마태가 선지자 스가랴를 여기에서 실수인 척 오버랩하는 이유는 선지자 스가랴가 예수님에 대한 예언인 은 삼십을 예언하였고, 그래서 선지자 스가랴를 여기에 소환함으로 은 삼십에 무죄한 피를 흘리신 예수님을 암시하기 위해서인 것 같습니다.
따라서 마태의 이런 숨겨진 의도가 맞다면, 마태는 지금 예수님을 의로운 피를 흘린 마지막 인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벨부터 사가랴까지 말씀하셨지만, 마태는 아벨부터 예수님까지 말하면서 그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네, 이 문제는 이렇게 설명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간혹 성경에 이와 같은 난제를 만나더라도, 성경을 의심하거나 무조건 불신하는 사람들의 말에 시험 들지 마시고 잘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지난 주에 우리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말씀하신 일곱 번의 ‘화 있을진저’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잘못된 가르침과 신앙에 대해 매우 신랄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일곱 번의 ‘화 있을진저’ 말씀에 이어 오늘 본문에서 몇 가지 말씀을 더 하시고 그리고 최종적으로 성전을 떠나시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핵심은 ‘성전을 떠나시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성전으로 돌아오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24:1 말씀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이 말씀은 일견 평범한 말씀 같지만 사실은 중요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과 성전의 마지막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일곱 번의 ‘화 있을진저’ 후에 과연 어떤 말씀을 하시고 그렇게 성전을 떠나실까요? ... 오늘 우리는 이것을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이것을 살펴보아야 ‘성전을 떠나시는 예수님’이 잘 이해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크게 3가지 말씀을 하시고 성전을 떠나시게 됩니다.
첫째, 예수님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의인과 선지자를 죽인 피가 이 세대 전체에 돌아가리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분명 일곱 번의 ‘화 있을진저’ 말씀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35절, 36절, 37절에서 그 말씀이 향하는 대상은 그들을 넘어 그들과 함께 동시대를 사는 예루살렘과 유대 백성 전체로 확대됩니다.
35절 “다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36절 “다 이 세대에 돌아가리라” 37절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왜 이렇게 확대될까요? 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잘못된 가르침이 결국 예루살렘과 유대 전체를 오염시켰기 때문입니다. 대다수의 예루살렘과 유대 백성은 그 가르침을 따랐습니다. 그래서 그들 역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열지 못하고 율법의 핵심을 놓치고 겉과 속이 다른 신앙과 삶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기보다는 단지 유대교 신자일 뿐입니다. 
그들이 잘못된 가르침을 만든 것은 아니죠. 그러나 그들의 잘못은 그 잘못된 가르침을 분별하지 못하고 따랐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며칠 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는 군중이 됩니다. 그래서 결국 그들 모두에게 책임이 돌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교훈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잘못된 가르침을 말한 사람이나 잘못된 가르침을 따른 사람이나 그 결과는 동일하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몰랐습니다’라는 변명은 통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 가르침을 따랐을 뿐입니다’라는 변명도 통하지 않습니다. 그들 편에 서서 그 가르침을 따르고 선지자와 의인을 박해하고 죽이는 데 동조했다면, 나도 같은 죄에 해당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좋든 싫든 그냥 살면 안 됩니다. 우리는 많은 것들을 분별하고 참된 목자를 따라가는 양이 되어야 합니다. 참된 가르침과 참된 목자를 따르지 않으면, 그 책임은 결국 우리에게로 돌아옵니다. 우리도 같은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이단을 따르는 사람은 그 교주와 함께 망하고, 잘못된 영적 지도자를 따르는 사람은 그 지도자와 함께 망하고, 잘못된 구원론을 따르는 사람은 그 구원론과 함께 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일곱 번의 ‘화 있을진저’ 말씀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넘어 동시대 백성 전체로 확대하시는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무분별한 군중이 아니라 분별하고 깨어있는 교회와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당부했습니다.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딤후3:13~14) 
바울은 무조건 믿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그것은 우리 신자들의 의무입니다. 그러므로 늘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시고 믿음의 확신에 거하시길 바랍니다. 착하기만 한 양은 좋은 양이 아닙니다. 목자의 음성을 잘 듣는 양이 좋은 양입니다. 목자의 음성을 잘 듣고 따라가는 좋은 양이 되시길 바랍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은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너는 예루살렘을 가리키고, 그래서 네 자녀는 예루살렘 유대인을 가리키고, 그래서 이것은 당시 유대 백성 전체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여러 번 예루살렘을 방문하셨습니다. 비록 마태, 마가, 누가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방문을 한 번으로 묘사하지만, 아시다시피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방문을 여러 번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수전절 등 많은 명절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그들 앞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 양문 곁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된 병자도 고쳐주시고, 생수의 강 설교도 하시고 세상의 빛 설교도 하시고, 음행 중에 잡힌 여인도 구원해주시고, 또 유대인들과 진지한 논쟁도 하시고, 나사로를 살리는 놀라운 이적도 보여주시고...
예수님은 그렇게 암탉이 그 새끼를 자기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그들을 모으시고 품으시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끝내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도무지 새로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줄 몰랐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요8:43~45)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의 마음과 생각의 어떤 총체적인 그 무엇인가에 의해 계속 거부되고 튕겨났습니다. 자신들의 지식, 율법 이해, 경험, 관습, 욕심, 무지... 이런 것들이 자신 안에서 한 덩어리를 이루며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도 그렇고 예수님도 그렇고 하나님은 우리를 언제나 품으려고 하시는 분이십니다. 마치 갓난아기를 품는 부모처럼 우리를 품으시고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원래 그런 성품과 속성을 깊이 가진 분이십니다.
그런 하나님의 모습을 우리는 성경 안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인도하셨고, 아브라함 평생에 그를 인도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거절하였을 때에도 비록 공백 기간은 있지만 하나님은 다시 나타나 그를 품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도 품으셨습니다. 노예생활에 젖은 그들이 계속해서 불평하고 원망하고 거역해도, 하나님은 계속 그들을 품으시고 말씀하시고 인도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런 사랑의 날개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시내산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룻기에서 보아스는 시어머니 나오미를 위해 하루종일 이삭을 주운 룻에게 이런 축복의 말을 해주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시편 17편에서 다윗은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나를 눈동자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감추사... 악인들과 원수들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
네, 하나님이 이런 분이시기 때문에, 예수님도 그렇게 예루살렘의 자녀들을 품으시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그런 하나님의 속성은 오늘날에도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본성적으로 우리를 당신의 날개 아래로 품으시고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잘 몰라서 거절하고 교만해서 거절하고 바빠서 거절하고 필요없어서 거절하고... 그래도 하나님은 우리 중심을 보시고 우리가 잘 몰라서 그러면 계속 품으시려고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면서 거부하고 고의로 거부하고 끝내 거부하면, 하나님은 언젠가  그의 손길을 거두시게 됩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떠날 수 있는가? 네, 떠날 수 있죠.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을 떠나는 두려운 장면을 환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때에 남유다의 국가 운명이 위태로울 때, 예루살렘 성전 안에는 우상이 세워져 있고, 이스라엘 장로 70인은 성전 내실에서 벽에 그린 우상 앞에 분향하고, 여인들은 북문에 앉아 담무스를 위하여 애곡하고, 25인은 성전 뜰에서 성전을 등지고 동방 태양을 향해 경배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성전에 더 이상 계실 수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은 떠올라 성전 문지방에 이르고 그리고 성전 문지방을 떠나 그룹 위에 머무르고 그리고 성읍 가운데서부터 올라와 성읍 동쪽 산에 머무르고 그리고 마침내 예루살렘을 완전히 떠나시게 됩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그 환상을 바벨론 포로생활 가운데 보았습니다. 몇 년 후에 예루살렘은 완전히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에스겔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님을 거부하는 그들을 떠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우리에게서 떠날 수 있는가? 네, 이렇게 서서히 떠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고의로 벗어나면 벗어날수록 그렇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떠나지 않도록 늘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 믿어도 늘 똑같다고 우리 마음이 세상으로 향하고, 하나님 믿어도 가난하다고 세상으로 향하고, 하나님 믿어도 어렵다고 세상으로 향하고... 그래서 우리가 점점 하나님을 소홀히 하면...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도 점점 우리를 떠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속일 수 있을까요? 하나님 중심이 아닌 삶을 살지만,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척 하나님을 속일 수 있을까요? 떠난 마음으로 예배드리면 하나님께서 받아주실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당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된 신자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날개 아래 늘 머물기를 원해야 합니다. 내 삶이 어렵든 어렵지 않든 잘 살든 못 살든, 언제나 내가 있을 곳은 하나님의 품 안인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여기가 내 집이고 안식처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들에핀믿음찬교회 성도님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날개 아래 신실히 거하시는 분들이 되시기를 빕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은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너희 집’은 성전을 가리킵니다. 그 옛날 다윗이 간구하고 솔로몬이 건축하고 스룹바벨이 다시 세우고 지금 헤롯이 크게 짓고 있는 이 성전은 더 이상 ‘하나님의 집’이 아닙니다. 성전은 이제 ‘너희의 집’으로 전락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하나님이 보내신 자들을 죽이고  하나님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이적과 기사로 그들을 품으시려고 하셨지만 그것마저 거부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곧 죽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성전은 그들이 하나님과 무관하게 모이는 그들의 집이 되었고 이에 따라 하나님은 성전에서 자기 이름을 거두시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런 성전을 지금 예수님은 떠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성전에 계속 남아 있어야 할까요? 예수님을 따라 성전을 떠나야 할까요? 네, 예수님을 따라 성전을 떠나야 합니다.
이와 관련 히브리서는 우리에게 중요한 말씀을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히13:12~14)
히브리서는 우리 신약 신앙의 교과서 같은 말씀인데, 히브리서는 우리에게 이제 예루살렘 성전이 아닌, 영문 밖 그분이 계신 영원한 성전으로 가자고 말씀합니다. 그 성전은 시간을 초월하고 장소를 초월하는 영적인 성전입니다. 그 영적인 성전은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으로 두세 사람이라도 모이면 임하시는 성전입니다. 
우리 마음에도 이루어지고 우리 교회에도 이루어지고... 그래서 우리가 성령 안에서 그런 영적인 성전을 이루면, 떠나셨던 우리 주님께서는 해같이 빛나는 얼굴로 불꽃 같은 눈으로 가슴에 금띠를 띠고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나타나실 것입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의 사도 요한과 같이 그런 영적인 성전에서 영광스럽게 주님 앞에 엎드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들은 예수님과 함께 그와 같은 영적인 성전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바티칸의 성베드로 성당이 아무리 크다 해도, 그런 영적인 성전이 되지 못하면 아무 의미 없는 한낱 공간일 뿐입니다.
그러나 지금 여기 작은 장소라 할지라도 우리가 그런 영적인 성전이 된다면,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 되고 주님의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시고 성전을 나와서 떠나셨습니다. 우리도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옛 성전을 나와서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새로운 곳은 영적인 성전이고 그분의 품이고 그분의 날개 아래인 줄 믿습니다.
아무쪼록 그곳을 바라보시고 그곳에 늘 거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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