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믿음찬교회 0 305 2022.04.12 15:28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 27:45~50
2022.04.10.

이번 주 고난주간을 맞아, 오늘 본문을 27장 말씀으로 정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조금 앞당겨 보는 것으로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 남기신 말씀을 ‘가상칠언’이라고 합니다. 칠언이니까 모두 7개의 말씀입니다. 마태와 마가가 하나를, 누가가 셋을, 요한이 셋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와 마가는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 중 단 하나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입니다. 이것은 아람어입니다. 이 아람어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말입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나님을 향한 고백 같은 이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저는 어릴 적 주일학교나 중고등부 시절에 이 말씀이 항상 마음에 걸렸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마지막 순간에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원망 같고 절망 같은 말씀인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너무 힘들고 절망스러우셔서 그런 말씀이 흘러나왔나보다... 십자가의 고난과 고통이 얼마나 크셨으면... ’ 혼자 그런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대학생 이후 설교를 통해 또 신앙서적을 통해, 이 말씀의 의미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으신 예수님’ 즉 ‘우리의 죄짐을 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모습’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네, 이것은 일종의 조직신학적 해석인데, 당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이런 의미가 일반적이었습니다. 아무튼 목사님이 그렇게 설교하시고, 또 당시 책들도 그렇게 말하니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래도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시원하진 않았습니다. ‘그런 해석은 우리가 지금 신학적으로 하는 것이지, 실제 예수님은 그 말씀을 어떤 마음으로 하셨을까? ...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가 어떻게 알겠나?...’ 또 그렇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나중에 신학도 하고 좀 더 여러 주석이나 책을 접하면서, 이 말씀에 대한 다른 해석과 견해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이 말씀을 그 원래 출처인 시편 22편으로 이해하는 해석입니다. 앞의 해석이 조직신학적 해석이라면, 이 해석은 성경신학적 해석입니다. 성경신학적 해석이란 예수님의 이 마지막 말씀의 뜻을 알려면 시편 22편을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확실히 지금은 신학의 추세도 조직신학에서 성경신학으로 많이 옮겨왔죠. 지금은 성경신학이 더 중시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이 해석을 지지하는 신학자나 목회자들이 많아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고난주간을 맞아, 고난주간의 상징과도 같은 이 말씀을 살펴보고, 예수님께서 그날 과연 어떤 마음과 뜻으로 이 말씀을 하셨는지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고 진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지시고 그때 거기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으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십자가 위에서 하시거나 혹은 하시지 않거나, 전혀 달라지지 않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에 이 말씀을 하셨을까요? 그리고 마태와 마가는 왜 이 말씀을 기록하였을까요?
그때 예수님께서 자신이 모든 인류의 죄를 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저주를 받은 바 되었다는 사실을 굳이 말로 말씀하셔야 했을까요? 그것도 원망이나 절망 같은 뉘앙스로 말이죠.
감히 이런 말씀을 드리면 안 되지만, 만약 저라면 제가 예수님의 자리에 있었더라면 굳이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자신의 죽음의 신학적 의미를 말하기 위해 굳이 그런 발언을 한다는 것은 너무 부자연스럽고 인위적입니다. 굳이 그런 말을 안 해도 사람들은 나중에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못난 저라도 그렇다면, 하물며 예수님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자신이 사람들의 죄를 짊어진다는 것을 몰랐던 것도 아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저주받게 된다는 것을 몰랐던 것도 아니고, 십자가의 고난과 고통이 그렇게 크다는 것을 몰랐던 것도 아닌데... 굳이 그 순간 그런 원망 같고 절망 같은 말씀을 하셔야 했을까요? 못난 저라도 어차피 십자가 위에 있는 이상, 아무 말 안 하는 것을 선택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원망이나 절망은 예수님의 신성에도 어울리지 않고, 인성에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성실히 마태복음을 읽어왔다면, 아무리 힘들어도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해 그런 말씀을 하실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만약 그런 의미라면 마태가 기록할 이유도 없습니다. 이 말씀은 십자가 칠언 가운데 마태와 마가가 유일하게 기록하는 뜻 깊은 말씀인데, 그런 신학적 의미를 말하자고 그런 원망과 절망의 말을 성경저자들이 기록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예수님의 이 말씀에 대한 조직신학적 해석은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 의미 자체는 맞지만, 이 말씀에 담긴 예수님의 마음이나 뜻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조직신학이란 안경을 벗고, 순수한 눈으로 예수님의 이 말씀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말씀하신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네, 이제 우리는 이 말씀의 원천인 시편 22편으로 가야 하겠습니다. 시편 22편은 다윗이 지었고,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 
여기까지가 시편 22편 2절입니다. 시편 22편은 이렇게 시작하여 총 31절까지 나아갑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그때 십자가 위에서 크게 외치신 말씀은 이 시편 22편의 첫 문장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그것은 비록 첫 문장이지만, 예수님의 뜻은 그 시편 22편 전체를 외치시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기력과 힘이 없으시고, 또 방해하는 사람들도 있고 해서 다 암송하시지 못한 것이죠.
그러므로 우리는 마태나 마가가 그런 의미에서 그 첫 문장만을 기록한 것이라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때는 ‘시편 22편’ 이런 제목이 없었죠. 그때는 첫 문장이 그 시편을 가리키는 제목이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의 히브리어 성경 제목은 창세기가 아닙니다. 창세기의 히브리어 성경 제목은 ‘태초에(브레이쉬트)’입니다. 그것은 창1:1 히브리어 첫 단어가 바로 ‘태초에’이기 때문입니다. ‘브레이쉬트 바라 엘로힘 에트 하 샤마임 우 하 아레츠’(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렇게 본다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는 단순한 예수님의 고통이나 절망이나 처절한 독백이 아니라, 무슨 다른 뜻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 과연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셨을까요? 네, 그 답을 알려면 시편 22편 말씀 전체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시편 22편 말씀을 살펴보면, 이 시편은 전체 내용이 교차대구법으로 쓰였습니다. 교차대구법은 a-b-c-b′-c′ 이렇게 글이 진행됩니다.
교차대구법으로 쓰인 시편 22편 전체를 간단히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탄식(1~2)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2) 구원의 기대(3~5)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우리 조상들이 주께 의뢰하고 의뢰하였으므로 그들을 건지셨나이다...”
  3) 조롱과 위험(6~18)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 겉옷을 나누고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4) 구원의 간구(19~20)
      “여호와여 멀리 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5) 응답 및 찬송(21~31)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들소의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가운데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니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

이렇게 시편 22편 전체를 살펴보면, 이 시편은 굉장히 위대한 내용입니다. 고난에 대한 탄식으로 시작하지만, 구원의 기대를 담아, 조롱과 위험의 현실을 넘어, 구원을 간구하고, 마침내 구원의 응답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가장 어두운 절망에서 가장 찬란한 소망으로 나아갑니다. 나의 초라하고 작은 영역에서 하나님 나라의 영광스럽고 무한한 영역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이 시는 메시아 예언 시 중에서도 단연코 으뜸인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 시의 마지막 부분이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바라보는 절정이라는 사실입니다. 교차대구법은 보통 내용의 중심이 한가운데인 c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강조점이 항상 기계적으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 시는 예수님의 고난의 내용을 한가운데에 가지고 있지만, 시의 절정은 마지막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의 완성입니다.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니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왜 이 시편을 그 마지막 순간에 외우셨는지 알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운명하시는 그 순간 하나님 나라의 절정을 바라보셨고, 간절히 염원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하나님 나라라는 단 하나의 목적으로 일관되었습니다.  초자연적인 출생부터, 광야에서의 시간, 갈릴리 사역의 첫 일성,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 마침내 예루살렘, 그리고 지금 여기 십자가...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나라 단 하나로 설명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예수님이 운명하시는 시간, 그분의 불꽃은 하나님 나라의 성취와 완성에 대한 기대 안에서 마지막으로 타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편 말씀은 그런 의미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예수님의 마음에 간직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 예수님의 마지막 고백은 절망이나 원망이 아니라 믿음의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온 마음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이 마지막 순간을 하나님께 온전히 올려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고난주간에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나 고통을 많이 묵상하곤 합니다. ‘얼마나 아프셨을까?, 얼마나 힘드셨을까?, 내 죄 때문에...’
그러나 사실 성경은 우리에게 그런 교훈을 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어떤 면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고통 자체에 대해서는 살짝 점을 찍듯이 지나갑니다.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그냥 이렇게 말하고 넘어가죠. “그들이 마침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더라. 예수께서 그 모진 고통을 견디시니 멀리 선 제자들이 울며 흐느끼더라...” 성경은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어쩌면 우리가 이 고난주간에 생각할 내용은 십자가의 고난과 고통 그 자체가 아닙니다. 그것을 아파하며 그런 고난 체험을 하거나 하는 것은 사실 성경의 진정한 뜻이 아닙니다. 언젠가 해외뉴스를 보니까, 어떤 나라에서 고난주간에 실제로 십자가 체험 행사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떤 분이 십자가에 달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 뒤를 따라갔습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님의 고난을 아픈 마음으로 묵상해야 하죠.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그런 감정적인 교훈에 치우치기보다는 십자가의 참된 의미와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과 그 안에 담긴 의미... 그런 영적인 교훈을 더 묵상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와 같은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에서 어떤 교훈을 받아야 할까요?
네,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외치시고 외우셨던 그 시편 말씀을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 시편 말씀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말씀하고 있고, 예수님은 그것을 간절히 바라보셨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면, 우리도 그것을 함께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님과 같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관된 삶을 살지는 못합니다. 예수님의 크고 위대하신 생애를 그림자 발끝이라도 따라갈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뭐가 뭔지도 모른 채, 살기에 급급한 인생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만하고, 어떤 사람은 실망하고, 어떤 사람은 앞만 보고 묵묵히 살아갈 뿐이죠. 우리에겐 그런 각자의 삶의 이야기가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없으면 우리 각자의 삶의 이야기는 얼마 가지 못해 사라지고 맙니다.
그런데 감사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님을 보내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면 우리의 삶의 이야기는 영원한 이야기가 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고,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알아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예수님처럼 반드시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그 나라를 바라보며 완성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았든지 어떤 시대를 살았든지, 우리 삶이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종결된다면 우리는 가장 성공한 사람이 됩니다.

최근 ‘파친코’라는 드라마가 큰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어려운 시대를 살았던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 원작소설은 그 사람의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합니다.
“역사가 우리를 망쳐놓았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그 소설을 쓴 작가분은 기독교인인데, 저는 그분이 단지 어떤 한 사람의 이야기를 썼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려운 시대를 헤치며 살아간 모든 사람을 생각하며 그 작품을 썼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 주인공의 이야기가 길이 남을 영원한 이야기가 되기를 기대하며 썼을 것입니다.
한 사람의 이야기가 어떻게 영원한 이야기가 될 수 있을까요? 네, 오직 하나님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각자 현실의 삶을 하나님의 나라 안으로 만들어가시길 바랍니다. 생활의 습관도, 자주 쓰는 언어도, 혼자 하는 생각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통치 안으로 들어가시길 바랍니다. 일을 하고 돈을 벌고 사람을 만날 때에도 하나님의 나라를 염두에 두시길 바랍니다. 그 나라를 거스르면서 일을 하거나 돈을 벌거나 관계를 맺는다면, 그런 삶은 줄여나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 삶은 점점 하나님의 나라와 가까워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은 우리 위에 머무르고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안에 완성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그날에 ‘사랑해, 고마워, 잘지내...’ 그런 개인적인 말을 넘어서,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모습이 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언제나 마지막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았든지, 주님을 만나고 삶의 방향이 잡히고 하나님 나라 안에서 마침표를 찍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처음부터 그렇게 살지는 못하지만, 마지막은 그분의 마지막과 닮아야 할 줄 믿습니다.
아무쪼록 우리 성도님들의 삶의 이야기가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와 통치 안에서 완성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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