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원의 새 농부들
마 21:33~46
2022.03.13.
마태는 21장과 22장을 이런 구조로 쓰고 있습니다. 3.3.3.
첫 번째 세 개는 사건들인데, 예수님의 입성, 성전 정화, 무화과나무 사건입니다. 이 사건들은 모두 예수님의 어떤 특별한 상징적인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세 개는 비유들인데, 두 아들 비유, 포도원 농부 비유, 혼인 잔치 비유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에게 권위 문제를 제기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세 번째 세 개는 논쟁들인데, 세금 논쟁, 부활 논쟁, 가장 큰 계명 논쟁입니다. 각각 헤롯당원들, 사두개인들, 바리새인들과 예수님 사이에 있었던 대결과 논쟁들입니다.
마태는 이렇게 21장과 22장을 3.3.3.의 구조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구조를 생각하면서 오늘 본문을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그날 이른 아침 무화과나무 사건 후에,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고 성전에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의 바깥 뜰 광장과 회랑에서 강론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소식을 들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은 전날에 성전을 소란케 했었죠. 성전은 대제사장의 권한 아래에 있는데, 그래서 그들은 그 사건을 예수님에게 따져 물으러 왔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에게 한 말은 이것입니다.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런 권위를 네게 주었느냐?” 이런 그들의 말에 예수님의 마땅한 대답은 ‘그것은 하늘에서 왔다’라는 것이겠죠.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예수님은 계속 추궁을 당하고 수세에 몰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믿겠느냐? 하나님이 네게 그런 권위를 주셨다는 것을 증명해보라...”
그래서 예수님은 오히려 역질문으로 그들에게 공세를 취하셨습니다.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그러면서 예수님은 ‘요한의 세례가 어디서부터 왔는지?’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의 질문은 그들에게 매우 어려운 질문이었습니다.
얼마 전 순교한 세례 요한은 백성들로부터 참된 선지자로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의 권위를 인정하면 요한과 예수님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권위도 인정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세례 요한의 권위를 모르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나도 내 권위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말하지 않겠다고 하시고, 오히려 그들의 근본 문제를 다루는 3개의 비유를 말씀하시게 됩니다.
그 3개의 비유는 두 아들 비유, 포도원 농부 비유, 혼인 잔치 비유입니다. 이 3개의 비유를 살펴보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두 아들 비유는 굉장히 간단한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포도원을 가꾸는 한 가족을 배경으로 합니다.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일을 시키려고 합니다. 그런데 맏아들은 가겠다고 했으나 가지 않았고, 둘째 아들은 가지 않겠다고 했지만 나중에 갔습니다. 예수님은 이 간단한 비유 후에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둘 중 누가 순종하는 아들이냐?” 네, 너무 쉬운 질문이죠.
여기서 불순종한 맏아들은 바로 그들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그들의 근본 문제를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거룩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성전에 있지만, 그들의 근본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가장 단순한 진리를 알 수 있습니다. 가장 훌륭한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신앙입니다. 가장 좋은 신앙은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입니다. 그 사람이 능력이 얼마나 있고 직분이 얼마나 높고 축복을 얼마나 받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따르고 있는가... 그것이 가장 훌륭한 신앙입니다.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두 번째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는 일명 포도원 농부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그들에게 또 어떤 메시지를 말씀하시는 걸까요?
우선 예수님의 이 비유는 구약의 한 유명한 노래 혹은 시를 연상하게 합니다. 그것은 바로 이사야 5장의 “포도원의 노래”입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사5:1~2)
포도원과 포도나무는 구약에 자주 나오는 상징입니다. 이 상징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를 나타냅니다.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을 가리키고, 포도나무나 포도원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유명한 이사야서의 노래를 떠올리게 하면서, 오늘 이 비유를 시작하십니다.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지어서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이렇게 이사야서의 노래와 예수님의 비유가 매우 비슷합니다. 포도원 주인이 나오고, 포도원 주인이 공들여 만든 포도원이 나오고, 망대가 나오고, 술틀이 나오고... 분위기도 매우 비슷합니다.
그러면 차이점은 없을까요? 네, 당연히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사야서의 이 노래를 그대로 인용하신 것은 아닙니다. 처음 시작과 전체 분위기는 비슷하지만, 그 내용과 중심 메시지는 많이 다릅니다.
이사야서의 노래는 좋은 포도가 아닌 들포도를 맺는 포도원을 고발합니다. 그 포도원은 바로 이스라엘이죠. 이에 비해 예수님의 비유는 포도원의 농부들을 고발합니다. 그 악한 농부들은 바로 유대 종교지도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사야서의 유명한 포도원의 노래를 암시하면서, 그 고발의 초점을 포도원이 아닌 포도원 농부들에게 맞추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이 포도원 농부들은 매우 악한 사람들입니다. 주인의 은혜를 모를 뿐만 아니라 보낸 종들을 때리고 심지어 아들까지 죽이는 사람들이죠.
당시 대부분의 농부들은 소작농들이고, 그래서 농부들은 마음씨 좋은 주인을 만나는 것이 큰 행운이었습니다. 만약 현실 속에 이 주인처럼 좋은 포도원을 세로 주고 달리 간섭하지 않는다면, 그런 고마운 주인이 또 없습니다.
그런데 이 농부들은 굉장히 이상하고 악합니다. 포도를 수확할 때 주인의 정당한 요구에 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인이 보낸 종을 때리고 또 보내면 더 심하게 때리고 빈손으로 보냅니다. 더러는 죽이기도 합니다.
네, 물론 이런 비현실적인 내용은 비유 본래의 특징입니다. 실제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죠. 농부들도 비현실적이고 주인도 비현실적입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비유는 실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징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유는 본래 말이 안 되는 이상한 요소가 많다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주인은 마지막으로 자기 아들을 보냅니다. 그 농부들이 자기 아들만큼은 대우하리라 믿었습니다. 왜? 자기의 아들이니까... 아들에게만큼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그가 아들이고 상속자니까 죽이자고 서로 말합니다. 그래서 결국 아들을 죽입니다. 그들의 악행의 절정이죠.
여러분, 이 대목에서 이 비유를 듣던 대제사장 이하 그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아마 그들은 이것이 자신들을 가리키는 비유라는 것을 알아챘을 것입니다. 그리고 비유에 나오는 아들은 바로 자신들 앞에 서 있는 예수라는 사실도 알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죽은 세례 요한의 뒤를 잇는 선지자적인 인물이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메시아로 말하고 있고, 그런 인물을 지금 자신들이 죽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이 비유는 이사야서의 노래처럼 비극으로 끝이 납니다. 아들도 죽고 농부들도 다 죽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비유에는 이사야서 포도원의 노래와 다른, 마지막 반전 하나가 남아 있습니다. 이 마지막 반전이 없다면, 이 비유는 이사야서의 노래의 또 다른 버전 혹은 아류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마지막 반전은 이 비유의 결정적인 핵심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무엇일까요? 네, 그것은 바로 9절입니다.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여기서 마지막 말씀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라는 부분이 중요합니다. 이 부분은 이사야서 포도원의 노래와 다른, 뭔가 비극의 벼랑 끝에 핀 작은 꽃과 같습니다.
이사야서의 포도원의 노래는 포도원이 황폐화 되면서 끝납니다.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음은 어찌 됨인고?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지를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하게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내가 그것을 황폐하게 하리니...”(사5:4~6)
그러나 예수님의 비유에서 포도원은 황폐되지 않습니다. 다만 포도원을 가꾸는 농부들이 바뀔 뿐입니다. 새로운 농부들이 선택되어 그 포도원은 다시 새로운 희망을 기대하게 됩니다. 이 내용이 이 비유의 가장 특별한 내용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 예수님의 비유는 지금 앞에 있는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장로들에게 무척 수수께끼 같은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준다니 도대체 그게 무슨 의미인가? 그 다른 사람들은 누구란 말인가?...’ 그들은 잠시 이런 생각을 했겠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이 비유의 특별함은 마지막 부분에 있고, 그 마지막에 등장하는 새로운 농부들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포도원을 물려받아 새롭게 가꿀 이 새로운 농부들은 누구일까요?
네,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이끌 새로운 지도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악하고 낡은 성전 지도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백성을 바르게 이끌어갈 새로운 지도자들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이들은 신약의 교회와 신자 전체라고 확대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성령 안에서 세워진 포도원의 새로운 농부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성전의 몰락을 예고한 무화과나무 사건과 성전 정화 사건의 후속편입니다. 성전이 몰락하고 성전지도자들도 몰락하고 그러면 그 후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어떻게 되는가? 네, 이 비유는 이제 하나님의 포도원에 새로운 공동체와 일꾼과 사람들이 등장한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포도원의 새로운 농부들입니다. 율법과 성전의 낡고 부패한 말씀과 의식을 버리고, 하나님을 새로운 올바른 방식으로 섬기는 교회와 신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신약과 구약은 연속성이 있지만, 그러나 그 연속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뜻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신앙 안에 무분별하게 구약을 참고하지 않아야 합니다. 일천 번제라든지, 가부장적인 축복권라든지, 야베스의 기도라든지, 교회를 성전이라고 한다든지, 목사를 권위적인 제사장으로 생각한다든지, 신자를 수동적인 교회 일원으로 만든다든지, 우리 신앙이 자유하지 못하고 율법에 매인다든지... 우리는 신약성경을 통해 그런 옛 신앙을 버리고 새로운 신앙을 잘 추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자발적이고 성숙한 좋은 신앙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포도원 농부 비유의 의미와 교훈입니다. 그런데 이 내용은 우리가 앞서 많이 살펴보았기 때문에 더 말씀드리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비유에서 마지막으로 한 가지 내용만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열매를 받고자 하신다는 내용입니다. “열매 거둘 때가 가까우매 그 열매를 받으려고...”
네, 이것은 하나님의 권리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포도원 농부인 우리들의 의무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포도원은 무엇일까요? 네, 그것은 우리의 인생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 우리가 받은 시간 속에서 하나님께 열매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열매를 요구하신다는 사실과 우리는 그분께 열매를 드려야 한다는 사실은 우리 인생의 구조적인 설계입니다. 그렇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인생이고 우리의 실존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시대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시대이죠. 내 인생과 삶에 하나님이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내 인생은 나의 소유물입니다. 내 인생을 내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오늘날의 생각입니다.
오늘날 상당수 신자들도 그런 세상적인 생각과 그 결을 같이 합니다. 복 받고 구원 받고 천국 가려고 예수 믿지, 하나님에 대한 의무가 없습니다. 교회들도 많고 얼마든지 대접을 받고 교회를 다닐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복과 은혜를 우리에게 내려주시는 하나님이지, 때가 되어 우리에게 뭔가를 요구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하지 못합니다.
오늘 이 비유의 농부들처럼 포도원 주인의 정당한 요구를 거절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삶은 우리 것이죠. 우리는 주체적인 삶을 사는 자유로운 인격적인 존재입니다. 우리는 마음대로 하나님의 포도원에서 포도를 거둘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생각을 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 생각과 마음 중심 안에는 하나님이 원하실 때 그것을 반드시 돌려드려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의무감이죠.
언젠가 저는 ‘퓨리’라는 전쟁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지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 영화는 그런 전쟁 속에 벌어진 한 전차를 탄 군인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2차대전 막바지에 퇴각하는 독일군을 한 요충지에서 막으라는 특별한 명령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 장소로 이동하는 중에 공격을 받아 다른 전차들은 다 불타고 오직 그들만 그 장소에 도착합니다. 설상가상으로 전차 바퀴가 고장이 나서 움직일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멀리서 보초를 서던 전차의 가장 막내 군인이 이제 곧 독일군이 이곳으로 온다는 보고를 합니다.
그 전차에 5명 정도의 군인이 있었는데, 전차장에게 다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우리 힘으로 저 수백명의 독일군을 막을 수 없습니다. 피해야 합니다.” 그런데 잠시 고민하던 그 전차장은 자신은 남아서 끝까지 전투를 하겠다고 했습니다. 이 독일군 부대를 지나가게 하면, 자신의 아군 부대 전체가 위험해지기 때문입니다.
그 전차장의 주장은 맞는 말이지만, 고장난 전차 1대와 고작 자신들 5명으로 수백명의 독일군 대대를 막는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전차장은 여기 남을 것이고 여기서 죽겠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그 전차장의 무언가 알 수 없는 그 단호한 의지에 다른 군인들도 남겠다고 그들은 그렇게 결국 전투를 치릅니다. 처절한 전투 끝에 다 죽고 그 막내 병사만 극적으로 살아남습니다. 독일군은 상당한 타격을 입고 그렇게 해서 아군의 부대는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카메라가 그 철저하게 파괴된 전차 위로 올라가면서 그 전차를 보여줍니다. 그 전차와 주위의 길이 보여지기 시작하고, 영화는 그 전차가 십자가 모양의 길 중심에 위치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끝납니다.
이 영화는 영화를 보는 사람들에게 한 가지 큰 질문을 던집니다. 그 전차장이 ‘도대체 왜 거기서 도망가지 않고 마지막 전투를 치르기로 결정했는가?’입니다. 백의 백사람이라도 그 자리를 피하는 것이 정상적인 판단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죽기로 결정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영화를 본 사람들은 그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네, 저는 그 문제가 오늘 말씀과 관련이 있다고 믿습니다. “열매 거둘 때가 가까우매 그 열매를 받으시려고...” 그 전차장은 그것을 생각한 것 같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 삶의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께 나의 열매를 드려야 한다는 생각을 하여야 합니다. 그것은 한 번의 결정적인 열매일 수도 있고, 지속적인 신실한 열매일 수도 있습니다. 그 형태와 모습은 다를지라도, 우리 믿는 자들은 나의 열매를 하나님께 기꺼이 바친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의 신자들 중에 그런 신앙 의식을 가진 분들이 얼마나 있을까요? 우리를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 앞에, 나도 나의 모든 그리고 나의 결정적인 열매를 드리겠다는 의식을 얼마나 할까요? 그러나 우리는 그런 생각을 우리 마음과 믿음 속에 깊이 품어야 합니다.
나는 무엇을 드릴 수 있을까? 나는 무엇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는가? ... 우리가 그런 마음과 생각으로 살아가면, 하나님께서는 때가 될 때 기꺼이 기뻐 받으실 것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들에핀믿음찬교회 성도님들은 포도원의 새로운 농부들이 되어 그와 같은 거룩한 마음과 생각을 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