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예수님의 예루살렘 사역

믿음찬교회 0 156 2022.02.16 15:06
예수님의 예루살렘 사역
마 21:1~11
2022.02.13.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드디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내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리고에서 예루살렘까지... 거리로는 약 30km 거리를 높이로는 약 1,000미터 높이를 하루정도 걸어서, 예루살렘 근처 감람산 벳바게 마을에 도착하셨습니다.
아침 일찍 여리고에서 출발했다면, 오후 늦게 벳바게에 도착하셨겠죠. 구글 지도를 보면 벳바게에서 예루살렘까지는 1.5km 정도 거리로, 걸어서 20분 정도 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지 않으시고, 제자들을 맞은 편 마을로 보내어 나귀를 빌려오라고 지시하십니다.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바로 들어가시지 않고, 이렇게 나귀를 준비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네, 그것은 오늘 본문이 설명하고 있는 바와 같이 예수님이 왕과 메시아이심을 공개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예루살렘의 성전당국과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온 수많은 유대 백성들 앞에서... 그래서 이것은 일종의 퍼포먼스입니다.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예수님은 가급적 자신의 정체를 숨기셨습니다. 메시아라고 스스로 말하지 않으시고, 제자들이 그것을 말하는 것도 단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완전히 공개적으로 자신의 정체를 나타내고 계십니다. 예루살렘의 수많은 사람들이 다 보고 주목하도록 나귀를 타고 호산나 찬송 속에 마치 왕처럼 메시아처럼 입장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의도된 계획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의 마지막 1주일 동안 행하실 많은 일들을 이미 마음 속에 품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시고 호산나 찬송 가운데 입성하시고, 과격한 모습으로 성전을 정화하시고,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마지막으로 논쟁하시고, 그들의 죄를 예루살렘 한 가운데에서 선포하시고, 성전의 멸망과 최후의 종말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고, 최후의 만찬과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시고,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일들은 예수님께서 미리 준비하신 치밀한 계획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은 사역들을 예루살렘 한가운데에서 마지막으로 완성하시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에 도착하셨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예수님은 그간의 사역과 행적으로 예루살렘과 로마의 요주의 인물이었습니다. 1년 전 놀라운 오병이어 사건부터 성전당국은 노골적으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사람들의 민생고까지 해결해주는 예수를 그들은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숨어서 도망다녀도 시원찮을 그 인물이 이 명절에 예루살렘에 당당히 나타나 사람들 앞에서 파격적인 행보를 하다니... 그들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그냥 넘어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예수는 스스로 죽음의 문턱을 넘는 불가해한 인물이었습니다. 
한편 이런 사실을 예수님이 모르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어떻게 될지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에게 3번이나 이미 말씀하셨죠.
그러나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반드시 올라오셔야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마무리지어야 하는 사역과 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단지 십자가에서의 죽으심 그 하나만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유월절 명절 일주일 동안 예루살렘에서의 예수님의 행적을 잘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마음에 품으셨던 그 뜻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크게 3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옛 시대의 막을 내리고 문을 닫기를 원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옛 시대의 상징이 무엇일까요? 바로 성전과 율법 그리고 성전과 율법의 신봉자들입니다.
성전과 율법은 본래 하나님의 뜻이었지만, 오랜 세월 속에 사람들로 인해 변질되고 퇴색되고 더러워졌습니다. 또한 성전과 율법은 본래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간 속에 그 영적인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이제는 성전과 율법을 넘어서는 새로운 하나님의 뜻이 나올 시간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잘 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지금 옛 시대와 구 시대의 문을 닫는 마지막 작업을 예루살렘에서 하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과격하게 성전을 정화하시고,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를 말리시고, 율법주의자들과 논쟁을 하시고, 또 그들의 죄를 고발하시고 일곱 번의 화를 선포하시고, 성전 앞에서 성전의 종말을 예언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역들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지금 옛 시대의 문을 닫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그것을 아무도 몰랐습니다.

인류 역사 속에 시대를 바꾼 위대한 인물을 몇 명 꼽을 수 있죠. 석가모니 같은 경우는 불교의 창시자라는 사실을 떠나서, 개인의 자각이라는 점에서 시대를 바꾼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때까지 사람은 자신을 개인적으로 자각하지 못했죠. 그저 공동체 속의 한 존재로 자신을 이해하였습니다. 그러나 석가모니는 그 오랜 흐름을 깨고 개인적인 자각과 해탈을 말한 인물이었습니다. 인류는 그 시대 이후로 개인을 자각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철학의 역사 속에서는 헤겔이 그런 인물 중 하나입니다. 철학의 역사와 시대를 헤겔 이전과 헤겔 이후로 바꾼 인물이죠. 그때까지 사람들은 무엇이 옳다고 생각하면, 그렇다면 그 반대는 당연히 옳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의 사고는 이분법적으로 정과 반을 오고 갔습니다. 정과 반 사이의 중간이나 절충이 옳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때 헤겔이 나타났습니다.
헤겔은 정과 반이 아니라, 정과 반의 중간인 합을 말하면서 그것이 옳을 수 있다는 방법론을 제시했습니다. 그래서 헤겔은 철학의 역사와 인류의 역사에서 새로운 시대를 연 한 인물로 평가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석가모니 보다도 그 누구보다도 우리의 구원과 인류의 역사를 결정적으로 바꾼 분이십니다. 그래서 역사는 A.D.와 B.C.로 구분됩니다.
예수님이 아니었다면 인류의 역사 속에 우리의 구원 속에 율법과 성전은 청산되지 못했습니다. 인류는 율법과 성전 아래 매여있고, 그 율법과 성전 아래 신음하는 생활을 계속 했을 것입니다.
율법이나 법이나 그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지만, 우리 인간의 일상이 거기에 예속되고 그 밑에 사로잡히게 되면 불행해집니다. 법은 사람에게 방향이 되고 가이드라인이 되어야 하지, 그것이 사람을 통제하고 단속하는 수단 자체가 되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세세한 법에 맞추어 불안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법의 취지와 목적을 따라 자유롭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법은 우리 일상에 필요하지만, 지나치게 세밀하고 엄격한 법을 사람에게 적용하고 처벌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모든 주의를 조심해야 하는 것처럼, 법치주의도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다 허물이 많은 죄인이고, 우리는 율법의 시대로 돌아가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종교적 율법과 우리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율법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살아가도록, 율법에서 우리를 해방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생활은 그때부터 패러다임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율법 하나 하나를 따지고 강요하고 지키는 신앙이 아니라, 율법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영적이고 성숙한 신앙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율법과 법을 초월한 나라입니다. 마지막 품꾼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주는 놀라운 나라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우리의 신앙과 구원과 인류의 삶이 새 시대로 나아가도록 우리의 눈을 새롭게 뜨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예수님의 사역을 잘 이해하고 그것을 우리의 삶과 신앙에 잘 적용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일상도 그렇고 우리 신앙도 그렇고... 옛 시대와 옛 방식으로 돌아가면 안 됩니다. 어떤 분들을 보면, 일상에서 무슨 문제가 생기면 무조건 법으로 해결하려는 분들이 있습니다. 법을 따지고 규정을 따지고 그것으로 사람을 꼼짝 못하게 하려고 합니다. 믿는 신자인 우리는 가급적 그런 방식을 버려야 하겠습니다. 법보다 더 좋은 것은 건전한 상식과 선한 마음과 정직한 대화와 성경적인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그런 좋은 수단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가끔 보면 목사님들도 무슨 문제가 생기면, 교단 법이 어떻고 회칙이 어떻고 그렇게 법을 앞세우시는 목사님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법을 앞세우기 전에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시는지 아닌지 먼저 생각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법은 나중에 고려해도 늦지 않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 일상과 사람들과의 관계가 법에 매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율법과 성전 아래 이루어져서는 안 됩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교회가 있지만 신약교회다운 교회가 많이 없습니다. 많은 교회와 신자들이 여전히 구약의 옷을 입고 있습니다. 성전같은 교회를 짓고, 제사장 같은 목회자들이 구약의 모습으로 교회를 이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교회와 신자는 구약 제사장이 제사를 드릴 때 뒤에서 말없이 서 있었던 그런 옛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직접 만나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성령 안에서 함께 교회를 세워나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성전과 제도에 기대는 의존적이고 의무적인 신앙생활을 버리고, 하나님을 스스로 만나는 자기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전과 의식과 제도와 의무와 성직자에 그 옛날처럼 무분별하게 기대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 교회당이 있고 예배의식이 있고 성도로서의 의무가 있지만, 단지 이 안에 갇힌 신앙생활을 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모든 세상 속에서 모든 시간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 성전과 의식과 제도와 율법이 다 필요 없고 자기 마음대로 신앙생활 할 수 있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교회를 주셨고 성령을 주셨고 신자로서의 의무와 사명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낡은 옛 것을 벗고 동시에 영적인 새 것을 입어... 그런 새로운 율법과 뜻과 의무를 따르는 자유의 율법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우리 신약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약2:12)

우리가 이렇게 모든 면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살고 신앙생활 하는 것이 옛 시대를 청산하신 예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율법과 성전의 시대로 돌아가지 마시길 바랍니다. 자유의 율법과 영적인 성전이신 예수님에게로 늘 나아가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둘째, 예수님은 새 시대의 문을 열기를 원하셨습니다. 
어쩌면 무엇을 비판하고 폐지하고 무너뜨리는 일은 쉽습니다. 그러나 그 폐지하고 무너뜨린 자리에 새로운 것을 세우는 것이 없다면 그것은 진정한 개혁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때 예루살렘에서의 일주일 동안, 율법을 부정하고 성전을 무너뜨리고 성전 당국자들을 비판하는 일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 무너뜨린 자리에 새로운 것을 세우시는 작업을 남몰래 하셨습니다. 이것도 그때는 그것을 몰랐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입니다. 누가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때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예수님은 그 식사 자리를 원하고 원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 식사 자리를 그토록 원하셨을까요?
그 의미가 단지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함께 식사하는 그것이었다면,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리는 단순한 식사자리가 아닙니다.
그 자리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역사와 인류 역사 속에 없었던... 교회라는 새로운 영적인 공동체와 주의 만찬이라는 새로운 의식을 시작하신 자리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새로운 공동체와 새로운 의식이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임할 때까지 계속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눅22:16~18)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옛 시대를 닫고 새 시대를 여셨는데,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통해 새 시대를 여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큰 의미를 가진 교회이지만, 교회는 처음에 예수님과 제자들의 그 마지막 식사 자리에서 그렇게 작고 은밀하고 조용히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둘러 앉은 그 초라한 작은 모임이 바로 교회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놀라운 역사는 성전에서 그 작고 초라한 작은 모임으로 옮겨왔습니다.
그러나 작고 초라한 교회이지만, 교회는 영적인 실체입니다. 영적인 실체라는 말은 눈으로는 아무것도 안 보인다는 말입니다. 성전도 없고 제사장도 없고 제단도 없고 제물도 없는... 그저 예수님과 제자들이 둘러 앉은 또 여러분과 제가 이렇게 한 자리에 있는 영적인 공간이 전부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렇게 둘러 앉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렇게 둘러 앉아 2부 모임을 합니다. 말씀을 나누고 삶을 나누고 기도를 나눕니다. 아무것도 없고 초라하게 보이지만, 그러나 우리의 모임이 주님의 뜻에 진실하다면 그 옛날 성전에서 드렸던 어떤 제사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새로운 제사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를 매우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새 시대의 문을 여시고 교회를 새롭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지금 세상에서 나와서 하나님의 나라로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그런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을 가진 영적인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교회를 많이 사랑하시고 관심과 애정을 많이 두시길 바랍니다. 일부러 그러실 필요는 없지만, 자주 오실 수 있으면 기도하러도 자주 오시고, 모임에도 적극 참여하시고... 여러분들이 교회를 영적으로나 마음으로나 가까이 생각하실수록 더 많은 복을 받으실 줄 믿습니다.
여러분께서 그런 생각을 물론 안 하시겠지만, 혹시라도 오해하실까봐 드리는 말씀이지만, 여러분들의 교회에 대한 마음과 정성과 헌신을 목사인 제가 절대 탐내거나 가로채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주시는 대로 사례를 받고, 교회 재정을 함부로 쓰지 않고, 여러분들의 헌신을 제가 이용하지 않고, 여러분들을 함부로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는 신자들의 총회이고 우리 모두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그런 염려는 하지 마시고, 교회를 사랑하시고 하나님을 위해 늘 헌신해주시길 바랍니다. 또 헌신할 때에도 억지로 헌신하지 마시고 여러분의 형편을 따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자발적인 헌신과 헌금을 늘 해주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어떻게 설교가 옆으로 좀 많이 간 것 같은데... 재정결산 회의도 있고 해서 이렇게 말씀을 준비하게 된 것 같습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과 예루살렘에서의 사역... 우리는 그 전체 그림을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그때 거기서 옛 시대의 문을 닫으시고 새 시대의 문을 여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루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예루살렘 사역 3가지입니다.
아무쪼록 율법과 성전을 폐하시고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의 뜻을 이루시길 원하시는 예수님을, 우리 들에핀믿음찬 교회가 잘 따라가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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