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마태복음의 예수 탄생 이야기

믿음찬교회 0 139 2021.12.30 10:18
마태복음의 예수 탄생 이야기
마 2:1~12
2021.12.24.

오늘 우리가 성경본문 2:1~12을 읽었습니다만, 이 본문은 보면 볼수록 묘하고 이상합니다. 어떤 점이 묘하고 이상한가?... 그것은 이 본문의 전체적인 모습입니다.
아름다운 별과 보배합이 나오는 동화 같은 모습도 있고, 헤롯왕과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의 어두운 모습이 나오는 현실 모습도 있고, 깜깜한 길을 별이 인도하고 꿈에 계시가 임하는 초자연적인 신비한 모습도 있습니다. 아름답기도 하고 어둡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고... 이것이 오늘 본문의 모습입니다.
아니 글을 이렇게 쓰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동화에다가 현실에다가 신비한 판타지까지... 이렇게 막 섞어 놓으면 현대인인 우리가 잘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어쨌든 마태는 그날의 특별한 내용을 이런 모습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왜 이럴까요?  왜 이렇게 아름답기도 하고 어둡기도 하고 신비하기도 할까요? 아마도 그것은 이 이야기에 그와 같은 의미가 다 들어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첫째,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아름답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황금과 유향과 몰약이 담긴 보배합... 상상만으로도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 더 아름다운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이야기에 많이 등장하는 별입니다. 별은 이 이야기의 전체를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크리스마스 장식의 꽃은 별이죠. 별이 없으면 아무리 크리스마스 장식이 예쁘고 멋져도 뭔가 허전합니다. 크리스마스의 별은 바로 예수님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최근 성탄절 거리 장식에 성탄 트리의 별을 십자가로 바꾸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그리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성탄의 별을 굳이 교회의 십자가로 바꾸지 않았으면 합니다.
 
아무튼 마태복음은 동방박사들이 별을 보고 동방에서 경배하러 왔다고 말씀합니다. 동방박사들은 아마도 옛날 이스라엘의 왕궁 예언자와 같은, 그들 나라의 현인이나 사제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꿈도 해석하고 별도 연구하고 마술도 하는 그런 박사들입니다. 그들은 고대인들이 흔히 그랬듯이 앞날을 내다보고 길흉화복을 알고 점을 치기 위해 하늘의 별자리를 관찰했습니다. 그런 점성술은 대개 성경에서 부정적으로 묘사되지만, 그러나 적어도 마태복음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뭔가 하늘의 일을 알기 위해서 별을 연구했고, 그러던 중 특별한 별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이 특별한 왕의 탄생을 의미한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순수한 마음으로 그 미래의 왕을 만나 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먼 여행을  했습니다. 그들은 얼마나 마음이 설레었을까요? 그들은 별을 따라 그런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이와 같은 모습은 마치 한 편의 아름다운 동화 같습니다. 별이 나타나고 별이 인도하는 아름다운 이야기... 그리고 그들이 아기 예수께 경배하며 보배합을 여는 모습도 너무도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그들은 오직 그 특별한 분께 최고의 경배를 드리기 위해 그 먼길을 온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가 왜 이렇게 아름다울까요? 네, 그것은 그분이 오신 의미가 그렇게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하시기 위해 이 낮고 천한 곳에 임하신 주님... 그것은 아름다움의 극치입니다. 귀하신 아름다운 분이 아름다운 목적으로 오셨기에 그 과정도 이렇게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이 어찌 오신 모습만 그러하시겠습니까? 그 결과와 미래도 지금 우리 가운데 심히 아름답습니다. 소망 없는 이 어둔 세상에 밝은 빛을 비추시고, 그 빛으로 우리를 그분의 나라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둘째,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어둡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가 아름답기만 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예수님 탄생 이야기에는 어두운 장면도 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 탄생의 어두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길 원합니다. 그 어두운 현실이 무엇이었을까요? 네 그것은 당시의 권력과 권력자들입니다.
우선, 정치권력자인 헤롯왕이 예수님의 탄생을 원치 않았습니다. 아시다시피 그는 에돔 사람인데 로마에 충성하여 당시 유대를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늘 자신의 자리가 불안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왕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부인과 아들들과 장모를 죽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인물이기에 그는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는 박사들의 말을 들었을 때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2:3) 헤롯은 그 아기가 누구이고 어떤 인물이든 그 싹을 없애야 한다고 즉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박사들을 가만히 불러 그 별이 나타난 때를 물었습니다. 그리고 아기를 찾거든 자신에게 알려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꿈에 계시를 받은 박사들은 헤롯에게 알려주지 않고 돌아갔습니다. 그후 헤롯이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우리는 잘 압니다. 분노한 헤롯은 베들레헴으로 군사를 보내 2살 아래의 아기들을 다 죽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슬프고 비통한 현실 가운데 탄생하셨습니다.
잔인한 헤롯이야 더 말할 가치가 없지만, 그러나 당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도 악하긴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탄생할 장소를 알고도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왜 안 갔을까요? 동방에서 온 박사들의 말이 믿을만하지 못해서일까요? 아닙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메시아를 기다리지 않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성경의 예언을 알고 있었지만 메시아와 하나님의 뜻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헤롯과 마찬가지로 권력과 정치와 자신들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을 이용하여 유대 백성들 위에 자신들의 지위와 권력을 계속 잘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실 메시아의 탄생은 오히려 그들에게 염려와 방해거리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메시아 탄생이 비록 사실이어도 철저히 무시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헤롯은 죽이려하고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철저히 외면하고... 예수님은 이와 같은 어둡고 차가운 현실 속에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마태복음의 예수 탄생 이야기가 왜 이렇게 어둡고 차가울까요? 그 이유는 그분의 생애 및 목적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구원과 빛을 주시지만, 그것은 세상의 죄와 어두운 역사를 뚫고 지나가야 가능합니다. 인간의 근본 문제를 드러내고 악과 죄와 싸우고 비진리와 거짓을 폭로하고 종교와 위선을 무너뜨리고... 그렇게 그분은 십자가로 나아가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탄생은 아름답기만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세상의 저항과 거부는 그분의 탄생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셋째,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초자연적입니다.
예수님의 출생과 함께 신비한 별이 나타나고, 그 별이 박사들을 인도하고, 또 그 별은 아기 있는 곳에 머물러섭니다. 또 박사들은 아기를 본 그날 밤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는 계시를 받습니다. 이런 모든 내용은 이 이야기가 초자연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달리 겸손히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와 능력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일부 현대인들은 보이는 현실만 믿지만, 보이는 현실이 다가 아님은 분명합니다. 오히려 현대인들은 그것을 과학을 통해 발견하고 있습니다. 최신 과학은 우리의 상식과 이해를 뛰어넘는 새로운 세계를 계속 발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눈에 보이는 현실로 무엇을 판단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현실 너머의 저 초자연을 제3의 현실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시각으로 오늘 본문을 읽어야 하겠습니다. 특히 마태 당시는 그런 초자연이 일반적이었고, 그래서 우리는 그 시대의 초자연성을 이해하면서 오늘 본문을 보아야 합니다. 
 
고대의 위대한 인물의 탄생 이야기에는 전설 같은 초자연적인 내용이 많이 있죠. 그러나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에 있는 초자연적인 내용은 그런 목적이 아닙니다. 마태는 예수님을 위대한 인물로 만들기 위해 그렇게 쓴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마태는 왜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이렇게 초자연적으로 묘사하였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의 탄생은 우주적인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탄생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위대한 구원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에는 그런 초자연적인 모습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신성을 가지고 태어나셨고 그렇게 사셨고 그렇게 죽음과 부활을 하셨습니다.

이상으로 우리는 마태복음의 예수 탄생 이야기에 들어있는 세 가지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아름답고 어둡고 신비한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이와 같은 탄생은 그분의 생애로 그대로 이어집니다. 아름답고 어둡고 초자연적인 예수님... 그분의 삶은 하나님의 뜻으로 아름답고 십자가로 어둡고 부활로 신비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우리가 깨달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이와 같은 그분의 탄생과 생애의 모습은 그분의 모습으로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을 따르는 우리들의 모습도 그렇게 만들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믿는 자들의 삶과 신앙도 아름답고 어둡고 초자연적입니다. 그분을 믿기에 아름답죠. 그분을 믿기에 어둡습니다. 그분을 믿기에 초자연적입니다. 동일하게 우리에게도 그런 모습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 인생의 일반적인 희노애락이 아닌, 그분과의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그런 영적인 모습과 이야기들입니다.
인생이니까 아름답고 인생이니까 어둡고 인생이니까 신기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때문에 아름답고, 하나님 때문에 어둡고, 하나님 때문에 신비합니다. 
그래서 이 마태복음의 예수 탄생 이야기는 예수님을 위한 이야기로 그치지 않고, 우리들을 위한 영원한 이야기도 됩니다.

2,000년 전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이 뜻깊은 성탄절에
아무쪼록 마태가 기록한 이 아름답고 어둡고 초자연적인 예수님의 탄생과 삶의 이야기가, 바로 여러분의 이야기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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