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말씀에서 뜻으로

믿음찬교회 0 76 2021.12.22 16:43
말씀에서 뜻으로
마 19:1~12
2021.12.19.

마태복음은 지금까지 긴 말씀을 해왔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그분의 족보와 특별한 탄생과 세례요한의 등장으로 제시했고, 이어서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산상수훈과 갈릴리 사역과 유대 종교지도자들과의 갈등과 백성 및 제자들에 대한 많은 말씀을 소개했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마태복음을 보면서 마태복음이 어떤 길과 산을 넘어 여기까지 왔는지 대략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 마태복음은 어디쯤에 와 있을까요? 지금 마태복음은 이제 예루살렘을  저 멀리 앞에 두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과 말씀을 마침내 완성하시게 됩니다. 그 내용은 21장부터 시작되죠.
그렇다면 그 중요한 내용을 앞둔, 오늘 본문이 속한 19장과 20장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 두 장에는 결혼과 이혼, 부자 청년, 포도원 품꾼 비유, 으뜸이 되는 것, 그리고 여리고 소경 등 5가지 말씀과 사건이 나옵니다. 이 5가지 말씀과 사건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일어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사건들이 단지 그때 거기서 일어났기 때문에 기록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한 가지 공통 목적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마태는 마태복음을 그저 연대기식으로 나열식으로 기록하지 않습니다. 마태는 한 가지 공통 목적을 가지고 이 5가지 사건과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19장과 20장의 5가지 말씀과 사건의 공통 목적은 무엇일까요?
네, 그것은 제자들에 대한 재교육입니다. 예수님은 지금까지 제자들을 가르치셨지만, 아직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과 생각과 이해가 부족합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은 곧 다가오고 예수님에겐 시간이 없습니다. 예루살렘에서는 대적들이 기다리고 있고 예수님은 거기서 마지막 1주일을 보내시고 십자가에 달리시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길에서 제자들을 마지막으로 가르치고 계시고, 그래서 마태는 그것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5가지 내용을 바로 그런 의미로 보아야 하겠습니다. 제자들의 부족한 부분을 다시 교육하시는 예수님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그런 예수님의 재교육의 첫 번째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드디어 유대 지경으로 들어가셨다고 말씀합니다. 큰 무리가 따랐고, 예수님은 갈릴리에서처럼 그들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때 바리새인들이 나아와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제기한 시험은 이혼 문제였습니다.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이 문제가 왜 시험이 되느냐 하면, 이전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마5:31~32)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예수님의 발언을 문제 삼아, 그렇다면 그것은 이혼증서를 통해 이혼을 허용한 모세의 율법을 어기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지금 예수님을 공격합니다.
당시 유대 남자들은 이혼을 많이 했습니다. 그들은 이혼을 허용한 모세 율법을 이용하여 마음대로 이혼을 하고 별다른 죄책감을 갖지 않았습니다.
왜? 모세 율법이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시켜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혼을 당한 부인의 힘겨운 삶과 눈물도, 엄마를 잃은 아이들의 고통과 슬픔도... 유대 남자들의 양심에 아무런 죄의식을 갖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준수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문제를 그렇게 보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행동은 당연히 악하고, 하나님의 뜻을 명백히 어기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결혼의 목적과 의미를 명백히 깨뜨리는 사유 외에는 이혼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혼을 정당화하고 있는 모세의 율법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이니까 모세의 율법 정도는 쉽게 무시하면 될까요? 그러나 모세의 율법은 말 그대로 모세의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율법이죠.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혼을 가능하다고 말하는 하나님의 율법을 바르게 설명하셔야 했습니다. 
네, 어려운 문제이죠. 그런데 사실 우리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이미 잘 알고 있고 자주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말과 뜻이 달라서 문제가 생기면 주로 이렇게 말하죠. “그건 그런 뜻이 아니고...” 물론 이것을 변명의 의미로 자주 사용하면 안되지만, 아무튼 말과 뜻이 다를 때 우리는 그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지금 예수님께서 4절 이하 설명하시는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혼에 대한 모세의 규정이 있지만, 하나님의 본래 뜻은 그런 것이 아니다...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한 몸이 되는 것이고 그것은 모세 율법 이전 창세기 말씀에 있다... 그러면 이혼을 허용한 모세 율법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현실에서 어긋나는 불가피한 상황에서 주신 말씀이다... 그런 불가피한 상황에서 주신 제한적인 말씀을 일반적인 말씀으로 받아들이면 안된다...’ 
네, 이와 같은 예수님의 설명이 잘 이해되시리라 믿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결혼과 이혼을 설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좀 더 깊이 생각해야 할 내용은 예수님께서 이 설명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을 구분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오늘 사건과 같은 경우에 는,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이 그대로 일치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부모를 떠나 둘이 한 몸이 되는 것을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으로 설명하시고, 이혼증서를 통해 이혼을 허용하는 것을 우리의 현실에 맞추어 주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설명하십니다. 그러므로 궁극적인 하나님의 뜻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개별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말씀이 표면적으로 서로 어긋날 때 바르게 이해하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잘 이해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인간에게 문자와 언어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로 완전한 것이 되기 어렵습니다. 우리의 문자와 언어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담기에는 부족한 도구입니다. 하나님의 세계와 우리의 세계는 큰 격차가 있고, 문자와 언어는 우리의 세계에 속한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자와 언어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받되, 그것을 통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선하시고 거룩하신 뜻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뜻으로 나아가는 것이 곧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와 관련 잘 알려진 유명한 비유가 있죠. 바로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입니다. 손가락은 달을 가리키고, 우리는 그 손가락을 통해 달을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보면, 그것은 완전히 잘못된 방법론이 되고 맙니다.
율법만 보고 말씀만 보고... 그래서 그것만 보면서 나의 잘못된 행위를 정당화하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어긴다면, 우리는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보는 악하고 어리석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율법을 잘 아는 분이시지만, 말씀과 율법에 머무르지 않고 그 위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더 잘 아는 분이십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음행 중에 잡혀온 여인이 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 여인을 예수님 앞으로 끌고 왔습니다. 남자는 도망가 버렸는지 놓쳤는지 없고, 여자만 잡아왔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예수님께 이 여인을 어떻게 해야하는지 물었습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네, 율법에 의하면 돌로 쳐야 하죠. 무슨 사정이 있었고 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음행은 사실이고 그 여인은 처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여인을 향해 하나님의 문자적인 말씀과 율법을 그대로 적용하시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적용하셨습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그렇게 하신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 믿습니다. 고의로 음행을 하고 계속해서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하나님의 문자적인 말씀과 율법을 넘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추구하시는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이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재교육 첫 번째 내용입니다. 제자들은 이 내용을 잘 이해하고 앞으로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내용처럼 우리도 말씀과 율법만 보고 거기에 매여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그런 잘못과 실수를 하지 않아야 합니다.
구약에서도 이와 같은 사례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할 때 제사장들만이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먹은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 율법에 어긋난 일이죠. 그러나 그것은 그때 다윗과 같이 위급하고 절박한 상황에서 사람의 목숨을 더 귀히 여기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으로 볼 때, 허용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 일이 나중에 문제가 되거나 다윗이 처벌을 받았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신앙생활할 때, 이 내용을 잘 유념해야 합니다. 믿는 분들 중에는 믿음이 좋은 것처럼 “성경, 성경, 말씀, 말씀!” 하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그르치는 분들이 있습니다. 성경을 잘 알아서, 어떤 말씀이 어느 성경 몇 장 몇 절에 있는지 외우지만, 그러나 가만히 삶의 열매를 보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르는 생활이 없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올바른 십일조를 바치기 위해 세금 떼기 전의 십일조가 맞나 세금 뗀 후의 십일조가 맞나... 그렇게까지 말하면서 교회를 버젓이 세습하거나 어려운 사람에게 인색하거나 다른 사람을 잘 용서해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기를 정당화하고 자기 이익을 도모하지만,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입으로는 ‘말씀 말씀’ 하지만 우리 삶이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 믿는 분들 중에 이렇게 말씀에서 뜻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랑, 용서, 자비, 선함, 신실함, 깨끗함, 공평과 정의...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이죠. 우리가 아무리 예수님을 믿어도 우리 안에 이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런 분은 말씀에서 뜻으로 나아가지 못한 분이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시고 들으시고 배우셔서 그것을 뜻으로 만드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마음과 생각 안에 하나님의 뜻이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전에 저는 신학공부를 할 때, 특히 성경말씀에 대한 열의가 컸습니다. 설교를 잘 하는 목사가 되고 싶은 마음은 많이 없었지만, 성경말씀을 잘 알고 잘 말해주는 목사는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특이한 것을 2가지 했는데, 하나는 성경을 각 권별로 요약하는 일이었습니다. A4 용지를 6등분으로 나누어 거기에 1장씩 성경을 요약했습니다. 그러면 A4 1장에 성경 6장 요약이 들어갑니다. 어느 분이 그렇게 성경을 요약하여 머리 속에 넣으면 성경을 환하게 알 수 있다고 해서... 그래서 신약 전체를 그렇게 요약했습니다. 신약을 다하고 구약 예언서 몇 권도 그렇게 했죠. 
그러다가 신학을 하고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알게 된 후로는 성경을 원어로 보는 것에 한동안 빠졌습니다. 그래서 노트 성경을 사다가 원어로 성경을 보면서, 지금 우리말 번역과 비교하고 노트와 메모를 했습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죠. 지금도 원어를 잘 참고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한동안 열의를 쏟았던 성경요약을 그만두고 원어번역을 그만 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성경말씀을 파고 들고 성경원어를 파고 들고...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는 것이 없고 밝히 알아도... 놀랍게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은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것을 깨달았죠.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고 정확하게 아는 것이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고 정확하게 안다고 내가 하나님을 볼 수 있거나 영의 세계가 열리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박사 학위를 받고 성경원어 연구를 10년 정도 하신 어떤 분의 얘기도 그렇습니다. 성경말씀 하나 하나 단어 하나 하나를 다 분해하고 의미를 밝히고 그렇게 그 긴 시간을 보냈지만, 어느날 문득 거기에 하나님이 안 계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은 어디 있는 것인가?
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모르고 잘 이해 못하고 그저 부족하게 아는 말씀이라도, 그래서 그것이 비록 아주 작은 말씀이라도, 그 말씀이 내 안에 들어와 자리를 잡고 내 마음과 내 생각 속에 의미가 되고 뜻이 될 때, 하나님이 거기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내 안의 그 뜻이 내 현실에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교회 속에서 실천되고 적용될 때, 하나님이 거기 계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말씀은 말씀으로 머물러선 안 되고 우리 안에서 뜻이 되어야 합니다. 뜻이 되고 정신이 되고 방향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뜻과 정신과 방향은 우리 현실에서 실천되고 우리를 실제로 이끌어가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거기 계십니다. 우리는 그때 임마누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이번 주에 우리는 성탄절을 맞이합니다. 성탄의 기쁨은 임마누엘, 즉 그 귀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놀라운 기쁨이죠.
그런데 지금 우리는 성탄절을 해마다 기념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그 실제적인 기쁨을 어쩐지 잘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멋진 장식을 하고 성탄 찬양을 부르고 특별한 예배를 드리지만, 어쩐지 우리 마음 속엔 허전한 마음이 많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멋진 특별한 예배를 드리고 우리가 아무리 많은 말씀을 들어도, 만약 말씀이 우리 안에 머무르지 못하고 스치기만 하면, 우리 심령은 늘 허전하고 공허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하면 이 허전함을 하나님의 그 귀하신 임재로 가득 채울 수 있을까요?
네, 성경 말씀이 우리 안에 그분의 뜻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뜻은 실천되어야 합니다. 성냥팔이 소녀 같은 어려운 이웃에게 베푸는 작은 사랑과 배려 속에, 어렵고 힘들어도 정의로운 길을 택하는 고민과 결단 속에, 악하고 거친 세상 속에 소금과 빛으로 살려는 아름다운 마음 속에, 나보다 다른 사람을 높이는 겸손하고 낮은 모습 속에,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고 안아주는 나의 손과 팔에, 거기에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충만케 됩니다. 

2,000년 전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친히 하나님의 말씀이 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말씀을 받아 그저 여기에 머무르려고 합니다. 그 말씀을 가지고 여기에 성전을 만들고 여기에서 우리의 욕심을 채우고 여기에서 우리 자리를 보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가장 잘못 믿는 실수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이유는 우리를 그 나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우리는 그곳으로 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분을 따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이 계신 곳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 뜻이 될 때, 그 뜻이 우리 현실에 실천이 될 때, 우리가 그런 심령과 그런 삶을 소유할 때,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는 거기서 충만케 될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이 있는 그곳으로, 항상 나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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