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요한계시록의 기도 2

믿음찬교회 0 91 2021.12.01 13:49
요한계시록의 기도 2
계 6:9~11
2021.11.26.

지난 주에 우리는 기도는 중요하지만 기도를 너무 절대시하지 말자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요한계시록의 기도 두 번째 시간으로 기도 시간을 너무 절대시하지 말자는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기도 시간을 너무 절대시 하지 말고, 기도 시간의 길고 짧음에 너무 매이지 말자입니다.
그런데 오늘 설교를 할까 말까 그냥 넘어갈까... 제가 조금 고민을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혹 오해하시면 어쩌나 그런 생각을 해서입니다. 
목회를 하는 목사로서, 신앙을 북돋우는 목사로서 말하기 어려운 몇 가지 내용이 있죠. 그 중에 하나가 기도에 있어서의 자유함입니다.
대체로 기도에 대해 목사님들이 하는 말은 일정합니다. “기도에 힘쓰고 기도를 많이 하라...” 저는 기도를 적절히 하라고 말씀하거나 가르치는 목사님은 거의 만나 보지 못했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고 기도를 열심히 하자는 목사를 반대할 교인은 없습니다. 기도를 강조하고 기도를 열심히 하는 목사는 영적인 목사로 인정 받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지금 조금 오해를 살 수도 있는 말씀을 여러분에게 드리는 것 같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시는 것이 물론 좋지만, 기도에 자유하시고 자기 형편과 특성에 맞게 하시고 꼭 기도를 오래 하려고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런 말씀을 여러분에게 드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세계 어느 나라와 비교를 해도, 한국교회는 기도에 대한 열정과 기도를 신앙의 최우선으로 여기는 큰 특징이 있습니다. 기도에 대한 가르침도 많고 기도 종류도 많습니다. 새벽기도, 작정기도, 중보기도, 금식기도, 철야기도, 치유기도, 명령기도, 안수기도, 강청기도 등을 말하고, 여기에 방언기도, 예언기도, 관상기도 등도 추가됩니다. 
기도를 강조하는 어느 목사님은 사역자이건 평신도이건 하루에 1시간 기도는 기본이고, 사실 1시간 기도해가지고는 기도 입구에도 못 들어간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로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여야 한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기도에 대한 강조는 나쁜 것이 아니지만, 그러나 무엇이든 과한 것은 좋은 것이 아니고 부작용도 생기게 됩니다. 예를 들어 신자들은 기도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는 무언의 느낌을 받습니다. 또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이 하나님과 가깝고 하나님의 뜻을 잘 안다는 무언의 분위기도 만들어집니다. 또 반대로 기도를 많이 하지 않으면 부족한 신앙이고 문제가 있는 신앙이고 잘못된 신앙이라는 시선도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은 현실적으로 결국 목회자일 수밖에 없고, 따라서 그런 교회는 대체로 목회자가 카리스마와 전권을 가지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문제 가지고 나보다 기도 많이 했어요?” 라고 말하면 반대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성장하는 교회들이 이렇게 기도를 강조하고 기도를 목회 전략으로 삼으며 한국교회 성장을 주도했습니다.

그러나 말씀 드린 것처럼 이상하게도 이렇게 기도를 많이 하는 한국교회가 근래들어 급격히 힘을 잃고 세속화되고 분별력도 흐려지고 이기적인 집단으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한 마디로 ‘별로’라고 생각합니다. 전에는 교회를 그래도 존중하고 거룩한 곳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저는 기도와 우리 신앙의 관계, 기도와 한국 교회의 관계가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인지 의문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한국교회가 기도에 대해 잘못 생각하는 있고, 그것을 고쳐야 한다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기도에 대해 잘못 생각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첫째, 기도를 신앙이나 목회의 만능 열쇠로 지나치게 생각하는 것
둘째, 기도를 수단과 도구로 삼아 내 소원이나 내 사역을 성취하려고 하는 것
셋째, 기도를 오래하면 하나님이 무조건 좋아하신다고 생각하는 것
그래서 기도를 신앙이나 목회의 만능 열쇠로 생각하니까 목회자와 교회가 성경을 소홀히 하고 대충 보게 됩니다. 성경은 참고만 할 뿐, 기도가 핵심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꾸 우리의 기도는 도구가 되고 수단이 됩니다. 하나님을 설득하고 하나님을 움직이고 내 뜻을 관철시키고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도구와 수단이 되죠. 그리고 그렇거나 말거나 내용 불문하고 기도 오래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나는 영적인 사람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따라 한국교회는 기도를 많이 하긴 하지만, 신앙이 나아지지 못하고 성숙해지지 못하고 거룩해지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가 아니라, 내 목적과 내 소원과 내 바램으로 가득찬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 한국교회가 기도에 있어 개혁이 필요하다고 믿습니다. 기도를 새로 배워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제가 찾은 답이 ‘균형’입니다. 말씀과 기도의 균형, 삶과 기도의 균형... 그런 균형있는 기도를 추구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기도를 오래하는 것보다, 기도로 크게 부르짖는 것보다, 방언기도를 하고 예언기도를 하는 것보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고 기도를 하고, 또 진실한 기도를 하고 그렇게 진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마지막 때에는 말씀이 혼잡하게 되고 말씀에 다른 무언가가 섞인다고 성경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지금 너무 어렵고 복잡하고 혼잡잡스럽습니다. 기도 방법도 너무 많고 기도 종류도 너무 많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가급적 정화하고 성경이 말씀하고 예수님이 가르친 순수한 기도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물론 지금은 한국교회가 상당히 많이 약화되어서, 기도에 대한 강조를 오히려 많이 해야할 때입니다. 요즘은 교회마다 예배도 모임도 기도회도 다 약해져서, 가급적 기도를 많이 하고 기도에 힘쓰라고 권면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상황이 어렵다하더라도, 무조건 기도 많이 하고 무조건 기도를 강조하는 옛날 방식으로 돌아가야 할까요? 우리는 오히려 이 때에 기도에 대한 올바른 방향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기도의 양을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순교자와 고난의 수가 차야한다는 말씀을 하셨지. 너희들의 기도의 분량이 차야한다는 말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말씀이 기도의 분량이 차야한다는 식으로 많이 퍼져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ccm 찬양 중에 ‘금 향로가 차기까지’ 라는 찬양도 있습니다. 금 향로가 차기까지 기도하자는 그런 찬양입니다. 
물론 올바른 기도를 많이 한다면 그것만큼 좋은 일은 없습니다. 저도 그러기를 바라고 그러기를 소망합니다. 새벽기도가 얼마나 좋습니까? 매일 새벽 기도를 하면 얼마나 매일 매일 영적인 힘이 나는지 모릅니다. 금요철야기도도 좋고 금식기도도 좋습니다. 개인기도를 깊이 길게 기도하면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와 위로와 은혜가 넘칩니다. 그러므로 할 수 있다면 길게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기도만을 절대시하는 것이 올바른 신앙을 왜곡하는 것처럼, 기도 시간만을 절대시하는 것도 올바른 기도를 왜곡합니다. 길게 해야만 좋은 기도이고, 길게 해야만 기도의 능력이나 경건의 능력이 임한다는 것은 편견입니다.
예수님은 매일 밤이 맞도록 길게 기도하셨나요? 예수님은 매일 새벽 미명에 일어나 항상 기도하셨나요? 그러나 예수님은 길게 기도하실 때는 길게 하셨고, 짧게 기도하실 때는 짧게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상황에 맞게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 기도는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한 수단이었지, 자신의 뜻을 성취하는 수단이거나 기도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기도에 있어 예수님은 굉장히 자연스럽고 자유스러운 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기도가 한나의 기도처럼 깊어져서 자연스럽게 길어지면 좋은 것이죠. 한나는 마음이 괴로워서 하나님의 전에서 오래도록 울며 기도했습니다. 한나가 얼마나 몰입해서 기도했던지 엘리 제사장은 그녀가 취한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런 기도는 정말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한나의 기도는 하나님의 큰 역사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그 기도를 통해 사무엘 선지자가 태어나고,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다윗 왕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할 내용이 많고, 기도할 이유가 많고, 기도할 마음이 벅차오르고, 또 기도하는 가운데 깊이 기도가 되어서 기도를 오래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단지 기도를 오래해야 한다는 생각에 기도를 오래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 신앙에 자유와 자발성을 해치고 오히려 잘못된 굴레와 생각을 만듭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예수님이 가르친 기도 중 하나는 ‘중언부언하지 말라’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 시대의 잘못된 기도 관행을 고치시는 말씀입니다.
당시 잘못된 기도 관행이 무엇이었을까요?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회당이나 길에서 외식적으로 기도했습니다. 또 많은 유대인들은 이방인과 같이 하나님이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시는 줄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은 오늘날에도 여전합니다. 어떤 분들은 우리가 떼를 쓰고 계속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길게 기도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불필요하게 길게 기도하는 것을 좋지 않다 말씀하시고 그 대신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주기도문을 보시면, 굉장히 깊은 내용과 군더더기 없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기도를 많이 하면 능력이 임한다고 생각해서 기도를 길게 합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일종의 편견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성령의 능력인데, 그러나 성령의 능력은 우리의 기도의 양에 따라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나 성령님은 인격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그 능력을 그분의 뜻과 우리의 필요에 따라 주시게 됩니다. 하나님은 능력을 주시거나 역사하실 때, 단 한 번 엘리야의 기도에도 응답하셨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면 능력을 받는다는 생각은 맞을까요?
사실 기도란 것은 기독교만의 것이 아닌 모든 종교의 것인데, 기도 자체에는 묘한 특성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를 하면 그 기도자에게 확신이 생기고 자신의 자아가 강화되는 현상이 생긴다는 사실입니다. 새벽에 정화수를 떠놓고 기도를 하거나 마을 동구 밖 큰 나무 앞에 가 엎디어 기도를 하면, 마음에 평화가 임하고 믿음이 생깁니다. 이렇게 기도를 하면 우리의 자아가 강화되고 자기 확신과 신념이 강화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기도 자체가 그런 묘한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가 기독교적인 올바른 기도가 되려면, 이런 일반 현상을 극복해야 합니다. 기도를 함으로 내 자아와 내 믿음이 강화되었는지, 아니면 정말 하나님과 성령님의 역사로 내 자아와 내 믿음이 강화되었는지... 구분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힘이 어디에서 왔는지 쉽게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둘 다 능력과 힘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소위 성령의 은사나 기도의 능력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 중엔 거칠고 무례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두 능력을 분별해야 하겠습니다. 그 두 능력의 결정적인 차이는 거룩함과 성숙함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거룩하고 성숙합니다. 그래서 거룩하고 성숙한 능력이 아니라면 그것은 기도 속에 강화된 우리의 인간적인 능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를 잘 해야 하겠습니다.
삶과 기도에 균형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성경적인 기도를 배우고 예수님의 기도를 배워야 하겠습니다. 기도가 자연스러워지고 기도에 자유함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길게 기도하실 때는 길게 기도하시고, 깊이 기도하실 때는 깊이 기도하시고, 짧게 하실 때 짧게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기도는 우리 마음과 생활 전반으로 확대되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기도에 대해 이런 말씀을 하셨죠.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 이것이 기도의 높은 차원입니다. 우리 의식의 흐름이 기도의 흐름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찾고 그렇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늘 생활하는 것입니다. 성전이 무너지고 우리의 모든 공간이 예배의 장소가 될 수 있는 것처럼, 기도도 그렇게 확대되어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당연히 오늘 말씀의 취지는 ‘기도를 소홀히 해도 된다’가 아닙니다. 기도에 좀 더 자유로워지시고 자연스러워지셔서, 기도 따로 생활 따로가 아니라, 범사에 하나님과 소통하는 삶을 지켜나가는 성도님들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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