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교회의 우상숭배 1

믿음찬교회 0 204 2021.09.20 18:55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교회의 우상숭배 1
계 2:12~3:6
2021.09.17.

오늘은 예수님께서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교회에 하신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계속해서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예언적 메시지를 듣고 있습니다. 각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예언적 메시지는 각 교회의 신앙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각 교회는 자기 나름의 신앙을 지키고 있지만, 예수님은 그 신앙의 내면을 보시고 어떤 잘못과 부족함이 있는지 말씀해주십니다.
우리가 앞서 살핀 에베소 교회는 사랑을 잃어버림으로 그들 신앙의 본질에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또 앞으로 살펴볼 라오디게아 교회는 부유함으로 인해 그들 신앙의 본질에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 두 교회는 전체적으로 그와 같은 신앙의 본질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우리가 살펴볼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교회는 조금 다릅니다. 이 교회들의 신앙 본질에는 큰 문제가 없습니다. 대체로 하나님을 바르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문제가 교회 일부분에 발생했습니다.
그 문제를 말하자면, 버가모 교회에서는 나타났고, 두아디라 교회에서는 상당히 진행되었고, 사데 교회에서는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래서 그 상황을 말하자면, 버가모 교회는 상황이 염려스럽고, 두아디라 교회는 상황이 심각하고, 사데 교회는 상황이 상당히 심각하다 할 수 있습니다.
이 세 교회에 동일하게 발생한 그 문제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 교회 안에서 발생한 거짓 교훈과 거짓 가르침인데, 그것은 황제숭배를 포함하여 우상숭배를 용인하고 받아들이도록 하는 가르침이었습니다.

당시에 황제숭배를 포함하여 각 지역의 우상 신을 섬기고 숭배하는 일은 거부할 수 없는 시대적 분위기이고 문화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시대에 상업과 무역을 하기 위해서, 또 사회에서 일정한 지위를 갖거나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와 같은 황제숭배 및 이교축제에 동조하고 참여하였습니다.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지역의 상업 및 무역 조합에서의 소외와 탈퇴와 경제적 불이익을 의미했고, 나아가 로마제국의 질서에 반하는 정치적 위험을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경제적 손실과 지역 사회에서의 고립은 물론이고, 정치적으로도 반국가적인 인물이나 범법자로 몰릴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기독교인들은 황제숭배 및 우상숭배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무신론자로 규정되어 처벌 받았습니다. 따라서 믿는 자들에게 있어서 당시 황제숭배 및 우상숭배의 유혹과 압력은 상당히 심각했습니다.
그와 같은 유혹과 압력이 소아시아 도시들 중에서도 버가모가 가장 심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도시는 성경의 표현대로 사탄의 권좌, 즉 사탄의 보좌가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의 보좌가 있는 버가모라는 도시... 그 이유는 버가모가 소아시아 지역에서 황제숭배를 위한 최초의 신전을 지은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그곳엔 이전부터 제우스, 아테나, 디오니소스 등을 위한 신전과 이교적 제의가 어지럽게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아스클레피오스라는 신을 위한 제의가 유명했는데, 그 신은 의술의 신으로 뱀이 감긴 지팡이를 가지고 있고 그 뱀은 버가모의 상징물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버가모는 도시 자체가 많은 신전이 세워진 원뿔 모양의 언덕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그 도시는 우상의 기운이 본질적으로 느껴지는 그런 도시였습니다. 아마 영적으로 약하거나 민감한 분들은 그런 곳에 가면 대번에 그 기운을 느낄 것 같습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요한은 그 도시를 사탄의 보좌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버가모는 우상의 도시이자 황제숭배에 가장 앞장 선 도시였기 때문에, 버가모 교회는 고난과 박해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 한 예로 그 교회 성도 중 한 명인 안디바가 순교를 당했습니다. 아마 안디바 한 명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그의 이름을 말하고 있지만, 여러 성도들이 박해와 순교를 당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버가모 교회는 그런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교회의 그와 같은 신실함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런 버가모 교회였지만 지금 예수님은 그들의 몇 가지 잘못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2:14~15) 

예수님께서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 당의 교훈은 무엇일까요?
아시다시피 발람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을 돈을 받고 저주하려 했던 거짓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발람의 저주를 막으셨죠. 이것은 우리가 잘 아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이야기는 잘 모르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후 발람은 이스라엘을 곤경에 빠뜨릴 계획 하나를 제안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우상 신의 제사에 초대해서 거기서 함께 음식을 먹고 함께 그 음란한 제의에 참여하게 하는 계획이었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을 영적으로 오염시키는 것이죠.
그와 같은 발람의 계획은 성공했고, 이로 인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24,000명이나 죽어야 했습니다. 이 내용은 민수기에 잘 나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발람의 교훈이라는 것은 우상숭배를 용인하는 가르침입니다. 믿는 자들이 황제숭배나 이교축제에 참여하고 그 제물을 먹는 것이 신앙적으로 가능하다는 가르침입니다.
그 가르침의 구체적인 논리가 무엇인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비록 참여하더라도 그것은 애국심이나 사회적 또는 문화적인 일일 뿐 신앙적인 일은 아니라는 단순한 논리에서부터 비록 경배하더라도 내가 진심으로 경배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죄가 되지 않는다는 신학적인 논리까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아무튼 그 이유와 논리가 어떻든, 그것은 믿는 자들이 황제숭배와 우상숭배에  참여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었습니다. 
니골라당의 교훈도 같은 내용으로 추정됩니다. 이 사람들은 초대교회의 일곱 집사 중 하나였던 니골라와는 관련이 없습니다. 그런 연관성은 후대에 나온 추정에 불과합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은 누구인가?
학자들은 니골라라는 말 자체에 그들의 정체를 알 수 있는 단서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래서 니골라라는 말이 ‘승리’를 의미하는 헬라어 ‘니코스’와 ‘사람들’을 의미하는 ‘라오스’가 결합된 말 ‘니코스 라오스’로 보고, 즉 ‘승리의 사람들’이란 의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말은 그들이 로마의 우상숭배적인 사회에 동조하고 참여함으로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이익을 얻어, 소위 ‘성공하고 승리한 자들’이 되는 것에 대한 조롱의 의미인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발람의 교훈이나 니골라당의 교훈은 같은 의미입니다. 버가모 교회 안에는 이 교훈을 따르는 잘못된 신자들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사정은 두아디라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두아디라 교회도 예수님의 각별한 칭찬을 받아서 ‘네 나중 행위가 처음 보다 많다’는 말씀을 들었지만,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용인한 것에 대해 책망을 들었습니다.
이세벨은 시돈 왕 엣바알의 딸로 이스라엘 왕 아합의 아내가 되었는데, 여호와 신앙을 가진 이스라엘 전체를 바알신앙으로 물들이려고 했던 인물입니다. 그러므로 두아디라 교회의 이세벨은 그와 같이 신자들로 하여금 우상숭배를 용인하고 타협하도록 한 여성 인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두아디라 교회의 상황이 버가모 교회의 상황과 조금 다른 점은 이 자칭 선지자 이세벨의 활동이 꽤 오래되었다는 점입니다. “...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2:20) 이 말씀은 이 이세벨이 교회 안에서 상당 시간 활동하며 교인들을 가르치고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24절의 말씀을 고려하면, 아마도 이 이세벨은 ‘나는 하나님의 깊은 것을 가르친다’고 말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아마도 그것은 ‘하나님의 깊은 비밀 또는 깊은 지식이라고 하면서, 만약 네가 진지한 마음으로 하지 않거나 실제로 그 신들을 믿지 않는다면 우상숭배에 참여하거나 그 제물을 먹어도 영적으로 전혀 해롭지 않다’는 가르침인 것 같습니다. 얼마나 매력적이고 듣기 좋은 가르침인지 모릅니다. 당시에는 영적인 차원만 중요하다는 영지주의 가르침이 발생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이세벨의 가르침이 그런 내용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울러 그 가르침은 더 나아가... 오히려 죄를 경험하고 그 특성을 배움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다는 주장까지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이세벨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깊은 것이 아니라 사탄의 깊은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뱀이 하와를 유혹할 때 했던 말과 비슷하죠. 그녀는 그것을 하나님의 깊은 지식이라 말했겠지만, 그것은 신자를 타락시키는 사탄의 깊은 지식이었습니다.
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다음 주에 사데 교회를 마저 살펴보고 이어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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