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제자들이 깨달으니라

믿음찬교회 0 83 2021.09.14 12:03
제자들이 깨달으니라
마 16:1~12
2021.09.12.

칠병이어 사역 이후 예수님은 갈릴리의 유대인 지역으로 이동하셨습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다시 요구합니다. 이런 그들의 요구와 시험은 이미 12장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좀 다른 점은 이런 요구를 하는 자들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서로 썩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유대 종교와 정치와 사회를 이끌어가는 두 주도 세력이기 때문에, 서로 견제하고 맞설 때가 많죠. 그래서 이런 그들이 함께 예수님을 시험하러 왔다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위협이 한층 더 높아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12장에서 대답하셨던 말씀을 다시 하십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예수님은 갈릴리의 2년 동안 많은 표적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 많은 표적에도 불구하고 시험하려는 그들에게 이제 요나의 표적 밖에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죠.
예수님은 그들을 이미 아시기 때문에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요나의 표적을 언급하시고 그들을 떠나시게 됩니다.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가시니라.” 네, 이 말씀은 단순히 그 자리를 떠나신다는 의미를 넘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으로 대표되는 유대교와 유대인들을 떠나신다는 의미입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갈릴리 마지막 장면을 이렇게 담담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끝으로 예수님은 갈릴리를 떠나시고, 이제 예수님은 갈릴리 북쪽으로 가셨다가 드디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여정을 시작하시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갈릴리를 떠나시므로 끝나야 하는 오늘 본문 안에 마태는 한 가지 이야기를 더 합니다. 아직 어떤 갈릴리 이야기가 끝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 내용이 바로 5~12절 말씀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배를 타고 갈릴리를 떠나고 계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에피소드 같은 일이 발생하게 되는데, 마태는 얼핏 에피소드 같은 이 일을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 마지막 내용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일은 처음에 제자들이 여행을 위한 떡을 준비하지 않은 사실에서 출발합니다. 제자들은 떡을 준비하지 않았고 그것을 큰 일이라 생각합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을 보시며 책망하시고 안타까워하십니다. 떡에 마음이 가 있는 제자들과 그런 제자들을 안타까워 하시는 예수님... 이것이 아직 끝나지 않은 갈릴리 이야기입니다. 마태는 이것을 지금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내용을 최초로 말한 사람은 마태가 아닙니다. 갈릴리 2년간의 사역에도 불구하고 깨달음이 없는 제자들의 모습을 처음 기록한 사람은 마가입니다. 마가는 마가복음에서 이 내용을 매우 심도있게 말하고 있습니다.
마가는 그런 제자들의 모습을 말하면서 그 전후로 2개의 치유사건을 배치합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치유하신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벳새다 맹인을 눈 뜨게 하신 사건입니다. 그런데 그 두 치유사건이 여러모로 독특한 치유사건입니다. 말씀으로 한번에 깨끗하게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단계와 과정을 통해 치유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귀 먹고 말 더듬는 자의 귀에 손가락을 넣으시고 또 침을 손에 뱉어 그의 혀에 대시고 또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에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람은 그렇게 치유받았습니다. 예수님이 벳새다 맹인을 치유하신 사건도 비슷합니다. 그의 눈에 침을 뱉으시고 안수하시죠. 그러나 그 맹인은 처음에 잘 보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보이고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봅니다.”라고 말하죠. 그러자 예수님은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고 비로소 그는 밝히 보게 되었습니다.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독특하게 치유하신 이 마가복음의 두 사건이 당시 제자들과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 그런 제자들을 위해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런 치유를 보여주신 것이라 해석합니다. ‘영적 성장과 깨달음은 한 번에 되는 것이 아니다... 너희들의 영적 성장과 깨달음을 위해서, 너희들의 가리어진 눈과 귀와 입을 위해서 여러 단계와 과정과 역사가 필요하다...’ 그 치유사건은 그런 의미를 담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이 최초의 복음서로서 이 주제를 매우 깊이 다루고 있기 때문에, 마태 역시 이 주제를 그냥 넘어갈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도 이 내용을 오늘 본문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2년간의 갈릴리 사역이 마무리 되는 시점에 갈릴리의 대중들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렇다하더라도, 제자들은 달라져 있어야 하죠. 그러나 그들은 하나도 영적으로 나아지지 않은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에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안타까운 마음이 여러차례 드러나고 계십니다.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기억하지 못하느냐... 깨닫지 못하느냐” 모두 3번 말씀하고 계십니다.
떡 안가져온 것을 걱정하고 지금 우리에게 떡이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팔려 예수님께서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가르치시는 말씀을 듣는둥 마는둥 했습니다. 비유로 누룩을 말씀하시는데 머리 속 생각은 현실의 떡으로 가는 것이죠.
네, 그럴 수 있죠. 우리도 가끔 그럴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것을 단순한 문제로 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아직 제자들의 마음과 사고가 현실 중심적이고 현실에 치우쳐있고, 예수님의 영적인 말씀을 잘 듣지 못하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제자들은 현실은 잘 보지만, 영적인 현실은 잘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합니다. 보이지 않는 영적인 현실은 마음과 생각으로 보고 알고 깨달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2년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있지만 아직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잘 생각하지 못하고 잘 깨닫지 못합니다.
사실 갈릴리를 떠나고 있는 지금... 모든 상황은 매우 어둡고 암담합니다. ‘갈릴리 사역은 이런 식으로 결국 끝났는가? 예수님은 앞으로 어떻게 되시는가? 또 자신들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런 문제들이 그들 앞에 있었지만 그들은 지금 떡이 없는 문제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거듭된 책망과 말씀이 있고 나서야, 겨우 제자들은 그 누룩이 떡의 누룩이 아니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잘못된 교훈과 가르침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도 마태는 마가와 달리 이렇게 제자들이 깨달았다는 희망적인 내용으로 갈릴리 사역을 마무리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태는 이런 제자들의 깨달음이 이어져, 이제 다음 본문에서 예수님이 과연 누구이시고 또 예수님이 과연 어떤 길을 가시는지... 이런 한층 차원높은 내용을 제자들이 알게 되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와 같은 오늘 본문을 통해 어떤 교훈과 은혜를 받아야 할까요?
첫째는, 우리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깨달음의 중요성은 누구나 잘 압니다. 공부도 깨달아야 하고 일도 깨달아야 하고 학문도 깨달아야 하고 종교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깨닫는다는 것은 사실 총체적인 앎입니다. 아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것을 생각하고 이해하고 결정하고 행동하고 ... 그 전체가 이루어지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처음에는 무엇을 알아야 하겠죠. 다음에는 그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그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의지를 발휘하고 결정을 내리고, 마지막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 전체가 의식의 흐름이고 사고의 과정이고 깨달음의 모습인데, 잘 깨닫는 사람은 이 흐름과 과정이 자연스럽습니다. 앎에서 행동까지 매끄럽게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실제 우리 삶에서 이 과정은 늘 어려움을 겪습니다. 무엇을 알고 인식하는 것부터 안될 때가 있고, 인식은 했지만 생각을 못할 때가 있고, 생각은 하지만 이해를 못할 때가 있고, 이해는 했지만 의지를 발휘하고 결정을 못할 때가 있고, 마음은 먹었지만 행동을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이 단계 단계가 다 각각 작용합니다. 그래서 이 각각의 과정이 얼마나 막히지 않고 잘 이어지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런 사람은 성숙한 사람이고 또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잘 안 될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무관심과 감정과 걱정과 욕심과 죄와 악 때문에... 이와 같은 마음의 길이 자주 막히고 어지러워집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감정 때문에 우리 내면이 휩쓸려 엉망이 될 때가 많습니다. 사실 따져보면 그리 큰 일이 아닌데, 우리는 오래도록 화를 내고 크게 화를 냅니다. 슬픔이나 괴로움이나 우울함 같은 다른 감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생각하고 이해하여 그 감정에 알맞은 행동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모습이 성숙한 깨닫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익이나 욕심 때문에 내면의 마음의 과정이 멈출 때가 있습니다. 알고 생각하고 다 잘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이익과 욕심 때문에 그 다음 단계인 의지와 결정에서 멈추고 맙니다. 그리고 다르게 선택하고 결정하고 행동합니다. 우리가 그럴 때가 많죠.
우리가 무엇을 잘못하거나 실수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잘못하고 실수했다는 것을 압니다. 그것을 다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인정하고 사과하는 의지적 결정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 경우도 우리 마음은 거기서 멈춘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의식과 사고와 마음이 정상대로 잘 흘러가지 못하고 자주 멈추고 이런 일이 반복되면... 그것이 굳어져 버립니다. 그러면 무엇을 아는 것에서 행동하는 것까지 그 길이 막힙니다. 그 사람은 올바른 내면과 사고의 과정과 마음의 길을 잃어버리게 되죠. 즉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올바른 의식과 사고와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사람이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제자의 요건은 깨달음에 있고,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고 결실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자주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깨닫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그 기도를 진정으로 드린다면, 하나님을 바라 볼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을 먼저 살펴야 합니다.
‘나는 바르게 알고 생각하고 이해하고 그리고 이해한 대로 결정하고 살아가려고 하는가? 나는 그런 마음의 길을 잘 가지고 있는가?’ 우리 자신에게 먼저 물어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기독교는 언제부터인지 이런 물음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깨달음의 중요성과 깨달음에 대한 이해가 없는 종교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신자들도 그저 예수만 믿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과 같이 깨달음이 없으면 제자도 되지 못하고 좋은 땅도 되지 못합니다. 제자가 못되고 좋은 땅이 못되면 천국을 갈 수 있을까요?
아마 어려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지식은 우리에게 들어와 그분의 생각을 만들고 이해를 만들고 의지를 만들고 결국 그분의 선택과 결정과 행동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여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갑니다. 이 땅의 하나님의 나라에 먼저 들어가 마침내 그 날에 하늘의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갑니다.
아무쪼록 하나님께서 우리의 어지러운 마음을 비우시고 깨닫는 마음과 영을 부어주시길 소망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깨달음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되새겼다면,
두번째로 우리는 무엇을 깨달아야 할 것인가... 네, 영적 현실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현실이 있고 영적 현실이 있죠. 현실은 보이지만, 영적 현실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둘 모두 엄연한 현실입니다.
제자들은 보이는 현실에 민감했습니다. 떡을 가져오지 않은 일을 깨닫고 그 문제를 크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적 현실에 더 민감하셨습니다. 떡이 없다는 제자들의 말을 듣고 그것을 왜 그리 걱정하느냐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오병이어와 칠병이어를 말씀하시면서, 우리의 현실은 어려울 수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의 현실을 도우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의 관심이나 걱정이나 예민함이나 초점들을 현실에 지나치게 두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저도 무척 현실주의자이고, 현실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현실을 너무 걱정해서는 안 됩니다. 현실에 너무 우리의 전부를 걸고 살아가는 것은 제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떡이 없을 수 있죠.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떡을 준비하지 못했다하더라도 한 두끼 고생하면 그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떡을 준비하지 못한 현실을 걱정하지 말고, 지금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 영적 현실에 대해 잘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 즉 그들의 잘못된 가르침이 어떤 영적 현실을 만들죠. 그 잘못된 가르침은 사람들을 영적으로 누르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잘못된 신앙초점을 가지게 하고, 외식적인 신앙생활을 하게 합니다. 제자들은 그런 잘못된 영적 현실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모두 그런 영적 현실을 본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고 우상을 숭배하고 지도자들이 백성들의 땅을 빼앗을 때,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내다보았습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면, 영적 현실을 보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우리 가정이 내 자녀가 내 삶이...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세워져 있는지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죠.
우리 자녀가 장성하여 성공하고 돈을 잘 벌고 세상에서 인정받고 살고 있다하더라도 예수님을 모르고 그분과 무관하게 살고 있다면, 우리는 그 자녀의 영적 현실을 걱정해야 합니다. 그가 잘 사는 것 성공한 것 우리 눈에 하나도 안 들어와야 합니다. ‘나는 너 하나도 안 자랑스럽다. 네가 예수님을 잘 믿었으면 좋겠다...’ 하고 볼 때마다 책망해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 가정이 어렵고 힘들고 고생스럽다 하더라도, 우리 가족 모두가 주님을 믿고 주님 안에서 오순도순 거하고 있다면, 비록 남들 눈엔 흥부 가족같이 누추할지라도 우리는 그 영적 현실을 보고 감사하고 평안해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 교회 비록 작고 초라하고 볼 품 없다 하더라도, 이 곳에 하나님의 말씀이 흘러나오고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다면, 우리는 다른 걱정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크고 건물은 화려하지만 그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선명하지 않고 서로 마음 맞지 않고 이런 저런 문제로 복잡하다면, 그 큰 모습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비록 작지만 세상 속에 캄캄한 어둔 골짜기 불밝힌 작은 오두막 같은 교회가 된다면 바랄 것이 없습니다. 사도바울이 말씀한대로 여러분들이 믿음과 지식이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른 성숙한 신자들이 되신다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영적 현실에 더 크게 눈을 떠야 하겠습니다. 좀 어려우면 어떻습니까? 좀 안 되면 어떻습니까? 현실 걱정 너무 많이 하는 것은 믿음 없는 모습입니다. 현실에 너무 민감하고 너무 실망하는 것도 믿음 없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영적 현실을 보고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마르다가 잘못한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마리아를 더 귀하게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밥 한끼 먹는 것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도 밥 한끼 떡 한조각 보다, 영적 현실을 더 귀하게 여기시는 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아직 현실에 머물러 있는 제자들... 안타까우신 예수님...깨닫지 못하는 제자들... 책망하시는 예수님... 이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마태는 이 내용을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의 마지막 이야기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하나님의 말씀과 영적인 현실을 날마다 깨달으며 성장하시길 빕니다. 그런 귀한 들에핀믿음찬교회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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