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하나님의 계명과 사람의 계명

믿음찬교회 0 127 2021.08.24 13:16
하나님의 계명과 사람의 계명
마 15:1~9(20)
2021.08.22.

어떻게 보면 오늘 사건은 사소한 분쟁 같아 보입니다.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손을 씻는 규례... 이것은 정결 규례로 구전 율법의 하나입니다. 대다수 가난한 유대백성들은 이런 규례들이 너무 많기도 하고 또 살아가기에도 빠듯해서 잘 지키지 못했습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죠.
그래서 이 일은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 문제인데, 그러나 오늘 본문은 이 일이 예수님과 바리새인 서기관들 사이에 정식 논쟁이 되고 심각한 결과를 낳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선 이 문제 제기를 한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바리새인 서기관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당국이 공식적으로 보낸 사람들이죠. 일종의 조사관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을 한동안 관찰하다가 지금 정식으로 문제 제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결국 문제 삼는 것은 단순히 손을 씻는 행위가 아니라, 장로들의 전통 즉 그들의 구전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이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결국 죽으시게 된 이유가 바로 이것, 구전 율법을 지키지 않아서입니다. 비록 산헤드린 재판에서 신성모독 죄로 사형 판결을 받았지만, 그것은 직접적인 이유일뿐 근본적인 이유는 예수님이 구전 율법을 부정하고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그들의 문제 제기에 대해 예수님은 이제까지와는 좀 다르게 반응하셨습니다.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죠. 안식일에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먹은 일... 그런데 그때에는 예수님께서 그들의 안식일 구전 율법 자체에 대해 비판하시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안식일에 그런 일이 허용될 수 있다는 사실과 안식일의 근본 취지를 말씀하시고 넘어가셨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좀 다릅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구전 율법 자체에 대해 정면으로 비판을 하십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 그러신후 예수님은 그들의 가장 아픈 곳이라고 할까요... 그들의 가장 모순된 실제 예 하나를 지적하십니다. 바로 고르반이라는 구전 율법이죠. 이것은 어떤 것을 하나님께 바쳤다고 선언하는 것인데, 그들은 이 제도와 전통을 악용하여 오히려 부모를 공경하라는 본래의 율법을 어기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여기 있는 땅과 과수원을 고르반이라고 선언하여 하나님께 바치고, 그것을 핑계로 부모님을 공양하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그 소산의 일부만 하나님께 바치는 시늉을 하고, 그 땅과 소득은 여전히 자신이 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의 악한 모습을 지적하셨죠. 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바리새인 서기관들의 표정이 어땠을까요? 아마 굉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12절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이렇게 말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걸림이 된 줄 아시나이까?”
그들은 어떤 면에서 모세의 성문율법보다 그들의 구전율법을 실생활에서 더 강조하고 중요하게 가르쳐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은 너희의 전통과 계명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무너뜨리는 일이라고 비판하셨습니다.
이제 그들은 이것을 예루살렘 성전당국에 보고하겠죠. 예수는 구전 율법과 전통을 부정하고 우리의 정통성 마저 위협하는 위험인물이라고 말이죠. 이렇게 예수님과 성전당국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이 마무리되게 됩니다. 오병이어 사건을 정점으로 대중들도 예수님에게 등을 돌리고, 이 논쟁으로 성전 당국과도 완전히 적대적인 관계가 되고... 그러면 이제 예수님에겐 무엇이 남았을까요?
예수님에겐 십자가의 길 하나만 오롯이 남게 되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참 쓸쓸하셨을 것 같습니다. 2년 동안 그렇게 사람들을 위해 사역했는데... 몇 명의 제자들 외에 남는 것이 없고 십자가의 길만 남았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을 예수님은 다 아셨을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에 대한 이해는 이 정도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이와 같은 오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 즉 예수님께서 그들을 비판하셨던 말씀을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바로 이 말씀이죠.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
우리가 이 말씀을 생각해 보아야 하는 이유는 이 말씀이 오늘의 우리와 교회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정통을 말할 때, 거기엔 2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성경적 정통이고, 다른 하나는 교회적 정통입니다. 성경적 정통은 성경말씀과 그것에 대한 바른 해석을 말합니다. 그리고 교회적 정통은 교회의 가르침과 교리와 신학과 체계와 제도등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두 정통이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고, 어긋날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으로 또 현실의 한계로 본의 아니게 어긋날 때가 있죠. 그럴 때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뜻은 사람을 종과 노예로 삼지 않는 것이지만, 그것은 중세를 지나 19세기에 들어서야 현실화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게서 모든 음식은 깨끗하고 거룩하다는 말씀을 들었지만, 그가 실제로 그렇게 생각을 바꾸게 된 것은 욥바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보자기 환상을 본 이후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성경적 정통과 교회적 정통이 본의 아니게 어긋날 수 있는데, 이런 경우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무지와 죄악으로 성경적 정통과 교회적 정통이 심각하게 어긋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가 그랬고,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 당시가 그랬습니다. 그럴 때는 그것을 개혁하고 바로잡아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우리도 성경적 정통과 교회적 정통이 서로 어긋나는 부분은 없는지 주의해야 합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것과 교회가 말하는 것이 다른 것은 없는지...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데 교회나 신학이나 목회자는 저렇게 말하고 있는 것은 없는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성경과 어긋나는 그것들은 바로 사람의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 교회 안에 혹시 그런 사람의 계명이나 전통 같은 것은 없을까요? 네, 물론 있습니다.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고 심각한 것도 있고 덜 심각한 것도 있습니다. 그중에서 덜 중요한 작은 것들을 우리가 크게 생각할 필요는 없겠죠. 모든 것을 너무 비판적으로 생각하지는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크게 어긋나는 부분에 대해서는 반드시 분별하고 고쳐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그런 문제에는 뭐가 있을까요? 네, 좀 작은 내용에 대해서는 제가 늘 설교 때마다 조금씩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신비주의 성령론이라든지, 무분별한 은사주의라든지, 기도에 대한 무조건적인 강조라든지, 교회의 사명과 지상명령을 전도와 선교로만 말한다든지, 성숙이 없는 교회성장주의라든지, 하나님에 대한 헌신과 개인 삶의 불균형이라든지, 종말을 통과하려면 우리 신앙에 뭔가 다른 것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그릇된 종말론이라든지... 이런 내용에 대해서는 성경적인 올바른 신앙을 위해 우리가 계속 관심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좀 구체적인 작은 문제 말고, 오늘날 교회가 가르치는 내용 중에 사람의 계명에 해당하는 좀 중요한 문제에 대해 2가지만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는 우리의 구원에 있어 믿음만을 강조하고 선한 삶과 행위를 배제하는 가르침입니다.
성경은 항상 우리의 구원을 말할 때, 믿음과 행위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항상 믿음과 행위에 긴장과 균형이 있죠. 이것이 성경의 정통적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일부 신학과 목회자와 교회에서는 믿음만을 강조하고 선한 삶과 행위를 그리  중요하지 않게 말합니다. 물론 드러내놓고 삶과 행위가 필요없다고 하지는 않죠. 그러나 선한 삶과 행위를 강조하면 그것을 행위주의라고 비판하고, 그러면서 우리는 아무 공로 없이 오직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받는다고 말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의 진정한 의미라고 말합니다. 구원은 값 없이 아무 공로 없이 받는 것이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구원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대속 신앙을 말하고 칼빈의 예정론을 말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다 대속하셨으니 우리는 단지 그것을 믿기만 하면 되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창세 전에 예정하셨으니 그대로 이루어지고, 구원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이루시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성경의 한 면만을 보는 내용입니다. 그런 내용이 주로 바울서신에 많이 나와 있죠. 그러나 우리의 선한 삶과 행위를 강조하는 마태복음과 야고보서와 히브리서와 요한계시록 같은 말씀은 잘 보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런 분들은 왜 그렇게 구원에 있어서 우리의 수고나 행위는 필요치 않다고 말할까요? 첫째는 그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좋아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그렇게 해서 구원은 쉽게 주고 대신 다른 것을 요구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구원은 하나님이 다 행하시는 일이라고 강조하는 교회나 목회자들이 단지 그것만 말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런 곳일수록 더 많은 헌신과 헌물을 요구하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우리는 그런 가르침을 주의해야 합니다.

저는 어릴적부터 다닌 교회가 장로교회였기 때문에, 유독 예정론이라든지 칼빈이라든지... 그런 이야기를 자주 들었습니다. 칼빈의 예정론이라 하면 어떤 절대적인 말씀처럼 들렸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셨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도 우리는 결국 구원을 받는다는 뜻으로 배웠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만으로 말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성경은 구원을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우리가 순종하고 기꺼이 따를 때, 그때 이루어진다고 거듭 거듭 말씀합니다. 
그래서 제가 목사로서 지금까지 정리한 구원에 대한 최고의 이해 모델은 길입니다. 구원은 길을 걷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죠. 그런데 우리 또한 스스로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은 이루어집니다.
예정론만 믿고 대속신앙만 믿고 달콤한 말씀만 믿고 내가 그 길을 걸을 생각 안하고 가만히 있으면, 구원은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가만히 앉아있는 우리를 달랑 들어서 천국에 넣어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시고 이해하시고 그렇게 살려고 삶 속에서 자기 자리에서 노력하시고 교회생활도 성실하게 하시고... 그래야 우리는 구원의 길을 걷게 됩니다. 예수의 피만 있으면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해주시고 그저 나는 교회만 왔다갔다 하면 되지... 그런 생각 하시면, 세상과 마귀가 여러분을 그냥 두지 않습니다. 마귀가 와서 역사하고 세상이 와서 역사하고 우리 욕심이 와서 역사하고... 결국 우리를 넘어뜨리고 그 길에서 이탈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구원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지만 그 걸음은 내가 걷는 것입니다. 행동하고 결정하고 의지를 드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올바른 믿음이고, 그런 구원의 길을 함께 잘 걸으려고 교회 공동체가 있습니다.
아무쪼록 구원의 길을 걸어가시고 계속 자라가시길 바랍니다. 점점 더 선하고 의로운 인격이 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되시길 바랍니다.

사람의 계명이라 할 수 있는 두 번째 내용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축복과 능력과 승리와 성공, 즉 물질주의로 변질시키는 가르침입니다.
축복과 능력과 승리와 성공은 누구나 좋아합니다. 이것들은 음식으로 말하자면 달콤한 것인데, 물론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교회가 이것을 너무 자주 말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라는 이름으로 교회는 이것을 신자들에게 너무 많이 주고 있습니다.
어떤 교단의 총회장까지 지내신 한 목사님이 은퇴 후, 목사님들이 모인 자리에서 설교를 하면서 이렇게 자신의 목회를 평가했습니다. 지금 되돌아보니, 자신이 목회할 때 신자들에게 너무 설탕물을 많이 주었다는 것입니다. 늘 축복, 승리, 능력, 성공... 그런 말을 많이 했는데 성도들이 좋아하고 자신의 목회도 잘 되고 은퇴도 잘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하나님 앞에서 다시 돌아보니, 그것이 과연 목회자로서 바람직한 것이었는지 반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교회 고 옥한흠 목사님도 그런 말씀을 한 적이 있습니다. 자신이 성도들의 눈치를 보면서 좋은 말만 한 목사였지 않나 회개한다는 것입니다.

네, 분명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늘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주십니다. 그러나 그런 면만을 자주 말하고, 더구나 그 사랑과 은혜를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으로 자주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이 아니라 사람의 계명입니다.
‘하나님이 집사님 앞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권사님 축복합니다 다 잘될 겁니다. 성도 여러분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승리를 주실 것입니다...’ 이런 말을 습관적으로 자주 말하는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최근에는 교회마다 성장이 둔화되고 또 교회간에 서로 경쟁이 되다 보니, 더 그런 현상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신자들도 이왕에는 좋은 말을 많이 듣고, 잘 된다고 하는 교회를 가길 원합니다.
그래서 최근 우리의 교회 안에는 이와 같은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축복과 성공과 승리와 능력이 마치 본질적인 하나님의 말씀이자 가르침인 것처럼 자리를 잡았습니다.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는 신자들에게도 그런 축복이 남발됩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언제나 역사적으로 반복되어온 문제입니다. 구약에도 보면 예언자들 가운데 언제나 좋은 예언만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전쟁을 앞두고 왕이 물으면 늘 이렇게 말하는 것이죠. “왕이여 올라가소서 여호와께서 왕에게 승리를 주시리이다.” 그러나 그 왕은 하나님 앞에 올바르지 않은 왕입니다. 그 예언자는 하나님이 보내신 예언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항상 축복하시고 내가 어떻게 살아도 항상 은혜를 내려주신다는 그런 교회의 달콤한 가르침들은 사람의 계명입니다. 일주일에 주일 예배 한번만 참석하는 많은 신자들은 그런 목사님의 달콤한 말씀만 듣습니다. 그런 말을 자주 듣다보면, 어쩌다 듣는 심판과 회개와 우리의 책임을 말하는 말씀은 얼마나 어색하고 거북한지... 우리는 점점 회개할 줄 모르는 완고한 신자가 되어 갑니다. 많은 교회와 신자들이 지금 이런 영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못난 우리를 사랑하시고 은혜 베풀어 주시는 것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와 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은혜의 하나님이시니까, 당연히 우리에게 그렇게 베풀어주신다고 오해하면 안 됩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와 백성이 되었으니, 당연히 그런 복을 권리처럼 받는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감사함으로 받아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지도 않고 복은 복대로 받아서 세속적으로 잘 살려고 한다면, 그런 생각은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지 않고 사람의 계명을 따른다는 표시입니다.

우리의 삶은 최근 부쩍 어렵고 힘들죠. 교회와 목회자는 그런 지치고 힘든 성도들에게 세속적인 축복과 힘과 위로를 주려는 유혹을 받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찬가지로 그렇게 힘들고 어려웠던 유대 백성들에게 팔복을 말씀하셨습니다. 팔복의 그 복들은 모두 종말론적이고 근본적이고 영적인 복들입니다. 당장 잘 살게 되고 당장 우리 살림에 도움이 되는 복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때의 제자들과 성도들은 그 말씀을 듣고 힘과 용기를 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너무 달콤한 말씀만 기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려운 것은 어려운 것이고 현실은 현실입니다. 당장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현실은 냉정하고 삶은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 마음엔 평안과 소망이 있습니다. 달리 보면, 현실의 비바람과 폭풍 속에 그런 평안과 소망이 우리의 진정한 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과 사람의 계명을 잘 분별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의 계명은 이외에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분별하고 올바른 신앙을 가질 수 있는 비결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성경적 정통을 지키는 참된 교회와 신자가 될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우리 들에핀믿음찬교회는 하나님의 계명을 밝히 알고 지켜 나가는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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