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베드로의 개인 신앙체험

믿음찬교회 0 93 2021.08.17 12:45
베드로의 개인 신앙체험
마 14:22~33
2021.08.15.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오병이어 기적 때문입니다. 오병이어 기적은 여러모로 특별한 기적이었기 때문에, 무리들도 흥분하였고 제자들도 흥분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리들을 해산하고, 제자들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오병이어 사건이 본연의 뜻을 넘어 변질되지 않도록 조치하셨습니다. 그리고 홀로 기도하시러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런데 그 밤에 배를 타고 떠났던 제자들에게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갈릴리 바다의 거센 바람과 물결이 제자들의 항해를 위태롭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갈릴리 바다는 수심이 깊고 돌풍이 불 때가 많습니다. 시간은 밤 4경이었는데, 오늘날로 하면 새벽 3~6시 사이였습니다.
이 사실을 예수님이 아셨습니다. 그리고 바다 위로 걸어 제자들에게로 가셨습니다. 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렇게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가끔 아무렇지 않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과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을 아무렇지 않게 하시는 것이죠.
구약에 보면 바다 위를 걷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로 나옵니다.
(욥  9:8)  그가 홀로 하늘을 펴시며 바다 물결을 밟으시며
(시 77:19) 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곧은 길이 큰 물에 있었으나 주의 발자취를 알 수 없었나이다.
(합 3:15)  주께서 말을 타시고 바다 곧 큰 물의 파도를 밟으셨나이다.
구약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은 고대인들에게 바다란 신화적인 두려움의 대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미지의 어둡고 깊은 영역에 신화적인 신과 괴물이 존재한다고 믿었죠. 그래서 하나님이 바다를 밟는다는 것은 그런 신화적인 신들과 존재들을 주관하신다는 의미가 됩니다. 창세기 1장에 하나님이 둘째 날에 물 가운데 궁창을 만드시고 물과 물을 나누시는 것도, 물 속에 있는 신화적인 악한 존재를 하나님이 주관하시고 드러내신다는 잠재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와 같이 물 위를 걸으심으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제자들에게 드러내고 계십니다. 하지만 그런 예수님을 그 밤의 물결치는 바다 위에서 보게 된 제자들은 정말 무섭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사실 우리가 하나님을 직접 경험하면 상당히 두렵습니다. 천사만 봐도 상당히 두렵죠. 그것은 공포스럽다기보다는 아주 신비하고 두렵고 떨리는 경험입니다. 그런 경험을 어떤 신학자가 누미노제 체험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나의 수호신조차 겁을 집어먹는 듯한 느낌... 그것이 누미노제이죠. 그 밤 갈릴리 바다 위에서 제자들은 그런 체험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런 모습을 보여주신 것은 제자들을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앞으로 제자의 삶과 사역을 살아가려면 그와 같은 특별한 체험과 경험치가 있어야 함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안심하라고 말씀하시고 배에 오르시죠. 제자들은 예수님께 절하며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고 한 차원 높아진 고백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위기에 처한 제자들을 구하시면서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모습을 보이신 공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은 이 사건을 말하면서 다른 복음서가 말하지 않는 한 가지 내용을 더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사건 안에 있는 예수님과 베드로의 개인적인 에피소드입니다.
베드로는 물 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에게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말하죠. 베드로가 어떤 생각으로 그렇게 말했는지는 의문입니다. 그것이 믿음인지, 용기인지, 엉뚱함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베드로는 그런 생각을 했고 예수님에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오라고 하시자,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걷기 시작합니다. 예전에 제가 구명조끼를 입고 스노클링 장비를 하고 수심 3미터 정도 되는 바다에 내린 일이 있습니다. 다들 내려서 할 수 없이 보트에서 내렸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보면 베드로가 얼마나 담대한 사람인지... 그러나 배에서 내려 바다를 걷던 베드로는 결국 물에 빠지고 예수님은 베드로를 구해주시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능력을 제자들에게 보이신 사건 안에 이렇게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의 개인적인 에피소드가 들어있습니다. 이 에피소드는 언뜻 보기엔 베드로의 엉뚱함이 낳은 해프닝 같습니다. 그러나 단순한 에피소드와 단순한 해프닝 같은 일을 성경이 기록할 리는 없습니다. 유명한 말이 있죠. ‘성경은 지면을 낭비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사건의 의미는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이지만, 또 다른 의미는 제자들의 개인적인 특별한 체험입니다. 그 체험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체험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걷고 예수님이 그를 건져주신 사건의 의미도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이지만, 또 다른 의미는 본질도 베드로의 개인적인 특별한 체험입니다. 그 체험은 베드로에게 잊혀지지 않는 특별한 사건이 되고, 그래서 베드로가 평생 주님을 따르는 결정적인 사건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에피소드나 해프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의... 잊을 수 없는 신앙체험이라고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우리 신앙은 예배에 참석하고 말씀을 듣고 가르침을 따르고... 그런 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은 잘 알지 못하는 하나님과 나 사이의 개인적인 사건과 관계와 체험... 그런 것이 많은 부분을 차지합니다.
돌아가신지 조금 되지만, 함석헌 선생이란 분이 계십니다. 1901년 생이고, 1989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은 늘 자기 인생을 ‘하나님의 발길에 채여’ 살았다고 말했습니다. 교사를 하다가 그만두고 농사꾼이 되려다 농사꾼이 못되고 해방 후에는 동양고전을 강의하기도 하고 잡지에 글을 기고하기도 하고 시국선언을 하기도 하고 농장을 하기도 하고 성경공부 모임을 인도하기도 하고 잡지를 발행하기도 하고... 그러나 뭐 하나 뚜렷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말하면서 자신은 늘 하나님의 발길에 채여서 산 인생이라고 말합니다.
보통은 하나님의 손길에 인도를 받았다고 하는데, 이분은 하나님의 발길에 채여 살았다고 말하는 것이 특이하죠. 그분의 인생이 그렇게 된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고 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된 줄 믿습니다.
그의 그런 일생은 고등학생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평양고등보통학교를 다닐 때 학생 신분으로 3.1 만세 운동 준비를 하고 당일에 만세 시위에 참여했죠. 그러나 3.1 운동 후 학교에 돌아가기 위해서는 반성문을 제출해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목이 터져라 대한독립 만세를 외친 일을 며칠 후 잘못되었다고 반성문을 제출하자니 도저히 양심이 허락하지 않아서... 그래서 그는 고향 집으로 돌아가 2년 정도 허송세월을 하게 됩니다. 잠시 반성문을 쓰고 학교를 다니면 될 것 같은데, 그는 양심을 선택하고 어려운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것이 신앙입니다.
똑똑하고 꿈 많은 시절 학교도 못 가고 집에만 있는데, 아는 친척의 소개로 2년 후 오산학교라는 기독교 학교에 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는 거기서 자신의 일생의 스승인 유명모 선생과 이승훈 선생이란 분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신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는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갑니다. 거기서도 많은 일화가 있는데, 특히 관동대지진 당시 일화가 특별합니다. 대지진이 당일에 친구 집에 갔다가 참변을 면하고, 또 친구 집을 나온 후 그 집이 무너져 또 참변을 면합니다.
그리고 며칠 후 매일 다니는 골목길을 나서는 순간 일단의 일본인 폭도들과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그 폭도들은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거짓 선동에 선동되어 조선인들을 죽이러 찾아다니고 있었죠. ‘저기 조선놈이 있다, 저 놈이 진짜다’라고 말하며 그 폭도들이 다가오는 그때, 마침 자신을 알던 일본인 순사 한 명이 그 광경을 보았습니다. 그 순사가 나서서 그들을 타이르고 말려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그 관동대지지 당시 조선인 학살을 면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해방 후 우리나라의 어렵고 힘든 역사가 진행될 때, 그는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고 자기의 몫을 감당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니 자연히 여러 가지 고초와 굴곡진 일을 많이 겪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함석헌 선생은 자신의 일생이 자기 뜻대로 살지 못하고 그렇게 하나님의 발길에 이리저리 채여 산 것이라고 말합니다. 때로는 고초를 겪고 때로는 구원을 받고... 그런데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보면 그런 일들 하나하나가 하나님과 그분의 사건과 관계와 체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갈릴리 바다에서 어부로 계속 살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당시 농민들 대부분은 가난했지만, 어부들은 그래도 중산층 정도 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당시 로마의 압제가 어떻든 성전당국의 무능과 횡포가 어떻든 하나님의 구원이 어떻든... 그저 개인 생활에만 전념하고 살았다면 예수님을 만날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비록 어부였지만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구원이 궁금했고 하나님의 뜻이 궁금했고 하나님의 말씀이 듣고 싶었던 사람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세례요한의 제자였던 형제 안드레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하자 같이 그분을 보러 같이 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시몬이었던 베드로는 예수님에게서 베드로라는 이름을 받습니다. 예수님과 베드로의 첫 번째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후 예수님이 베드로를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베드로는 그 말씀을 알아 듣고 그 길로 예수님을 따라 나서게 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보면 우리가 베드로를 달리 봐야 되지 않나 생각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놀라운 말씀과 놀라운 이적을 너무나도 많이 목격했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명확하게 알지는 못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바뀌고 있었지만 특별한 선지자와 선생님이 아니신가... 그런 정도로 이해를 했을 것입니다. 아무튼 베드로는 예수님이 좋았고 제자들의 맏형 노릇을 하면서 열심히 예수님의 사역을 도왔습니다.
그런데 어제 결정적으로 오병이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 사건은 엄청난 사건이었죠. 그러나 이상하게도 예수님은 그 사건을 서둘러 끝내버리셨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먼저 배 태워 보내셨죠.
배를 타고 가면서 베드로는 그 일을 머리 속에서 정리하려고 했지만, 바람은 불고 물결은 치고 정신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참 애를 쓰던 그때 예수님이 바다 위에 나타나셨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무서워하고 난리가 났죠.
그런데 그 순간 베드로는 무언가 머리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모습... 그래서 이분의 진면목은 우리의 생각과 이해를 넘어선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이 ‘내니 안심하라’고 말씀하신 순간, 그런 주님이심을 확인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마 자신도 모르게 이 말이 터져 나왔을 것입니다.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시죠. “오라” 베드로는 성큼 배에서 내려 물 위를 디뎠습니다. 그리고 걸었습니다. 얼마나 경이로운 체험일까요? 짧은 순간이지만, 베드로는 물 위를 걸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능력을 주셔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러나 물결이 치고 바람이 몰아치는 상황에서 베드로는 바람을 보고 맙니다. 그리고 이내 현실을 깨닫고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자 자기 몸이 물에 빠지기 시작합니다. 성경의 이 표현을 보면 아마 한 번에 빠진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원어로는 ‘빠지기 시작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베드로가 두려워하는 마음만큼 빠졌던 것 같습니다. 결국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소리 질러 구원을 요청하게 되고, 예수님은 즉시 그의 손을 잡아주셨습니다.
 
여러분, 아마 이것이 시간상으로는 1~2분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짧은 시간 동안 정말 엄청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첫 번째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보고 엄청난 생각을 했습니다. 두 번째로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엄청난 믿음으로 물 위로 내렸습니다. 세 번째로 베드로는 물 위를 걷는 엄청난 능력체험을 했습니다. 네 번째로 베드로는 바람을 보는 순간 물에 빠지는 엄청난 실패체험을 했습니다. 다섯 번째로, 예수님에게 소리치는 순간 그분의 손이 자신을 구원하는 엄청난 구원체험을 했습니다.
베드로는 평생 배워도 다 못 배울 이 모든 일을 이 짧은 시간에 다 배우게 된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체험을 한 베드로는 얼마 후 놀라운 고백을 하게 되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시죠.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제자들은 세례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또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때 시몬 베드로가 이런 고백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그 아들이시니이다.” 여러분, 제자들도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죠. 그러나 그것은 이 베드로의 고백과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영어로 a son of God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베드로가 고백하는 고백은 the son of God입니다. 예수님을 바로 그 메시아로 고백한 것이죠. 베드로가 이런 놀라운 고백을 어떻게 하게 되었는가... 바로 오늘 본문의 사건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후 베드로는 비록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가지만, 그분의 부활 소식을 듣고 맨 먼저 무덤으로 달려가고 이후 부활의 증인으로 사도로 주님을 끝까지 따르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들의 삶에서도 이런 베드로의 개인적인 특별한 체험이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분을 믿는 담대한 체험, 그분을 믿어서 승리하는 엄청난 체험, 그리고 주님이 아니라 세상을 보다가 실패하는 엄청난 실패체험, 그리고 그런 가운데 다시 주님을 믿어서 구원받는 엄청난 구원체험... 그런 체험들이 여러분의 삶 속에 있으시길 축원합니다.
우리 신앙은 그런 체험의 연속입니다. 그런 개인적인 사건과 관계와 체험이 주님과 우리 사이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어떤 불분명한 신비 체험...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진짜 방언이 있죠. 그러나 이상한 가짜 방언도 많습니다. 진짜 성령체험이 있죠. 그러나 이상한 가짜 성령체험도 많습니다. 뒤로 넘어지고 몸을 떨고 입신에 들어가고... 그러나 그런 체험 아무리 많이 해도 별로 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이 달라지지 않고 삶이 달라지지 않는 반짝하는 체험은 가짜입니다.
그러나 오늘 베드로가 체험한 체험은 그의 마음과 생각과 고백이 달라지는 체험이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주님과의 사이에서 이런 인격적인 체험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이런 인격적인 체험은 그냥 오지 않고,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살아가려고 애쓸 때 오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믿고 따랐기 때문에, 함석헌 선생이 하나님을 믿고 양심을 따르는 일생을 살았기 때문에 그런 체험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그저 내 삶만을 잘 살려고 하고 살면 그런 기회는 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정직하고 올바른 신앙과 삶을 추구하면 우리는 주님과의 사건이 생기고 체험이 생기고 주님과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믿음의 관계가 만들어질 것입니다.
네, 바로 이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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